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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로에서 드물게 정원에 머물고 있는 추색을 즐기며 한정식을 즐길 수 있는 남일동 ‘약전’ 의 정원과 기와집. |
◆ 마당 깊은 집의 밥상이 생각나면…‘약전식당’
묘한 매력의 중구 남일동 약전식당.
동성로 한복판에서 만난 가장 가을스러운 식당이다. 식도락가들에겐 ‘회정식’ 잘하는 데로 유명. 이 집 밥상에 앉으면 왜 가을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인지 안다. 얼떨결에 만나게 되는 ‘흙장난하는 아이 손가락’ 같은 마당. 압권이다.
70여년 묵은 ㄷ자 기와집.
북쪽에 정필수소아과, 서쪽에 화교학교, 동쪽에는 지금은 문닫은 중앙시네마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 언저리는 ‘서(달성서씨)부자 동네’, 이젠 진골목이 옆을 지나고 있다. 한때는 등나무식당이 있었다.
입구로 들어섰다.
40년은 넘었음직한 등나무와 장독대에 조성된 솟대 10개가 골목 안을 굽어보고 있다. 김원일의 장편소설 ‘마당깊은집’이 연상됐다.
반세기 전에 유행한 이빨만한 자잘한 타일, 그리고 툇마루도 인기. 무엇보다 서민톤의 온갖 야생화와 수목이 손님을 마중하는데 지난 추석 전후 추색(秋色)이 완연해지기 시작했다.
석류잎은 거의 물들었다. 이밖에 황매, 치자, 일본나팔꽃, 백일홍, 국화, 남천, 단풍나무, 수국, 앵두, 원추리, 붓꽃, 채송화, 차소엽, 백합, 쪽두리꽃, 시계꽃, 제비꽃, 수선화, 그리고 마당 한복판에는 배추가 심겨져 있다. 남천은 석양보다 더 붉은 자태를 빛내고 나팔꽃도 누렇게 추락 중이다.
종로에서 40년간 간판없는 횟집을 경영했던 엄마(전분기)로부터 요리를 배워 20년전 식당가로 나온 이집 여주인 백설희씨.
꼭 원불교의 정녀 같은 분위기, 한말 신여성 같은 자태여서 음식보다 그녀의 곰삭은 표정과 말투가 더욱 화제만발.
오후 3시50분.
마당이 어둑어둑. 바람이 차다. 누가 우는 것 같다. 백씨가 툇마루에 앉아 4일째 말리고 있는 토란대를 돌보고 있다. 말린 고추, 가지, 무, 호박 등이 벽에 걸려있다. 겨울채비용이다.
“여름에는 각종 새들이 많이 찾아 조잘조잘댔는데 추석이 지나자 별로 들리지 않는군요. 마당 안으로 그늘이 드리워지면 그제서야 구석에 있던 귀뚜라미가 수은빛 울음을 집 곳곳에 향수처럼 뿌려대죠. 도심에서는 참으로 호사죠.”
백씨는 요즘 잭 케루악의 소설 ‘길위에서’를 읽고 있다. 약전골목 입구에서 9년, 종로1가에서 10년, 지난해 1월 여기로 세들어 왔는데 여기 오고서야 비로소 세월이 뭔가를 좀 알겠단다.
“처음 오신 분들은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팔공산으로 가야 가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성로에서도 가을을 즐길 수 있어 이 마당이 더 귀해보인다고 하대요. 모두 가을을 타는 모양이에요.”
‘약전도서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각종 도서 1천여권이 각 방에 분산 배치돼 있다.
점심 시간이 좀 넉넉한 이들은 툇마루에서 맘에 드는 책을 끄집어내 읽는다. 최명희의 ‘혼불’은 물론 특히 백씨가 좋아하는 성석제의 소설, 각종 인문철학서 등 질감이 두터운 서적이 사이좋게 앉아 있다. 이강소의 오리 그림은 물론 배병우의 흑백사진, 서각, 서화류 등도 눈에 들어 온다.
한때 대구향교에서 사서삼경도 훑었던 그녀, 가끔 죽이 맞는 단골이 오면 백거이의 ‘비파행’과 소동파의 ‘적벽부’의 한 구절을 주고받으며 가을을 호령한다.
밥맛?
