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발랄役 이젠 질려…얼굴에 피칠갑도 하는 '새로운 나'를 만나고 싶다
‘미나 문방구’는 최강희에게 힐링의 시간이었다. 연기적으로는 자신의 의지와 변화를 반영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개인적으로는 살아 생전 소원했던 아빠와 마침내 화해했다. 그녀에게 이 영화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었던 이유다. 그래서일까. “다른 여배우를 생각할 수 없었다”는 정익환 감독의 말처럼 최강희는 철저하게 미나가 됐다.
미나는 아버지(주진모)가 쓰러진 뒤 억지로 떠맡게 된 문방구를 한시라도 빨리 처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까칠하고 다혈질이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뜻한 캐릭터. 최강희는 미나를 통해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를 잊어버린 채 일과 사랑 앞에서 고민하는 20~30대 여성을 투영한다. 이를 위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수식어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문방구 사장으로 유쾌한 변신을 감행했다. 19년간 다져 온 풍부한 연기경험과 모두가 부러워할 천부적인 감수성이 동시에 발동됐음은 물론이다.
스타의 화려함보다 친근한 이웃집 누이나 여동생에 더 가까운 ‘최강희 표’ 매력은 이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아우라’가 됐다. 하긴 매 작품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사랑에 웃고 울며 삶을 이어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녀만큼 현실적이면서도 사랑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도 드물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썽꾸러기 초딩들과 그녀의 동창생인 초등학교 선생 강호(봉태규)가 상대역이란다. 그 모습 또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미나 문방구’가 대작들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런 부분이 좀 아쉽긴 한데 애초에 이 작품을 선택할 때 그 점(흥행)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왕대박 느낌이 드는 시나리오도 들어왔지만 그런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선지 몰라도 나는 오히려 소박한 느낌의 이 영화가 좋았다. 무엇보다 공감을 많이 했다. 나의 유년시절이나 추억을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과거와 화해한 느낌이 나서 특히 좋았다.”
-전체관람가답게 영화가 굉장히 착하고 따뜻하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볼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관객들이 처음부터 기대를 안 하고 오셨으면 좋겠다. 그냥 TV드라마 보듯이 편하게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대본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응원하는 느낌을 받았다. 관객들도 그런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 감독님에게 이 영화의 기획의도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요즘 여성들의 얼굴에서 화가 너무 많이 보인다는 거다. 그래서 그들을 치유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하더라. 나도 비슷한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마주했다.”
-촬영 무대가 경주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일 텐데 어땠나.
“서울에서는 미처 못 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 이를테면 빛과 별, 하늘을 실컷 보고 왔다. 촬영 전 내가 들어갈 화면 위치를 모니터로 보면 ‘정말 예쁘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럴 때마다 그 안에 나 자신이 있는 게 행복했다. 그래서 얼마 전 경주에 다시 다녀왔다. 영화 촬영 때 자주 가던 카페도 가고, 책도 보면서 나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돌아왔다. 정말로 행복했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추억이 있었나.
“그냥 한두 장면만이 떠오르더라. 초등학생 때 우윳값 낼 돈을 방방(트램플린) 타는 데 다 써버려서 엄마한테 죽도록 혼난 적이 있다. 원래는 200원만 쓰고 다음 날 엄마에게 돈을 받아서 채워 넣으려고 했는데 타다 보니 너무 재미있었던 거다. 결국 월세 보증금 다 쓰듯이 호주머니에 있던 돈 2천원을 죄다 썼다. 정신줄을 놔버린 거다. 하지만 당시 느꼈던 해방감은 최고였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돈은 다 썼지만, 그야말로 완벽한 자유를 느꼈다.”
-극 중 아버지와는 소원한 관계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어땠나.
