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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현의 사진 귀 기울이기] 들리지 않는 목소리(Unheard Voices)

2026-10-3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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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heard Voices-2 <신진호 작>

Unheard Voices-2 <신진호 작>

2025년 3월28일, 규모 7.7의 강진이 미얀마를 덮쳤다. 사가잉 단층에서 시작된 거대한 흔들림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삶의 터전을 앗아갔다. 무너진 건물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전 세계에 전해지면서 미얀마는 다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지진은 이미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지진 발생 이전부터 사가잉 지역에는 무력 충돌로 고향을 떠난 약 125만명의 국내실향민이 머물고 있었다.


미얀마에서는 오래전부터 소수민족과 군부 사이의 분쟁이 이어져 왔으며, 2021년에는 군부가 아웅산 수치가 이끌던 민간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면서 탄압과 폭력이 더욱 거세졌다. 세상이 다른 비극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그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미처 듣지 못했던 목소리에 오랫동안 귀를 기울여온 사진가가 있다.


사진가 신진호. 그는 오랫동안 미얀마를 오가며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해왔다. 이후 내전으로 삶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그 기록을 'Unheard Voices(들리지 않는 목소리들)'라는 이름으로 이어가고 있다. 전쟁과 폭력 속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사람의 얼굴과 시선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기억과 상처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신진호는 그들의 침묵을 대신 설명하거나 섣불리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말하지 못한 사연까지 사진가의 언어로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사진가이자 오랫동안 현장을 지켜온 구호활동가이기도 하다. 기존의 임의단체 '링킹더월드'에서 구호활동을 돕던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참여했고, 단체는 외교부 승인을 받은 사단법인 '타이니씨드(Tiny Seed)'로 새롭게 출발했다. 그는 해마다 네 차례씩 미얀마를 찾아 구호 활동을 이어왔다. 활동가들의 지원은 단순히 물품이나 후원금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가정에 돼지를 분양해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돕고, 그 과정에서 얻은 수익이 다시 다른 가정의 자립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한 가정의 변화가 또 다른 가정의 기회가 되는 방식이었다. 사진 작품을 통해 마련된 후원금 역시 현지 지원에 사용됐다.


그러나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활동은 어려워졌다. 해외 언론과 외부인의 활동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현장을 찾는 일도, 그곳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지인들과 쌓아온 신뢰는 활동을 이어가는 힘이 되었다. 때로는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진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호활동가이자 사진가라는 두 역할 사이에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 따른다. 도움이 절실한 사람 앞에서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진 한 장이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신진호에게는 언제나 사진보다 사람이 먼저였다. 그에게 사진가란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상대가 원할 때만 카메라를 들고,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은 굳이 묻지 않는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그들을 다시 찾아가 안부를 챙긴다. 사진가의 책임은 촬영이 끝난 뒤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학창시절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 아이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신진호의 시선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가 미얀마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 누군가는 말을 잃었으며, 또 누군가는 깊은 분노와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때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향한 기다림까지. 그들이 품고 있는 감정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삶을 살아보지 않은 우리가 감히 그 고통의 깊이를 짐작할 수나 있을까.


Unheard Voices-13 <신진호 작>

Unheard Voices-13 <신진호 작>

<#2>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을 품은 양곤주는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민주화 시위와 군부의 강경 진압이 이어졌던 곳이다. 거리에서 시작된 폭력은 어느새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까지 파고들었다. 월세 3만원짜리 비좁은 단칸방에 살고 있었던 여덟 식구,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가족은 그 작은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일구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남성들을 살해했다.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서 남겨진 가족들은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눈앞에서 아버지가 총살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막내딸은 그날 이후 말을 잃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Thank you." 사진가 신진호에게 건넨 말이었다. (양곤주, 2023)


<#13>


카렌주의 한 산속 마을. 서른세 살의 여성은 남편과 여덟 살 딸, 한 살배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군부에 저항하는 시민군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던 남편이 군의 드론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 곁에서 일을 돕던 여덟 살 딸도 함께 희생됐다. 군인들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강에 던졌고, 이를 목격한 마을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깊은 충격을 겪은 여성은 사람들을 만날 때면 웃으며 말했다. "남편과 딸은 돌아올 거예요." 그러나 한 살배기 아들과 단둘이 있을 때면 아무 말 없이 아이만 바라보았다. 신진호의 사진에는 그 고요한 순간이 담겨 있다. 넓고 텅 빈 방 한가운데 마주한 모자의 모습은, 전쟁이 한 가족에게 남긴 상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카렌주, 2023)


Unheard Voices-44 <신진호 작>

Unheard Voices-44 <신진호 작>

<#44>


양곤주의 한 여성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랫동안 연로한 아버지를 돌보며 살아왔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 곁을 지키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 소박한 삶마저 무너뜨렸다. 어느 날, 주민들이 떠난 밭에서 먹을 곡식을 구하던 그녀는 지뢰를 밟았고, 폭발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몇 주간의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는 더 이상 예전의 집도,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도 없었다.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사진 속 그녀는 맨발로 목발을 짚은 채 길 위를 걷고 있다. 전쟁은 그녀에게 다리뿐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온 삶의 자리마저 빼앗아갔다. 그럼에도 그녀 앞에는 여전히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양곤주, 2026)


<#28>


2024년 친주에서 만난 한 어머니는 폭격으로 열다섯 살 아들을 잃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들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사진 속 어머니 곁에서는 누군가 휴대전화를 들어 숨진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살아 있는 어머니의 얼굴과 휴대전화 속 죽은 아들의 모습이 한 장의 사진에 담겼다.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아들을 잃은 깊은 슬픔과 아무런 이유 없이 아들의 삶을 빼앗겼다는 억울함이었다. 처음에 사진가 신진호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깊은 상처를 입고 삶의 많은 것을 잃었음에도 고향에 남아 있는 이유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땅이 단순히 살아가는 장소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곳에는 가족과 함께한 시간과 기억, 쉽게 버릴 수 없는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신진호는 전쟁이 앗아간 것뿐 아니라, 그들이 끝내 지켜내고자 하는 삶의 자리에도 시선을 두었다. (친주, 2024)


Unheard Voices-28 <신진호 작>

Unheard Voices-28 <신진호 작>

신진호에게는 사진가 외에도 여러 이름이 있다. KIST에서 뇌과학을 연구한 과학자이자 신학을 공부한 신앙인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듯하지만, 그 여정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관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의 현상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운 신경과학, 사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좇아온 그는 미얀마의 'Unheard Voices' 외에도 인도의 카스트 제도 아래 오랫동안 차별받아 온 달리트 공동체를 기록하는 'Unbroken Roots', 뭄바이의 오래된 성매매 집결지 카마티푸라 여성들의 삶을 담은 'Unseen Chains'를 이어가고 있다. 그에게는 미얀마에서 만난 한 노인이 지어준 이름이 하나 더 있다. 텟미엣(Htet Myat), '밝은 자'라는 뜻이다. 세상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의 삶을 비추는 그의 사진처럼, 그들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기를 바란다. 어쩌면 사진이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듣지 못했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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