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정 대구문인협회 수필분과 부위원장
옷장을 열면 가끔 낯선 내가 기다리고 있다. 늘 손이 가던 무채색 옷 사이에서 유난히 환한 노란 원피스가 눈에 들어오는 날이 있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오늘은 한번 입어 볼까.' 옷 한 벌을 갈아입었을 뿐인데 거울 속 얼굴에 생기가 돌고 걸음마저 가벼워진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숲길에 서니 초록과 노랑이 선명하게 어우러진다. 작은 베레모까지 쓰자 마음 한쪽에 숨어 있던 소녀가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밝은 색 앞에서 망설인다. 너무 화려하지 않을까, 남들이 어떻게 볼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다 보면 옷장뿐 아니라 마음까지 무채색이 되기 쉽다.
하지만 색깔에 나이가 있을까. 노랑이 젊음의 전유물도, 분홍이 소녀에게만 허락된 색도 아니다. 같은 사람인데 옷에 따라 표정과 몸짓이 달라진다. 한 사람 안에 여러 빛깔의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재미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한결같음'을 미덕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일이다. 봄의 연둣빛 나무는 여름이면 짙은 초록이 되고 가을이면 붉고 노랗게 물든다. 우리는 그런 나무를 변덕스럽다고 하지 않는다.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고 감탄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조금 달라도 괜찮다. 늘 단정한 옷만 입었다면 하루쯤 화려한 색을 골라도 좋다. 변신은 과거의 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면 우리는 여러 몫을 감당하느라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잊을 때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색을 좋아했더라. 답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평소 입지 않던 색을 고르고 망설였던 모자를 써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옷이 아니라 자신에게 건네는 허락이다. '이래도 괜찮다.' 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큰 자유를 준다. 변신은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잊고 있던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움의 기준도 달라진다. 주름 없는 얼굴보다 편안하게 웃는 얼굴이 아름답고, 유행하는 옷보다 자신의 취향을 알고 입는 사람이 멋스럽다. 결국 멋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완성된다.
노랑도 나이고 분홍도 나이며 검정도 나다. 우리 안에는 아직 입어 보지 않은 색이 있고 만나지 못한 자신이 남아 있다. 나이는 색을 가리지 않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좋아하는 색을 하나씩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이제껏 망설였던 색까지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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