전남 신안군에 내려가 직접 사와 3년 이상 간수 뺀 소금이 20포대가 있다. 더 이상 맛을 논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053)252-9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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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방천시장 김광석 벽화길 중간에 있는 홍대버전의 카페 ‘가을’(위)과 7080음악을 싱어롱하면서 추억사냥을 할 수 있는 보리밥뷔페 겸 주막같은 김광석 카페. |
◆ 그가 그립다면…‘김광석 주막’과 카페 ‘가을’
가을이면 더욱 그리운 대구 출신의 가인, 김광석.
죽었지만 지금 수성교 옆 방천시장에 김광석 벽화길로 살아 있다. 200여m 골목이 기타 6번줄처럼 누워 있다. 여름에 들렀을 때는 별다른 운치가 없었지만 가을이 되니 엄청난 울림을 준다.
오후 6시, 목화 같이 탐스러운 가로등불이 하나둘 켜진다. 때맞춰 스피커를 통해 나온 ‘거리에서’가 낙엽처럼 굴러다닌다. 골목 동쪽벽 위는 대백프라자 인근 송죽미용실 근처에서 시작되는 방천길 가로수길이 있다. 벽화길 중간에 외로운 벤치 하나와 모자이크 처리된 콘크리트 소파가 놓여 있다.
거기에 앉으면 두부모만한 정체불명의 카페 하나가 윙크를 한다. 카페 이름은 가을(Autumn). 갤러리 겸 카페이다. 그곳 플라타너스 터널도 너무 호젓해 찾는 이들이 많다.
통유리창을 통해 통기타를 치고 있는 대학생이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홍대풍의 여주인이 빙그레 웃는다. 이름은 없고 그냥 ‘미스 가을’로 불러달란다.
지난 3월까지는 무인 갤러리였다. 그런데 영화광이면서 동성로 동성아트홀 회원이기도 한 그녀가 카페로 차고 앉았다. 단편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벌여 내년 1월에 자신이 간여한 작품 세 개를 축약해 동영상으로 전시할 모양이다.
시나리오 작가에 시각디자이너 감각까지 겸비한 미스 가을이 기자에게 이색 제안을 한다. 쪽지를 적어 유리병 안에 넣어주면 현재 작품을 상설전시중인 페이프 주얼리 작가인 현영진씨에게 전해줄 거란다.
현씨는 독특한 취향의 미술가다. 결혼 때 패물을 포기한 게 못내 아쉬워 그걸 스스로 위안하기 위해 A4 용지를 오리고 붙여 목걸이, 반지 등을 만들어 전시한 것. 테이블도 딱 3개밖에 없다. 3천원짜리 에스프레소 한 잔을 먹으며 밖을 내다본다.
김광석 마니아들이 벽화길을 걸으면서 룰루랄라 버전의 자태를 뽐낸다. 그림엽서 같은 낙엽이 거리에 이슬비처럼 내린다. ‘김광석은 가을’이라고 생각했다.
벽화길 북쪽으로 조금 걷다가 왼쪽으로 꺾어진다. 갑자기 불야성을 이룬 가건물 형식의 포장마차가 눈에 띈다. 1년새 방천시장에서 가장 유명해진 곳이다.
김광석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효 운동가’인 권팔진씨가 차린 김광석 벽화길 보리밥 주막이다. 열차처럼 생겼다. 보리밥 먹고 막걸리 먹고 김광석 노래를 싱어롱할 수 있는 ‘복합문화주막촌’ 같다. 지역 미술가들이 재능기부 차원에서 주막의 창에 김광석 캐리커처를 그려주었다.
이 주막이 생기기 전 방천시장의 밤은 아주 휑뎅그렁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주말이면 ‘묻지마 김광석파’들이 여기서 카니발을 벌인다. 일반 노래는 들려주지 않는다. 종일 김광석 노래만 흘러나온다. 한쪽 벽을 장식한 의미심장한 낙서를 감상 해본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김광석의 노래 28곡과 메뉴를 연결시킨 것. 3천500원짜리 보리밥은 ‘일어나’. 3천원짜리 라면은 ‘이등병의 편지’를 매칭시켰다.
금·토요일 밤에는 김광석 라이브 무대가 자발적으로 형성된다. 이를 위해 주인이 통기타를 비치해놓았다. 단골이 직접 통기타를 갖고와 김광석의 대표곡을 싱어롱하기도 한다. 가을이 본격화되자 이런 분위기를 일부러 즐기기 위한 마니아의 발걸음이 부쩍 늘어나 공간을 더 넓혀야 될 지경이다.
여기에 오면 그 시절 푸세식 화장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주막 맞은편 채 1m도 안되는 좁은 회랑을 지나면 만날 수 있다.
