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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不遷位 기행 .16] 정재 류치명(1777~1861)

2011-02-08

'벼슬보다 학문'…퇴계학맥 이은 영남유림의 거목
글씨 : 土民 전진원

[不遷位 기행 .16] 정재 류치명(1777~1861)
정재가 만년에 강학 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만우정(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원래 안동시 임하면 사의동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외딴 곳인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보수했다. 경북의 다른 대부분 정자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벼슬보다는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정재(定齋) 류치명(1777~1861)은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대산 이상정 등의 학맥을 계승, 19세기 영남 이학(理學)을 발전시키고 꽃피우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영남 이학의 주석(主席)에 있었던 정재의 가르침을 받은 직계후손과 많은 제자들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 강점기 초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영남유림의 상소운동과 위정척사운동, 의병운동, 독립운동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사람의 일상생활이 학문 아닌 것이 없다고 보았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문인들이 유언을 듣고 싶다고 하자 "세상 일은 다만 평상(平常)이니, 평상 속에 저절로 묘처(妙處)가 있다"고 했다. 그의 제자들이 나라의 위기를 맞아 일신을 돌보지 않고 애국활동을 두드러지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재가 이처럼 인의(仁義)의 구체적 내용과 실천적 삶에 대한 산 교육을 했기 때문이었다.


욕심 없었지만 벼슬 맡으면 백성 위해 최선 다해

정재는 평생 욕심 없이 맑게 살았다. 29세(1805년)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과거를 본 것은 집안의 기대를 생각해 마지못해 따른 것이었다. 과거 급제 이후 77세 때 병조참판에 이르기까지 벼슬살이는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지만, 그는 출사하더라도 벼슬길에는 별 뜻이 없었다.

39세 때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으나 10여일만에 사퇴하고 돌아왔으며,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6세 때는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으나 하루만에 돌아왔고, 77세 때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병조참판 등의 벼슬이 잇따라 내려왔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정재의 뜻은 학문에 있었다.

그의 집안은 늘 곤궁했다. 흉년이 들면 부모의 끼니 근심이 따를 정도였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옳지 않은 길은 결코 가지 않았다. 집안 일가 중 이조(吏曹)에 근무하던 류정양(柳鼎養)이 그에게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벼슬자리를 주려고 했으나 거절했다. 그는 "내 일생 동안 빈한할지라도 요행을 희구(希求)하는 마음은 없다"고 말했다.

당시 흔히 내직이 아닌 외직을 나라에서 내릴 때는 적당히 살림을 장만하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정재는 모든 정성과 경륜을 다해 오로지 백성의 편에서 일을 했다. 그런 만큼 늘 생활은 궁핍했지만, 마음만은 가을하늘처럼 청명할 수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63세 때(1839년)부터 평안도 초산부사로 재임할 시절에 그곳 백성들로부터 '초산부모(楚山父母)''관서부자(關西夫子)'라 불리었다. 그리고 초산부사로 재직하던 65세 때 나라에서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했으나 사임하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오자, 초산의 백성들은 그의 선정을 기려,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산 사람을 제사지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재는 그 소문을 듣고 급히 사람을 보내 초상화를 철거하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백성들은 계속 제사를 지냈다.



어사 관속 벌 줄 정도로 옳은 일에는 거침없는 성품

집안이 곤궁하다보니 정재의 부인이 모시치마를 한 번 입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정재가 초산부사로 부임하게 되자 모시치마를 입어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으나 결국 입어보지 못하고, 죽고 나서야 입어볼 수 있었다. 전주류씨 수곡파 가문의 역사를 집안 부녀자들에게 교육할 목적으로 만든 '가세영언(家世零言)'에 그 사연이 나와있다.

'초산서 회가(回駕)하실 때 진지 지을 쌀이 없어서 아랫마을 망지네댁에 가서 쌀을 꾸어서 밥을 지었나니라. 부인께서는 평생에 모시치마를 입어보지 못하였다가 선생이 초산부사로 가시게 되자 말씀하시기를 사랑에서 지금 만금태수를 가시니 모시치마를 얻어입어 보겠다 하셨으나 불행히 돌아가시니 관 안에서 모시치마를 썼나니라.'

초산부사로 근무하던 시절이다. 어사 심승택(沈承澤)이 고을에 들어왔을 때 온 고을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지만, 정재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어사를 맞았다. 그런데 어사를 따라온 자들의 요구가 한이 없었다. 이에 정재는 그들에게 장형(杖刑)의 벌을 내렸다. 어사의 관속을 치는 일은 보통 용기가 아니고는 할 수 없었지만, 부당하다고 판단했을 때 정재는 거침없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행동에 대해 어사도 할 말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의 행동을 치하했다. 어사가 떠날 때 정재가 말했다. "어사가 행차할 때 고을 수령의 불법만을 살피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데리고 다니는 추종자들의 횡포도 방임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사는 이 말에 "사실 그렇다"며 솔직히 동의한 뒤, 돌아가면 바로 정재의 선정을 포상하도록 상달하겠다고 약속했다.

