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잡아 올린 싱싱한 바다의 맛…사람 냄새 나는 포구의 새벽
어선 너머 붉어지는 빛, 깨어나는 바다
3일·8일 오일장 열리는 감포공설시장
동해의 먹거리 즐기는 골목 식당 즐비
매일 새벽 5시 경매 치열한 삶의 현장
100년 항구에 깃든 오랜 세월의 흔적
경주 수산업을 책임지고 있는 새벽 감포항. 1925년 문을 연 감포항은 지난해 개항 100주년을 맞았다. 경주 동해안의 대표적인 어업 거점으로, 지금도 새벽이면 밤바다를 지나 돌아온 어선들이 하나둘 항구에 불을 밝힌다. 여행자가 잠든 시간, 감포항의 하루는 이미 시작된다.
감포항의 아침은 어선들의 엔진 소리로 밝아온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기나긴 밤을 건너 항구에 돌아온 어선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들이 육지로 옮겨진다. 감포의 이름난 생선은 참가자미지만, 요즘 감포 앞바다에서는 삼치와 방어가 눈에 띈다. 계절이 바뀌면 바다가 내어주는 생선도 달라지는 것이다. 상자마다 생선이 그득하게 담기고, 물을 뿌리고, 무게를 달고, 물건을 살피는 손길이 분주하다. 어선 너머 동쪽 하늘이 서서히 붉어지는 동안, 위판장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새벽 5시30분, 경매가 시작되면 상자에 담긴 생선을 살피던 사람들이 한곳으로 모여든다. 잠시 후 짧고 빠른 말들이 쏟아진다. 낮은 중얼거림 같기도 하고 리드미컬한 음악 같기도 한 말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마치 그들끼리만 통하는 암호 같다. 뭐지? 궁금해할 새도 없이 몇 번의 손짓과 눈빛이 오가더니, 순식간에 낙찰이 결정된다. 너무나 빠르고 초집중된 순간이라 마치 멈춘 것만 같던 시간은 경매가 끝난 후에야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새벽 5시 무렵 감포항 위판장에서는 밤새 잡아 올린 수산물의 경매가 시작된다. 생선 상자가 줄지어 놓이고 중도매인들은 어종과 크기, 상태를 살피며 거래에 나선다. 이곳에서 가격이 정해진 수산물은 시장과 식당을 거쳐 전국의 식탁으로 향한다. 경주 감포항에 위치한 경주시수협 감포위판장에서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경주 감포항에 위치한 경주시수협 감포위판장에서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경주 감포항에 위치한 경주시수협 감포위판장에서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손짓으로 입찰을 하는 모습.
낙찰된 물건은 다시 상자에 담겨 어디론가 옮겨진다. 조금 전까지 한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흩어진다. 밤새 바다에서 건져 올린 수확물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각자의 길로 떠나는 순간이다. 중도매인의 손을 거쳐 시장과 횟집으로 가기도 하고, 더 먼 지역으로 실려 나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밤새 바다에서 보낸 시간의 끝이고, 누군가에게는 이제 막 시작된 하루다.
◆바다가 키운 마을, 100년의 감포항
감포항이 공식적으로 문을 연 것은 1925년 1월16일이다. 일제강점기, 동해안의 작은 어촌이 근대적인 항구로 자리 잡기 시작한 때였다. 배가 드나들고 어획물이 모이면서 항구 주변에는 상점과 여관, 음식점이 들어섰다. 바다에서 벌어들인 돈이 마을로 흘러들었고,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거리도 커졌다. 감포는 그렇게 바다와 함께 성장한 마을이다.
개항 100년을 넘긴 오늘, 감포항에는 여전히 오래된 항구의 풍경이 남아 있다. 항구를 따라 어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바다를 등지고 들어선 건물들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다. 반듯하게 정비된 여느 관광지와는 사뭇 다르다. 어딘가 수십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한 거리는 오히려 오래돼서 다정한, 사람 사는 동네의 정취가 느껴진다.