차가워지는 신천의 바람이지만 불콰해진 김광석 노래 때문인지 가로등 불빛은 행인의 심장을 더 설레게 한다. (053)253-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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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첫 야생화 갤러리인 대구시 수성구 중동 ‘아소’ 전경. |
◆커피향과 꽃향의 앙상블…야생화 갤러리 ‘아소’
참 ‘생뚱맞은’ 82㎡(25평)짜리 갤러리다.
수성구 중동 리더스빌딩 근처 주택가에 패랭이꽃처럼 앉은 ‘아소’. 전국 첫 야생화 갤러리다. 삭막한 주택가에 앙증맞은 무릉도원이 소담스럽게 누워있다. 대구에도 요런 시크한 갤러리가 있단 말이지?
여기 전시품은 그림이 아니고 야생화다. 사철 다 좋지만 가을이 본색에 가까운 것 같다. 눈보다 가슴이 더 호사를 누린다. 성찰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둘이 오는 것보다 혼자 오는 게 더 낫다. 삶이 재밌는 이는 굳이 여기로 오지 않아도 된다. ‘가을나그네’의 심정이라면 당장 여기로 뛰어가라.
인터폰을 눌렀다.
그 소리에도 풀향이 감돈다. 마당에 물을 주던 조덕순 관장이 반색하며 문을 열어준다. 그녀의 백발이 억새꽃 같다. 야생화 전도사인 조 관장의 가을 표정이 더욱 야생화톤으로 칠해진다.
마당에 앉아 햇살 향해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야생초의 얼굴에 ‘추색(秋色)’이 완연하다. 한라구절초와 쑥부쟁이, 모과 이파리가 기자에게 상큼한 표정으로 인사를 한다. 문 앞에 초등학생용 나무 의자 한 쌍이 갓 주황색으로 변한 야생화를 지켜본다.
이 집의 가을은 이미 지난달 중순부터 찾아왔다. 야생화이기 때문이다. 관목류는 11월초가 되어야 낙엽톤으로 쓰려진다.
야생화는 초봄부터 겨울까지 자기 자리를 지킨다. 최소한 네번 여길 와야 아소가 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봄에는 히어리와 진달래·강원도 모데미풀, 여름에는 해오라비·난초·파래란·도라지, 겨울에는 호자나무·애기자금우·작살나무열매가 열창을 한다.
250여종의 야생화와 숱한 난초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그런데 한꺼번에 많은 걸 보여주지 않는다. 1~2점 쪼끔만 엄선한다. 신문을 볼펜과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작업을 하는 작가인 최병소도 딱 한 점만 전시했다. 그녀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절정의 아름다움을 가진 야생화를 수십점 수북하게 내놓으면 꽃의 진정한 가치를 모릅니다. 그 미학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강약을 조율해야 됩니다. 주연배우급 야생화 한 점을 내고 그 옆에 서너점 볼품없는 걸 조연급으로 내야 구색이 딱 맞아요.”
차보다는 커피가 더 어울린다.
풍지초·물매화·티포치나·황칠나무·세잎분홍꽃·개여귀·이스라지가 갤러리 곳곳을 지키고 있다. 옥상으로 올라가봤다. 각종 띠 종류가 초가지붕처럼 굴러다니고 있다. 자줏빛 물방울 스와로브스키 반지톤의 개여귀가 융단처럼 깔려 있다. 이놈들 고향은 제주도 김영갑 갤러리다.
“여긴 한번만 와선 감이 안잡힐 겁니다. 야생화의 사계를 실시간으로 감상하면 야생화의 진면목을 알 수 있죠.”
5천원을 내고 원두커피 한 잔을 품는다. 차분해진 일상, 커피향과 야생화 향기가 탱고를 춘다. 비록 콘크리트 갤러리지만 고혹한 야생화 때문에 더욱 몰랑해 보인다.
가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면 야생화들도 동면(冬眠)에 든다.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는 휴관. 오뉴월(7~8월)에도 초강력 햇살 때문에 쉰다.
이 집을 설계한 이헌재씨는 울적한 기분이 들면 한없이 심플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진 노출 콘크리트조 스타일인 갤러리 홀에 앉아 하늘 담은 한 평 남짓한 수조에 놓여진 소품을 바라본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는 달항아리가 앉아 있었다.
수조 바로 위 천장은 텅 비어 있다. 그 속으로 작둣날처럼 파란 가을이 하강 중. 물에 반영된 가을, 애잔타. 3일까지 문경대 도예과 유태근 교수의 작품이 전시된다. (053)763-4480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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