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직후 1603년 주민 힘으로 북천교 건설
평해군수 조인징 허락 받아 돌다리 놓아…100여 명 참여 기록
‘한오십동·김줏석·이줏사리…’ 우리말 이름 한자로 남겨
울진 기성면 국도옆에 북천교비가 세워진 모습. 원형래기자
'우리동네 문화탐사'를 위해 심현용 박사와 함께 우산을 들고 하천으로 내려섰다. 이날 탐사의 주인공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평해 북천교비(平海 北川橋碑)'다.
비를 맞으며 하천을 따라 걸어보니 생각보다 물길이 넓었다. 지금은 하천 주변에 나무와 풀이 무성하지만 곳곳에 넓은 모래지형이 남아 있다.
"지금은 나무가 자라서 옛 모습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넓은 모래하천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현장을 바라보니 왜 이곳을 옛 기록에서 '사천(沙川)'이라 불렀는지 조금씩 이해됐다.
바닷물이 밀려들면 길이 끊겼던 사천, 평해 북천교비는 조선 선조 36년인 1603년 세워졌다.
임진왜란 직후 국가 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평민들이 자발적으로 자본(시주)과 노동력을 모아 인프라를 재건했다는 점은 조선 후기 향촌 사회의 변화를 상징한다.
1474년 관 주도로 중수된 한양의 '살곶이다리' 등과 비교할 때, 북천교는 '공대주'와 '대시주'라는 민간의 자발적 펀딩으로 거대한 돌다리가 축조되었다. 이는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공백을 민초들의 자생력과 공동체 연대로 극복했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현 박천교(군자교) 밑에 지금은 모래길로 돼 있는 모습. 원형래기자
현재 안내판에는 북천교비가 기성면 구산리와 평해읍 월송리 사이를 흐르는 사천 인근에 있으며, 비석 앞면에는 북천교를 세우게 된 경위와 연대가 기록돼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 후기 당시 사천은 바닷물과 맞닿아 있어 물이 자주 넘쳤다. 물이 불어나면 주민들은 물론 관청을 오가는 사람과 장사꾼, 여행객들의 통행까지 어려웠다.
실제 비문에는 평해군 북쪽 10리 월송 부근에 모래하천이 있고 바다와 가까워 물이 넘치면서 공적·사적인 왕래에 모두 어려움이 있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금처럼 제방도, 포장도로도, 콘크리트 교량도 없던 시절이었다.
북천교 돌다리가 사라진후 새롭게 만든 군무교가 놓여 있다.원형래 기자
평소 모래 위로 사람들이 오갔다 하더라도 큰물이 들거나 바닷물의 영향을 받으면 길 자체가 끊겼을 가능성이 크다.
현장에서 직접 하천의 폭을 바라보니 당시 사람들이 왜 큰돈과 노동력을 들여 돌다리를 만들려고 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 힘으로 돌다리를 놓자"
주민들은 결국 뜻을 모았다.
비문에는 당시 평해군수 조인징(趙仁徵)의 허락을 받아 주민들이 의논해 돌다리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오늘날처럼 행정기관이 예산을 편성하고 업체에 발주한 공사가 아니었다.
주민들이 생활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고 당시 지방관의 허락을 받아 추진한 일종의 주민 주도형 사회기반시설 사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심현용 박사가 북천교비에 대해 인터뷰하는 모습. 원형래 기자
누군가는 재물을 내고, 누군가는 돌을 운반하고, 석수는 돌을 다듬었을 것이다. 또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이나 물품을 마련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북천의 돌다리였다. 임진왜란 직후 어떻게 이런 대공사를 했을까
북천교 건설이 더욱 주목되는 것은 시기 때문이다.
1603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큰 전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 백성들의 경제적 형편이 넉넉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평해 사람들은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았다.
현장에서 바라본 사천은 작은 개울이 아니었다.
오늘날 중장비를 이용해도 교량 건설은 만만한 공사가 아니다. 하물며 423년 전에는 돌을 구하는 것부터 운반하고 다듬고 쌓는 과정 대부분을 사람의 힘에 의존해야 했다.
심현용 박사는 "평해 북천교비는 임진왜란 이후 어려운 시기에도 지역 주민들이 힘을 모아 큰 규모의 돌다리를 건설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생활사 자료"라며 "비석에 남은 100여 명의 이름과 사천이라는 지명, 당시 하천과 교통로의 모습을 통해 400여 년 전 평해지역 공동체와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데 큰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비석 앞뒤에 남겨진 100여 명의 이름
북천교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사람의 이름이다.
