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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우의 영화 곁] 상처를 껴안은 채 걸어가는 일에 대하여

2026-10-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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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중 주인공 리와 조카 패트릭. <네이버 영화 포토 제공>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중 주인공 리와 조카 패트릭. <네이버 영화 포토 제공>

우리는 흔히 영화나 문학을 접할 때 거대한 상처를 깨끗이 씻어내거나 극적인 화해를 이뤄내는 순간을 기대하곤 한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삶의 찬란한 빛을 되찾는 서사는 일상의 고단함에 지친 이들에게 달콤한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어떤 슬픔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며,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히거나 극복되지 않는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는 바로 그 이겨낼 수 없는 슬픔을 품은 채, 오늘을 견디며 살아가는 한 남자의 정직하고도 쓸쓸한 뒷모습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보스턴의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의 일상은 건조하고 고막이 먹먹할 만큼 정적이다. 눈을 치우고, 막힌 변기를 뚫고, 주민들의 무례한 불평을 묵묵히 받아내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의 파고도 일어나지 않는다. 타인과의 소통을 스스로 끊어버린 채 마치 태엽 감긴 인형처럼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형 조(카일 챈들러)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소식이 찾아온다. 형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함께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을 돌보기 위해 수년 만에 고향 '맨체스터'로 돌아온 리는, 형의 유언장에서 자신이 조카의 후견인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접하며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바닷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고향 마을은 리에게 결코 휴식이나 위안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자신이 평생 도망치고 싶었던 비극의 진원지이자 통증의 기록고다. 과거 자신의 사소한 실수로 발생한 화재 때문에 사랑하는 세 아이를 화염 속에서 잃어야 했고, 그 참혹한 죄책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내 랜디(미셸 윌리엄스)와도 찢어지듯 이혼해야 했던 기억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까닭이다. 마을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은 여전히 그를 과거의 비극 속에 묶어두고 있으며,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푸른 바람은 그가 덮어두려 했던 상처의 틈새를 매섭게 파고든다.


영화는 이 비극적인 과거를 파격적인 신파나 신파조의 플래시백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정숙하고 차분한 카메라 시선으로 리의 현재와 과거를 무심하게 교차시키며, 그가 왜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삶으로부터 퇴장하려 했는지를 담담하게 적시한다. 여기에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비롯한 조용한 클래식 선율과 일상 소음의 정교한 배치는 리가 느끼는 아득한 고립감을 한층 더 정교하게 시각화한다. 영화 속 풍경과 소리들은 단순한 배경에 머물지 않고 한 인물의 무너진 내면을 가만히 대변하는 시적 장치로 기능한다.


형의 부재라는 또 다른 상실 앞에서 열여섯 살 조카 패트릭은 친구들과 밴드 연습을 하고 연애를 하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유지하려 애쓴다. 상처를 대하는 삼촌과 조카의 서로 다른 온도 차는 극에 미묘한 긴장과 온기를 동시에 부여한다. 리는 그 곁에서 서툴지만 형의 배를 정비하고 밥을 챙기며 보호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조카를 위해 고향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주변의 간곡한 권유 앞에서, 리는 끝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상처의 터전 위에 새로운 집을 짓는 일은 그에게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이겨낼 수 없는 슬픔을 품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작품이다. <네이버 영화 포토 제공>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이겨낼 수 없는 슬픔을 품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작품이다. <네이버 영화 포토 제공>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처 랜디와 재회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지닌 진정성이 가장 뜨겁게 폭발하는 대목이다. 아이를 낳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랜디는 과거 자신이 리에게 던졌던 가혹한 말과 책임 전가 행위를 오열하며 사과한다. 그 사과에는 위선도 거짓도 없다. 그가 그저 상처를 딛고 잘 살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러나 리는 차마 아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말을 더듬고, 이내 나지막이 고백한다. "내겐 아무것도 없어(There's nothing there)." 그의 마음은 이미 비극의 그날 모두 전소해 버렸기 때문이다. 복구하거나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영혼의 여백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리에게 상처를 극복하라는 상투적인 강요나 화해의 구원을 섣불리 얹지 않는다.


결국 리는 조카의 후견인 자리를 믿음직한 지인에게 위임하고, 다시 자신이 머물던 보스턴의 작고 건조한 방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과거와 완전히 동일한 도피이자 절망의 순환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보스턴으로 떠나며 조카 패트릭에게 언제든 찾아와 머물 수 있는 조그만 방이 하나 더 있는 아파트를 구하겠다고 말한다. 비록 트라우마를 완벽히 극복하고 고향에 뿌리내리는 장엄한 서사는 완성되지 않았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으로 향하는 최소한의 온기 어린 끈을 다시 잡은 것이다. 완전히 치유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작은 곁을 내어주는 일, 그것이 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영화인으로서 regional(지역) 공간과 인물의 관계를 바라볼 때,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주는 미덕은 더욱 깊게 다가온다. 공간은 때로 인물의 서사를 묵묵히 짊어지는 가장 큰 조연이 되기도 한다. 바로 맨체스터의 찬 바람이 부는 부둣가가 그러하다. 때론 말보다 더 짙은 영화적 풍경이 있는 셈이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때때로 마주치는 거대한 상실 앞에서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가벼운 위로에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곤 한다. 이 영화는 우리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슬픔도 분명 존재하며, 그 슬픔을 끌어안은 채로도 삶은 정직하게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 담담하고 단단한 시선이야말로, 긴 겨울의 길목에서 마음속 깊은 추위를 지나고 있을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깊고 따뜻한 영화 곁의 위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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