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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순의 문명산책] 빛을 가두어 문명을 만든 인류

2026-08-21 06:00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세상은 빛이 빚어낸 온갖 색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빛은 붙잡을 수 없고, 색은 저절로 머물지 않는다. 빛이 사라지면 색도 사라진다. 문명은 어쩌면 사라지는 빛을 붙잡아 오래 머물게 하려는 인간의 도전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에서 색을 추출하여 그것을 돌과 벽, 천과 도자기 위에 남겼다.


그러나 인간은 색을 붙잡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색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 다른 색을 구분했다. 색이 방위가 되고, 방위가 공간이 되며, 공간이 질서가 되었다. 오방색(五方色)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도 아니다. 중국에서부터 중앙유라시아의 튀르크·이란계 전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관념은 지명에도 흔적을 남겼다. 북쪽의 흑해, 남쪽의 홍해, 서쪽의 지중해는 각각 흑·홍·백색으로 연결된다. 동쪽의 청해는 딱히 특정되지는 않았으나 카스피해일 수도 있고 아랄해일 수도 있다.


그 질서 속에서 인간은 드디어 색을 물질화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푸른색을 얻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바다크샨의 험준한 산맥에서 청금석을 채굴했다. 라피스 라줄리라 불리는 이 푸른 돌은 수천 년 전부터 먼 교역로를 따라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왕과 신의 세계를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것을 곱게 갈아 만든 울트라마린은 유럽에서 가장 귀한 안료가 되었다. 화가들은 거룩한 존재를 표현할 때 이 푸른빛을 사용했고, 성모 마리아의 망토는 천상의 푸른빛으로 빛났다.


물질이 된 색은 교역을 통해 이동하며, 다른 색과 다른 기술을 만났다. 페르시아의 코발트 안료를 만난 중국 경덕진의 도공들은 백색의 도자기 위에 푸른 문양을 입혀 불가마에서 구워냈다. 백색은 청색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되었고, 청색은 백색 위에서 비로소 자신의 깊이를 드러냈다. 하나의 색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 서로 다른 색의 겹침으로 청화백자를 탄생시켰다. 그것은 다시 이슬람 세계와 유럽으로 건너갔다. 실크로드는 물건을 운반한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빛이 만나 새로운 색채를 만들어낸 길이었다.


19세기에 합성염료가 등장하면서 인간은 마침내 자연이 제공하는 색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스스로 색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고, 희귀했던 색이 대량으로 복제되기 시작했다. 왕궁과 성당의 색은 거리로 내려왔다. 디지털 화면의 작은 픽셀 속에서는 수천만 가지의 색이 만들어져 인간은 더 이상 색을 물질로 소유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 색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기 시작한다. 뉴턴이 색을 빛의 물리적 현상으로 분석했다면, 괴테는 색을 인간의 눈과 정신이 함께 만들어내는 경험이라고 했다. 색은 자연에 이미 완성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보고 느끼고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하나의 색이 된다는 것이다. 같은 빛이라도 인간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빛은 색이 되고, 색은 공간의 질서를 따라 물질이 된다. 서로 다른 질서의 만남은 색을 문화로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문화가 된 색으로 이야기와 욕망을 소비한다. 색은 여전히 문명의 가장 강력한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찬란한 물감이 쏟아지는 가을이 기다려진다. 자기만의 색을 가진 사람이라면, 수억 년 지구가 빚어낸 빛과 색으로 삶의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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