1855년에는 장헌세자의 추숭(追崇)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 일은 나라의 종통에 관한 일이기에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지만, 그는 영남사림을 대표해 과감하게 직언을 했다. 이 상소로 인해 삼사의 탄핵과 노론의 공박을 받고, 결국 정재는 전라도 지도(智島)로 유배된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정재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84세에도 주자학 강론…명단에 올린 제자만 600여명

안동 소호리 외가(한산이씨 가문)에서 13개월을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태어난 정재는 친가와 외가 양가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대산(大山) 이상정(1710~81)은 외증손인 정재가 태어나자 정재의 증조부 류통원에게 편지를 보내, '외손의 골상이 범상치 않다'고 하례하면서 이름을 '치명(致明)'이라 지어 주었다.

정재는 5세 때 종증조부인 동암(東巖) 류장원(1724~96)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20세가 되어 학문의 깊이를 더해갈 무렵, 가학의 전수자이자 대산의 학문을 이어받은 동암이 별세한다. 정재는 동암의 학문을 모두 전수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다. 21세 때 정재는 부친의 편지를 받들고 상주에 거주하던 손재(損齋) 남한조(1744~1809)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다.

이 때 그는 학문의 요결을 물었는데 손재는 "안을 곧게 하고 사욕을 이겨, 시비 이해의 생각이 어둡고 어두운 속에 소리없이 가라앉아 사라지게 하라"고 당부했다. 정재는 이를 절실하게 받아들였고, '마음을 곧게 하고 사사로움을 이기는 것(直內勝私)'은 이후 정재의 삶의 철학이 되었다. 이후 입재(立齋) 정종로(1738~1816) 문하에도 드나들며 강론에 참여하기도 했다. 33세 때 손재도 작고한다.

24세 때 퇴계의 주자서절요를 읽으면서 그 핵심구절을 뽑아 주제별로 재분류한 '주서휘요(朱書彙要)'를 편집한 이후, 정재의 저술과 편찬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50대 이후에 대부분 완성된 저술들을 보면 학문의 지향점은 경학과 성리학, 예학에 집중돼 있다. 그는 또한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학문태도를 견지한 것으로 파악된다.

전라도 유배에서 풀려난 뒤인 80세(1856년) 이후에는 비교적 한가한 만년을 보낸다. 정재의 학덕을 기려 문인과 자제들이 집 근처에 건립한 만우정(晩愚亭)에서 정재는 독서와 강학에 전념했다. 만우정에서는 학문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84세 때는 문하생들과 주자의 '인설(仁說)'을 강론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주위에 편지를 보내 강학이 계속될 수 있도록 당부했다.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는지 알게 하는 일이다.

만우정은 그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그의 문인들이 모여서 학문하는 공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별세하자 900여명의 유림을 모여들어 애도했고, 그의 제자는 급문록(及門錄: 제자 명단)에 기록된 문인만 600여명에 이른다.


음력 10월6일 제사…지방으로 신주 대신

祭酒는 종부가 代 이어 담그는 송화주로

■'정재 불천위'이야기

정재 불천위는 1963년에 결정됐다. 정재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가세영언을 보면 '선생은 그후 계묘년 9월25일 본가 길사(吉祀: 종손이 부친 3년상을 마치고 정식 종손이 되는 의식) 시 도유(道儒) 향유(鄕儒) 문친(門親) 600여명이 모인 도회석상에서 불천위로 결정하여 봉사하게 되었나니라'고 적고 있다.

정재 6세 종손인 류성호씨(1949년생)가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류씨는 길사 당시 타성만 1천여명이 참석했고, 그 때 유림이 정재를 불천위로 모셨다고 들려주었다.

임하댐 주변 산 비탈에 외따로 있는 현재 정재종택(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은 임동면 수곡2동에 있던 것을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87년에 옮겨온 것이다. 정재의 고조부인 양파(陽坡) 류관현(1692~1764)이 1735년(영조 11)에 건립한 집으로 대문채와 정침, 행랑채, 사당 등으로 이뤄져 있다. 종택 옆에 정재가 학문을 하던 만우정이 있으며, 이 건물도 댐 건설로 1988년에 이건해 보수한 것이다.

정재 불천위 제사(기일은 음력 10월6일)는 두 부인(김씨와 신씨)의 신주를 함께 모시는 합설로 지내며, 아헌은 종부가 올린다.

제사는 초저녁(8시)에 안동시내 종손의 거처인 아파트에서 지낸다. 종택 안채 대청에서 지냈으나, 이러저런 사정으로 지금은 안동 아파트에서 신주를 모시지 않고 지방으로 대신해 제사를 지내고 있는 상황이다. 전통을 지키기 어려운 종가 불천위제사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제주는 종부가 대를 이어 담그는 송화주를 쓴다. 국화와 솔잎을 사용하는데 손이 많이 간다. 1차 발효 후 이를 밑술로 해 2차로 고두밥을 섞어 다시 발효시키며, 국화 대신 금은화(인동초)를 사용하기도 한다. 송화주는 경북도 무형문화재 20호로 지정돼 있다. 김봉규기자

[不遷位 기행 .16] 정재 류치명(1777~1861)
정재의 불천위를 결정한 유림회의 당시(1963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정재 6세 종손 류성호씨. 류씨가 정재 불천위 제사를 처음부터 지내고 있다.
[不遷位 기행 .16] 정재 류치명(1777~1861)
정재종가 사당. 불천위 신주와 4대조 신주가 모셔져 있다.
[不遷位 기행 .16] 정재 류치명(1777~1861)
정재 불천위 신주 감실과 신주(정재와 두 부인 신주). 신주 뚜껑 색깔은 고자비홍(考紫紅)이라는 원칙이 있다고 하나, 종가별로 그 색깔이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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