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60824028388222

[홍덕률의 세상읽기] ‘지성과 품격’의 사회를 위하여

2026-08-25 06:00
홍덕률 전 대구대 총장

홍덕률 전 대구대 총장

1706년 8월25일이었으니 꼭 320년 전 오늘이었다. 미국 동부의 작은 마을, 세일럼의 한 교회 앞. 26세 여인이 주민들 앞에 섰다. 앤 퍼트넘 주니어, 그녀는 14년 전에 저지른 죄를 참회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너무 늦었다. 그가 마녀로 고발한 62명의 마을 주민 가운데 19명이 처형되고 1명은 바위에 눌려 압살당했으며 그외 여러 명이 감옥에서 사망한 뒤였기 때문이다. 미국이 매우 부끄러워하는 '세일럼 마녀재판 사건'의 한 장면이다.


유럽은 더했다. 15세기 말에서 18세기 사이에 마녀로 몰려 처형당한 이가 무려 4~6만명에 달했다. 18세기 후반을 넘기면서야 마녀재판은 인류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제 암흑과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났다고 환호했다. 과학은 미신을 밀어내고, 계몽은 비판정신을 일깨우며, 법치와 민주주의는 자의적 처벌을 억제할 것으로 기대했다.


# 마녀사냥은 끝났는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시 착잡한 질문 앞에 서게 됐다. '마녀사냥은 진정 끝난 것인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종교, 이념, 인종, 젠더, 계층, 지역을 둘러싼 적대가 조직적으로 동원되고, 사람들은 사실과 분석보다 선동에 포섭되며, 성찰보다 섣부른 확신에 매달린다. 복합적인 사회문제에 대한 처방도 손쉬운 희생양 만들기로 치환된다. 그 결과 특정 개인과 집단은 토론과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추방과 제거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혐오와 배제의 극단 정치와 민주주의 후퇴도 이러한 토양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21세기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현대판 마녀사냥'의 익숙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음은 물론이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1963년에 쓴 책에서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을 분석하며 '반지성주의'를 경고했다. 그는 공적 삶에서 지성과 숙고, 전문성에 대한 불신이 확산될 때 민주주의 자체가 취약해진다고 봤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파편화된 채 생각하기를 멈춘 대중이 허위의 단순 논리를 받아들일 때 전체주의가 발흥한다고 분석했다. 움베르토 에코 역시 비판 정신에 대한 적대와 차이에 대한 공포를 파시즘의 징후로 지목했다. 이들의 통찰은 각기 다른 시대와 맥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공통된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실을 경시하고, 숙고를 조롱하며, 복잡한 현실을 적과 동지의 이분법 구도로 환원하는 사회는 결국 야만적인 반지성주의에 사로잡힌 채 분열과 적대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빨갱이', '수꼴'이란 낙인은 수십 년째 견해와 이해를 달리하는 상대를 배제하고 척결하는 한국판 마녀사냥의 칼로 사용되어 왔다. 상대 성을 적으로 돌리는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이해하기보다 특정 지역이나 세대 전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 지역갈등과 세대전쟁도 일상이 되었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 인스타그램은 물론, 심지어 학교 교실에서까지 우리는 낙인찍기와 혐오, 가짜뉴스와 음모론에 둘러싸인 채 살고 있다. 세일럼의 비극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현대판 마녀사냥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현상들은 각기 달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개별성과 맥락을 지우고 상대를 적 혹은 마녀의 이름으로만 호명한다는 점, 대화와 토론의 공간을 혐오와 조롱으로 채운다는 점, 사실 확인보다 진영 결집을 우선한다는 점이다. 반지성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흐름이 주변의 일탈에 머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각계에서 적대의 깃발을 높이 들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지도층 인사들이 적지 않다. 특히 정치권의 반지성주의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경쟁 관계의 상대 당을 척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같은 당 내에서도 적대와 증오의 언어를 쏟아낸다. 그들의 무책임한 막말과 선동으로 정치는 더 이상 설득이 아니라 동원으로, 노골적인 폭력으로, 사생결단식의 싸움판으로 전락했다. 나아가 사회적 편견에 제도적 권위를 부여하고 광범위한 정치혐오를 유발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청소년의 세계관에도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위험하다.


# '지성과 품격'을 회복해야


2016년, 영국의 옥스퍼드사전은 'post-truth', 즉 '탈진실'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 사실이 여론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이 감정과 개인적 신념에 대한 호소보다 약해지는 상황'으로 설명했다. 10년이 지난 오늘날, 태평양 건너 이 땅의 현실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짚고 있는 진단이었다.


정치인과 각계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지성과 품격의 회복'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지성'은 많이 아는 능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실과 진실'을 중시하는 태도, 내 생각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적 겸손', 내 편의 주장이라도 검증하려는 '절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 타인을 함부로 악마화하지 않는 '윤리적 감수성'을 뜻한다. 품격은 타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 나와 다른 이와 함께 하겠다는 '관용',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지성과 품격은 갖추면 좋은 개인적 미덕이 아니라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사회윤리 덕목이며 민주공화국의 사회적 기초인 것이다.


320년 전 오늘, 앤 퍼트넘의 참회와 고백은 비록 늦긴 했지만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일깨웠다. 끔찍한 비극일수록 사후의 참회가 아니라 사전의 경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과거의 미신이 아니라 오늘의 혐오와 반지성주의이며, 중세의 종교적 광란이 아니라 현대판 마녀사냥 즉 집단 광기이다. 세일럼의 교훈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과학기술이 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해서 인간의 독단과 사회의 야만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없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지키려는 노력, 허위를 바로잡는 이성적 훈련,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존중하며 배려하는 품격, 무고한 타인을 희생양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적 결단이 전제될 때에만 우리는 현대판 마녀사냥의 비극을 멈춰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를 건강한 민주공화국으로 지켜내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