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균 경북연구원장
AI 사회에 대한 걱정과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AI 때문에 2025년부터 22세에서 25세 사이의 신입 채용이 크게 꺾였다고 한다. 경력 사다리의 첫 칸이 무너졌다고 한다. 더 이상 시민의 노동이 필요 없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비관론의 이론적 중심은 '점진적 무력화'이다. 인간은 보편 기본 소득으로 생계 문제만을 해결한 채 존엄과 정체성을 잃은 시스템의 피부양자가 된다고 한다. 즉 AI도 사회도 전혀 나쁜 뜻이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밀려난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는 가장 오래된 고전으로 AI 시대의 비관론을 표현한다. 이 영화에서 "나는 속임수로 트로이를 멸망시켜 제우스의 율법을 어겼다"고 괴로워하는 오딧세이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주인은 손님을 환대하고 손님은 주인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 제우스의 율법, 제니아(Xenia)이다. 오딧세이는 트로이의 목마에 복병을 심어 율법을 어겼고 우리는 AI를 학습시키면서 율법을 어겼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의 거대한 물류창고에서 유압 절단기로 책등이 잘린 채 고속 스캐너를 통과한 뒤 파쇄되기를 기다리는 수만 권 책들의 사진을 보았다. 앤스로픽이 AI를 학습시키기 위해 헌책방에서 수백만 권의 종이책을 사서 이렇게 스캐너에 갈아 넣었다. AI의 성장을 위해 인간의 창작 생태계 전체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현장이었다.
앤스로픽은 창작 생태계라는 주인 집에 들어가 주인의 재산을 약탈했다. 딥시크, 미니맥스 같은 중국 AI는 그런 앤스로픽의 집에 들어가 출력 데이터를 증류하는 방식으로 주인의 재산을 약탈했다. 우리 모두는 앤스로픽의 클로드를 쓰거나, 중국 AI를 공짜로 다운받아 미세조정하여 사업화하는 방식으로 약탈에 동참했다.
오딧세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문명을 만든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파괴했어. 앞으로 이어진 수백 년의 암흑기 동안 트로이의 이야기는 그저 노래로나 불릴 거야."
기원전 1184년 트로이를 정복하고 돌아온 아카이아인들은 곧 북쪽에서 철기를 가지고 내려온 도리스인들에게 정복당한다. 제우스의 율법 아래 400년 넘게 번영했던 아카이아인들의 청동기 문명, 그 찬란한 문자, 예술, 학문, 과학기술은 소멸하고 그리스 세계는 300여 년의 암흑기로 들어간다. 영화 '오딧세이'는 우리가 바로 그런 문명 소멸의 입구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과 비관론은 사실이 아니다.
인류의 인지 수준이 낮았을 때는 생산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생산 노동에서 찾았다. 그러나 지금은 인류의 인지능력이 발달했고 AI의 사용으로 생산이 쉽고 빨라졌다. 기계가 다 만드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인간은 기계가 만든 것을 읽고 가리고 평가한다. 평가 노동이 인간 존재 가치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인류사는 인간이 끊임없이 생산력을 높여 가치의 무게 중심을 생산에서 수용으로 이동해 온 역사였다. AI는 인간의 점진적 무력화가 아니라 인간의 최종 승리이며 발전의 완성이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1967)에서 글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은 글을 쓴 저자가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라고 말했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기원이 아니라 목적지에 있다. 독자의 읽는 노동이 곧 생산이다." AI 사회는 바로 이러한 바르트의 예언이 실현된 시대이다.
뇌졸중에 대한 뇌의 MRI, CT는 이미 AI가 정확하게 판독한다. 구조가 복잡한 심장 부위의 X선 사진도 AI가 정확하게 판독한다. 그런데 영상의학과 의사의 일자리는 사라지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 AI가 영상을 판독하자 판독할 영상의 수가 많아졌고 그것을 평가하는 인간의 일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환자의 의료비를 감안해 AI가 찾은 많은 병변 가운데 무엇을 먼저 치료할까 정하고, 영상을 환자의 과거 영상과 비교하고, 여러 진료 분야의 의사들이 어떻게 협진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인간 의사의 일이다.
AI가 인간의 지능을 초월해 박사 졸업자와 초등학생 정도의 격차에 도달한다 해도 끝까지 인간이 AI를 평가한다. 평가자는 생성자의 추론 전부를 몰라도 되며 국소적 정합성만 점검하면 된다는 것이 생성-평가의 비대칭성이다. 인간은 생성-평가 비대칭성에 입각한 흔적(Trace) 기반 감독, 감식력(Connoisseurship)을 통해 끝까지 AI에 대한 주도성을 유지한다. 이 같은 '인간 결정 우선주의'가 AI에 대한 국제적 컨센서스이다.
AI는 3년 전에는 없었던 시장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지방정부와 공공기관의 업무를 AI로 전환하는 '공공 AX 시장'은 2023년 3월 당시 매출이 0원이었던 시장이다. 경북연구원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챗지피티 API를 사서 '챗경북'을 만들었지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확산시키지 못한 아픔이 있다. 당시 안동까지 내려와 '챗경북'을 배워갔던 경기도청은 본격적인 지방행정 AX 플랫폼을 만들었고 현재 1조2천300억 원 규모로 성장한 공공 AX의 중심에 있다.
이 밖에도 AI로 영화와 광고를 만들고, 영상 제작에서 가장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부분을 만들어주는 'AI 콘텐츠 시장'이 있다. 법률, 의료, 관광, 스포츠, 행정, 세무 같은 특정 영역에 전문화된 소형 AI를 만들어주는 '에이전틱 AI 시장'도 있다. AI의 성능을 평가하는 'AI 벤치마크 시장'도 있다. 이런 시장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의 비전과 고임금이 있는 양질의 일자리들이다.
이런 일자리의 기저에 AI 평가학(Evaluation Science)이 있다. AI 평가학이야말로 향후 AI 시대의 학문들을 지지하는 기반 학문이다. 대부분의 학문 연구가 표본 조사에서 전수 조사로, 인간 판독에서 AI 판독으로 변해가는 상황에서는 인간이 해야 할 연구 설계 자체가 AI에 대한 평가 능력을 필수 기본(Mandatory) 역량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AI 사회의 인간은 AI에 의해 밀려나지 않는다. AI를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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