감포시장 주변을 걸으면 그 느낌은 더욱 짙어진다. 다방이 있고, 미장원이 있고, 피아노 교습소도 있고 치킨집도 있다. 특별히 관광객을 위해 꾸며놓은 거리가 아니라 어느 동네에서나 볼 법한 가게들이다. 항구 주민들이 머리를 자르고, 차를 마시고, 저녁거리를 사러 다니는 생활의 공간이다.
감포공설시장에는 날짜 끝자리가 3일과 8일인 날 오일장이 선다. 장날이면 주변 마을에서 찾아온 사람들까지 어울려 물건을 사고파는데, 장날이 아니어도 생선과 해산물, 건어물을 내놓은 가게들로 시장은 활기차다. 가자미를 말려 내놓거나, 생물과 반건조 생선을 함께 파는 모습도 감포다운 풍경이다.
항구를 따라서는 횟집과 식당들이 줄지어 있다. '해녀가 직접 잡는다'는 간판부터 '다 퍼주고 또 잡자'는 현수막까지,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유머가 느껴지는 골목에는 오래된 식당들이 즐비하다. 항구가 가까운 만큼 다양한 동해의 먹거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감포의 매력이다. 싱싱한 회 한 접시를 앞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오래된 식당에서 가자미찌개나 생선구이로 한 끼를 먹는 즐거움도 놓치기 아깝다.
경주 감포항 방파제에 있는 감포항 조형물 포토존. 뒤에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형상화한 아름다운 등대가 보인다.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형상화한 감포항 내측 남방파제등대(앞)와 남방파제등대.
다시 바다를 향해 걷는다. 방파제 끝에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형상화한 등대가 서 있다. 신라의 문화유산을 품은 등대가 오늘의 어선들을 맞이한다. 천년고도의 역사와 백 년 항구의 시간이 바다 위에서 만나는 셈이다.
등대 너머로 동해가 펼쳐진다. 어선 한 척이 방파제를 돌아 항구 안으로 들어온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는 하얀 물결이 한동안 남는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배가 저 길을 오갔을까. 배의 모습도, 어업의 방식도 달라졌지만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여전히 감포항의 하루를 이루고 있다.
감포항 수협 활어직판장에는 열한 개 점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상인마다 생선을 구해오는 곳도, 취급하는 종류도 다르지만 손님들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생선가게나 다름없다. 수조를 둘러보며 원하는 생선을 직접 고르는 재미가 있다.
◆감포항 사람들,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법
항구 곁에는 또 하나의 수산물 시장이 있다. 감포항 수협 활어직판장이다. 감포항의 새벽 위판장이 어선이 잡아온 수산물과 그 물건을 기다리는 상인들이 만나는 곳이라면, 활어직판장은 여행자와 주민들이 직접 생선을 고르는 공간이다. 이곳 상인들은 감포항뿐 아니라 인근 위판장과 다른 산지에서도 좋은 물건을 구해온다. 같은 건물에 모여 있지만 점포마다 생선을 구해오는 곳도, 취급하는 종류도, 장사하는 방식도 다르다고 했다.
직판장은 2015년 문을 열었다. 여러 상인이 한데 모여 가게를 운영하고, 공동의 공간을 꾸려간다. 수조마다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이 담겨 있고, 손님들은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른다.
그중 유난히 분주한 한 점포에서 젊은 사장을 만났다. 올해 서른다섯 살. 스물넷에 수산물 장사를 시작했으니 벌써 10년 넘게 이 일을 해왔다고 했다. 그에게 장사가 잘되는 비결을 물었다. "제가 다 뛰니까요."