“아빠는 내가 스물두 살 때쯤 돌아가셨다. 사실 아빠와의 관계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대화도 거의 안 했고 고작 밥상에서 마주하는 정도로, 엄마와는 짜증을 내고 싸우기도 하지만 아빠와는 거의 단절 수준이었다. 그 부분에서 관객들이 많이 공감을 한 것 같다. 특히 남자들은 운동회 장면이나 아버지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많이 뭉클해하더라. 그래서 내가 치유와 화해가 됐다고 말한 건 그런 이유다. 나 역시 이 영화를 통해서 아빠와 화해했다.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아빠와 대화를 나눈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밝고 명랑하고 씩씩한 데뷔 당시의 이미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 모습을 대중이 사랑한다는 얘기일 수 있지만 본인은 갑갑할 수도 있겠다.
“맞다. 솔직히 갑갑하다. 내가 그렇게 밝거나 명랑한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 연기를 하면서 명랑해졌고 밝은 역할을 맡으면서 건강해졌다. 비슷한 이미지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내가 모르고 있던 모습들을 감독님들이 잘 캐치해서 사용해 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살인을 다루지만 용서할 수 있고, 엄마에게 대들지만 공감할 수 있고, 또 4차원이지만 ‘쟤라면 그럴 수 있어’라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이미지 변신을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미나 문방구’까지 끝냈으니 이제 일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나를 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영화 '미나 문방구'의 스틸컷. |
-구체적으로 계획한 게 있나.
“거창한 건 아니고 일단 최근 벽 하나를 ‘드림월’로 만들기 위해 공사를 마쳤다. 거기에다 내 꿈을 마음껏 채워넣을 생각이다. 외국에서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아이들에게 ‘드림월’을 만들어준다고 한다. 꿈을 가까이 놓고 구체화시키면 좋다는 게 그 이유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영화 팸플릿과 사진 등을 붙여 놓고 감상하면서 진정 원하는 게 뭔지 생각도 좀 해보려고 한다.”
-실제 성격은 어떤가. 극 중에서 보이던 모습과 다를 것도 같은데.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게, 난 대중이 원하고 판단하는 대로 봐주는 게 너무 좋다. 우리는 소모되는 직업이다. 그래서 나의 실제 성격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물어보면 그냥 아주 서정적인 사람이라고만 얘기한다.(웃음) 귀엽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눈도 크고 동그랗게 만드는데 그런 것도 자주 해보지 않으면 나중에 표현하려고 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불씨가 남아 있을 때 다 사용하고 그 다음 단계를 밟는 게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자기관리에도 철저할 것 같다.
“항상 노력한다. 그 중심에 늘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선지 내가 철없고 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허용해주는 것 같다. 그런 것도 철저한 자기관리의 결과라 생각한다.”
-이번 작품은 아이들이 상대역이다. 어땠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나온 드라마 ‘단팥빵’(2004)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그 때는 고학년들이었고 지금은 저학년이다. 무지 다르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혼이 빠진다는 말을 실감했다.(웃음) 애 키우는 엄마들과 유치원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마저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이들이 보고 싶다. 끝나고 보니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게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느꼈다.”
촬영무대가 경주…별·하늘 실컷 봤다
그 행복감 못잊어 얼마전 다시 방문
내가 스물 두 살 때 아빠 돌아가셨다
사이 안 좋았는데 이 영화 찍으며 화해
원래 그렇게 밝거나 명랑한 성격 아니다
밝은 역할 맡으면서 명랑해진 것 같아
동료배우 중 오정세와는 소울메이트
만나면 카페서 4∼5시간씩 책만 봐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마지막 운동회신 찍을 때 매우 희한한 기분을 느꼈다. 극 중에 소영이가 뛰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와 오버랩되더라. 또 내가 과거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서 나를 응원하는 상황이 펼쳐지는데, 그 모습이 앞으로의 나를 응원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20~30대 직장여성들은 자기를 대변할 수 있는 모델이자 이상형으로 당신을 생각한다. 그런 것에 책임감을 느끼나.