현재 문화유산 안내판에는 북천교 건립에 직접 참여한 사람뿐만 아니라 공사를 위해 돈이나 음식을 기부한 사람 등 100여 명의 이름이 비석 앞뒤에 기록돼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연구자료에서도 대시주 91명과 공양주 3명, 별좌 2명, 화주 등을 포함해 모두 10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비문에는 공사를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공대주 김홍수, 돌을 다듬은 석수 황종이의 이름도 확인된다.
즉 북천교비는 단순히 '1603년에 다리를 세웠다'고 기록한 기념비가 아니다.
누가 그 다리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탰는지까지 기록한 주민 공동체의 명부인 셈이다.
'한오십동·김줏석·이줏사리'…423년 전 평해 사람들의 이름
안내판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당시 주민들의 이름이다.
안내판에는 '한오십동', '김줏석', '이줏사리', '김무음석', '황말정', '임늦동', '정막동', '봉봉' 등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부르던 것으로 보이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사례가 소개돼 있다.
북천교비에 앞 ,뒤 새겨진 100여명 이름이 있어 그 당시 주민 공동체의 명부인 셈이다. 원형래 기자
연구자료에도 막지, 덕개, 준이, 늦금이, 봉봉을 비롯해 김줏돌이, 이줏사리, 김늦쩡, 황끝쩡, 황돌바우 등 독특한 이름들이 확인된다.
북천교비는 단순한 토목 공사 기념비를 넘어 17세기 초 평민들의 실생활 언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언어 타임캡슐'이다.
'한오십동', '김줏석', '이줏사리' 등 이두식으로 표기된 100여 명의 이름은 양반 중심의 족보나 관찬 사료에서는 찾기 힘든 귀중한 국어사적 사료다.
우리말 발음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기록한 이 명부는 당시 향촌 사회 기층민들의 작명 방식과 언어생활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것이 북천교비의 또 다른 가치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통해 당시 평해지역 주민들의 신분과 사회구조는 물론 우리말과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표현했는지까지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안내판 역시 "수많은 사람 이름을 당시 발음대로 적어 두었다는 점에서 지역 사투리와 언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의 기성면 구산리와 평해읍 월송리 경계, 현재의 하천과 옛 기록을 비교해 보면 당시 평해지역의 행정구역과 교통로, 마을 간 관계를 추적할 수 있다.
심 박사와 하천을 걸으며 살펴보니 지금도 물길 주변으로 넓은 모래층이 확인됐다.
현재는 수목이 들어섰지만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게 모래가 펼쳐진 하천이었을 가능성을 현장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넓은 하천을 사람들이 매일 건너야 했다. 그것이 북천교를 만든 가장 현실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01년 『울진군지』에는 비문은 전하지만 비석 자체는 유실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2001년 가을 당시 경주문화원 사무국장이던 최모씨는 포항 해양경찰 부대 인근 도로변에 방치된 비석을 우연히 발견했다.
녹슨 철사와 페인트로 훼손된 비석을 경주문화원으로 옮겨 비문을 조사한 결과, '平海郡北十里越松(평해군 북쪽 10리 월송)'과 '萬曆三十一年三月(1603년 3월)'이라는 글자가 확인되면서 울진 평해의 북천교비임이 밝혀졌다.
당시 『울진군지』에는 비문만 전하고 비석은 유실된 것으로 기록돼 있었던 만큼, 포항 도로변에서의 발견은 사라진 울진 문화유산을 다시 찾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후 북천교비는 400여 년 전 평해 주민들이 힘을 모아 돌다리를 건설했던 역사를 오늘날까지 전하는 소중한 지역문화유산으로 남게 됐다.
400여 년 뒤 그 비석마저 고향을 떠나 포항의 도로변에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한 문화인의 눈에 띄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돌다리는 사람들을 하천 건너편으로 건네줬고, 북천교비는 423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돌아왔다.
평해 북천교비는 단순히 오래된 비석 한 기가 아니다.
그 속에는 옛 지명과 하천, 길과 다리, 전란 이후의 삶, 주민들의 공동체 정신, 100여 명의 이름과 17세기 평해 사람들의 말이 함께 새겨져 있다.
김혜정 문화관광과장은 "이번 평해 북천교비의 재조명을 통해 지역의 소중한 역사 문화자원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면서 "울진군은 앞으로도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비 내리는 사천을 걸으며 만난 것은 돌다리의 흔적만이 아니었다.
어려운 시대에도 서로 힘을 보태 길을 만들었던 423년 전 '우리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원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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