매일 아침 경매를 보러 가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움직인다. 다양하고 좋은 물건을 갖추기 위해 감포의 위판장뿐 아니라 포항은 물론 때로는 동해와 속초까지도 올라간다. 감포의 특산물인 참가자미는 어선과 직접 거래한다. 좋은 물건을 직접 고르고 유통 단계를 줄이기 위해서다. "더 좋은 물건을 더 싸게 파는 거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손님이 계속 찾아왔다. 질문에 답하던 사장은 손님과 눈이 마주치자 어느새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우리의 대화는 뚝뚝 끊겼다. 몸은 인터뷰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벌써 손님에게 가 있었다.
이 젊은 사장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직판장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장사를 이어가는 상인들이 있다. 오랜 경험으로 생선의 상태를 살피고, 산지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확보하고, 손님이 원하는 생선을 골라 손질한다. 한 공간에 모인 가게들이지만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생업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손님들 눈에는 이 여러 점포가 하나의 커다란 생선가게나 다름없다.
마음에 드는 생선을 고르면 상인이 그 자리에서 회를 떠준다. 상인이 회를 뜨는 동안 손님은 먼저 계단을 올라간다. 이곳 직판장 2층에는 직접 고른 생선을 바로 먹을 수 있는 식당, 일명 '초장집'들이 있다. 손님이 마음에 드는 생선을 고르고 올라가 자리를 잡으면, 손질한 회를 상차림과 함께 내어주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초장집 입구에서 종종 작은 소동이 벌어지곤 한다.
경주 감포항에 있는 수협 활어 직판장의 한 상인이 싱싱한 광어를 들어보이고 있다.
"어느 집에서 사셨어요?" 초장집 직원의 물음에 손님들은 잠시 머뭇거린다. 분명 아래층에서 생선을 골랐는데, 몇 호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수조 속 생선만 열심히 들여다봤지 가게 번호까지 살피지는 않았던 것이다. 초장집마다 연결된 판매점이 있는 모양인데, 처음 온 손님들은 헷갈리기 십상이다. 생선을 파는 상인에게는 여러 점포가 저마다 다른 가게지만, 손님에게는 그저 감포항 활어직판장이다.
작은 소동 끝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곧 회 한 접시가 식탁에 오른다. 곁들이 음식까지 차려진 상은 푸짐하다.
회 뜨는 솜씨에 따라 회맛이 달라지는 걸까, 아니면 감포항의 왁자한 분위기 덕분일까. 유난히 회가 쫀득하고 달다고 느끼는 순간, 창밖으로 펼쳐진 등대와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초장집 테라스로 나서면 바다는 한층 가까워진다. 마치 바다 위로 한 발짝 걸어 나온 듯한 기분이다. 이런 풍경을 앞에 두고 먹는 회 한 점이라니. 맛이 없을 도리가 있을까.
옆자리에 앉은 네 명의 일행은 한 달에 두 번쯤 이곳을 찾는 단골이라고 했다. 가까이 포항도 있지만 이곳 감포가 조용해서 좋고, 가격도 저렴한 데다 음식도 맛있다며 슬쩍 귀띔한다. 대게를 먹으러 올 때는 음력 보름 무렵을 기억하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그즈음이면 대게의 살이 꽉 차 더욱 맛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단골들의 경험담이지만, 감포항을 즐기는 데는 저마다의 요령이 있는 모양이다.
경주 감포항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
식탁 위에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먹거리가 놓이고, 식탁 너머에는 그 바다를 오가는 사람들의 하루가 펼쳐진다. 조금 전까지 분주하게 움직이던 항구가 이곳에서는 한 폭의 풍경이 된다.
새벽 위판장에서 생선을 내리던 사람들, 좋은 물건을 찾아 먼 길을 달리는 상인들, 그 바다의 맛을 잊지 못해 거듭 찾아오는 사람들. 감포항의 100년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의 하루가 쌓여 만들어진 시간이다. 어선 한 척이 방파제를 돌아 항구로 들어온다. 또 다른 배는 먼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오래된 항구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흐르고 있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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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 전문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