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 시민기자
AI에게 묻기만 하면 무엇이든 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검색창이 없다. 최근 2003년 개봉한 장항준 감독의 영화 '불어라 봄바람'을 다시 보며 이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영화는 소설가 '선국'과 다방 종업원 '화정'이 우연한 인연으로 한집에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삶과 상처를 알아가는 이야기다. 영화에서 화정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는 장면이 있다. 화정은 어머니와 함께 동물원에 갔다가 어미를 잃은 표범을 만난다. 그리고 자신 역시 어머니를 잃게 되는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선국은 화정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한 편의 시로 풀어낸다. 화정이 간직해 온 상처를 즉흥시로 어루만지는 순간이다. 필자는 여기서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표범과 소녀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본다. 어미를 잃은 표범과 어머니를 잃어가는 소녀가 말없이 마주하는 순간, 두 존재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위로가 흐른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도 정작 그 말에 담긴 마음은 놓칠 때가 많다. 말의 내용은 알아들었지만, 그 뒤에 숨은 외로움과 아픔까지 헤아리지는 못한다. 더구나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AI는 사람의 말을 놀라울 정도로 잘 알아듣는다. 질문에 답하고, 긴 글을 요약하고, 문장을 다듬으며 새로운 글까지 만들어낸다. 필요한 정보를 찾고 정리하는 능력에서는 이미 인간을 앞서는 영역도 있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사람에게 남은 역할은 무엇일까. 필자는 '마음을 듣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기억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까지 대신 느낄 수는 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았던 감촉, 오래전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 말하지 못한 채 가슴에 묻어둔 상처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다.
'불어라 봄바람'이라는 제목처럼 사람의 마음에도 계절이 있다. 겨울처럼 굳어 있던 마음에 누군가 찾아와 작은 바람을 일으키면 어느 순간 봄이 찾아온다. 영화 속 화정에게 선국이 그랬고, 선국에게 화정이 그랬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불편한 존재였던 두 사람은 함께 생활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알아가고, 어느새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이 영화가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를 넘어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AI 시대의 우리에게도 그런 봄바람이 필요하다. 더 빠른 답보다 조금 느린 대화가 필요하고, 더 많은 정보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한번 물어보면 어떨까. "요즘 무슨 생각하면서 지내?" 그리고 이번에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끝까지 들어보자. 어쩌면 그 짧은 질문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오래 기다려온 봄바람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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