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문 대구문인협회 문학단지조성추진위원장
집에 들어서자 거실 바닥에 신문지가 펼쳐져 있다. 그 위에 갓 따 온 가지와 오이, 풋고추와 애호박이 싱싱한 윤기를 띠고 있다. 아내는 웃으며 처남의 텃밭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그제야 아내가 처남과 함께 165㎡(50평) 남짓한 밭을 일구고 있었다는 걸 안다. 내가 모르는 동안 아내는 씨를 뿌리고 싹을 기다리며 봄을 건너왔다. 신문지 위의 채소들이 새삼 낯설다.
한여름, 아내와 텃밭을 찾는다. 채소들이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저마다 제 빛깔을 드러낸다. 잎을 헤치다가 노란 땅콩꽃 몇 송이를 본다. 동전보다도 작은 꽃 앞에서 오래전 밭 하나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곳에 아버지가 서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땅콩 농사를 지으셨다. 노란 꽃이 지고 나면 가느다란 줄기가 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삽으로 흙을 끌어다가 포기 아래를 도톰하게 덮어 주셨다.
"이놈은 꽃이 지고 나면 줄기가 땅속으로 들어가 열매를 맺는 거다."
그 말이 신기해 포기 곁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포기 둘레의 흙을 손으로 다독이셨다. 그 곁을 서성거리며 언제 땅콩이 생기느냐고 자꾸 물었다.
나도 삽을 든다. 꽃 진 자리에서 내려온 가느다란 줄기 곁으로 흙을 끌어 덮는다. 몇 번 삽질하지 않았는데도 이마에 땀이 맺힌다. 곁에서는 아내가 쪼그리고 앉아 땅콩 포기 아래로 흙을 모아 준다. 줄기 곁을 다독이는 그 손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아버지의 손이 겹쳐 보인다. 땀을 훔치다, 내가 아버지처럼 등을 굽히고 있음을 깨닫는다.
손끝에 밴 흙냄새에서 수확철의 밭이 되살아난다. 아버지가 쇠스랑을 땅속 깊이 찔러 힘껏 들어 올리면 흙덩이 사이로 하얀 땅콩들이 우수수 딸려 나오곤 했다. 포기에 매달린 알들을 하나씩 따 모았다.
갓 캔 땅콩은 껍질에도 축축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하나를 까서 입에 넣으면 풋내 섞인 비릿한 맛이 났지만, 씹을수록 은근한 고소함이 번졌다. 욕심껏 먹었다가 밤새 배앓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땅콩을 캐는 날이면 막 나온 것을 하나쯤 까먹지 않고는 못 배겼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땅콩 몇 자루가 아니다. 쇠스랑을 든 아버지의 뒤를 따라 밭을 오가던 오후와 흙 묻은 손으로 까먹던 땅콩 한 알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는 갓 딴 가지와 풋고추가 놓여 있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밭 위에 어린 날의 땅콩밭이 겹친다. 아버지의 밭과 아내의 밭 사이에 내가 서 있다. 꽃은 이미 졌다. 보이지 않는 흙 속에서는 어린 땅콩들이 여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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