“물론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들을 대변할 수 있다면 일부러라도 다 해보고 싶다. 과거와의 화해라든지 대리만족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주고 싶다. 그래서 웬만하면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캐릭터를 많이 했다. ‘달콤, 살벌한 연인’ 같은 경우는 현실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대신 쾌감을 선사했다. 그런 것들을 주고 싶었다. 그게 대중의 사랑을 받고 사는 배우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당신 연기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연기 준비를 따로 하지는 않는 대신 하루 종일 극 중 캐릭터를 생각한다. 이번에도 촬영 내내 미나가 돼서 살았다. 그래서 친구들이 촬영 때 나를 만나면 껍데기 같다고 말한다. 내가 없는 것 같다는 거다. 대중이 느끼기에 항상 최강희스럽게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줄곧 나를 비우는 작업을 아주 열심히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극 중 인물이 되어 있다. 그런데 끝나면 그제서야 알게 된다. 그런 순간들이 연기자로서 가장 행복하다. 물론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이 많은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연기자라는 직업이 당신과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솔직히 이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웃음)
-데뷔 이후 매회 빠짐없이 꾸준한 작품활동을 해 왔다. 여배우의 부침이 유독 심한 한국영화계에서 말이다.
“그래서 행복하다. 그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진짜 뒤처지지도, 앞서지도 않고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앞으로도 꾸준히 내 갈 길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영화가 의미 있는 건 나도 내 모습에 질리고 있는 시점에 만난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제 기존의 내 모습에서 해방되고 싶다. 새로운 나를 만난다는 건 나 스스로에게도 전환점이 될 것 같고 신나고 설레는 일인 것 같다. 나한테 또 다른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 당신의 생각에 부합되는 역할이 있다면.
“일단 나의 다른 면을 보실 수 있는 감독님을 만나고 싶다.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변신시켜 달라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까지는 나도 어쩔 수 없었던 게 들어오는 역할들이 엉뚱하고 발랄한 기존의 모습들이었다. 그러니 나부터 싫증이 날 만했다. 그래서 지금의 이미지에 질린 감독님이 날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거다.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신 분이 예전에 있었는데 이젠 그런 감독님과 작업을 해보고 싶다.”
-그런 갑작스러운 변신을 대중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을 듯한데.
“안 좋은 예를 많이 봤기 때문에 나도 몸을 사리는 건 있다. 어떤 선배가 그랬다. 대중은 자기가 좋아했던 연기자가 바로 그렇게 변하는 건 원치 않는다고. 하지만 난 너무 오랫동안 대중이 원하는 시점까지 기다려준 것 같다. 그동안 미세한 변화를 나름대로 꾀해 왔고, ‘애자’는 그런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내가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을 그저 그런 배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타이타닉’에서 그녀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녀가 ‘이터널 션사인’으로 4차원 연기를 시도했을 때만 해도 솔직히 걱정했다. 그런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확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내가 그녀를 과소평가한 게 미안해지더라. 저 여자는 저것밖에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지금껏 보여준 것보다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진짜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재개봉한 ‘타이타닉’을 보면서 그녀를 좋아하게 됐고, 그 작품 역시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자기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는데 그걸 몰라준 거다. 그녀를 보면서 희망을 발견했다.”
-친한 동료배우가 있다면.
“오정세와 류현경이다. 현경이와 만나면 수다 떨고, 정세와 만나면 카페에 앉아 각자 책을 본다. 그래서 진상손님이다. 4~5시간씩 책만 보니까. 정세는 ‘쩨쩨한 로맨스’때 처음 만났는데 첫 만남부터 끌렸고 바로 친해졌다. 그래서 그를 보고 내가 ‘소울메이트’라고 그랬다. 정세는 나를 만나면 교회 가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종교활동을 왜 하나 생각했는데 ‘이래서였구나’라는 것을 비로소 느꼈다고 그러더라. 만나면 정말 조용히 공부하거나 사색의 시간을 갖고 저녁엔 집 앞에서 맥주 한잔 하고 헤어진다.”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무엇을 하며 지내나.
“그때가 가장 바쁘다. 정말 너무 바쁘다. 그냥 이 음악 저 음악 듣다가 책도 읽고 책상 정리도 하고 고양이와 고슴도치 밥도 준다. 어떨 때는 빔프로젝트를 밖에 설치해 영화를 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금세 새벽 두세 시가 된다. 그래선지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그러더라.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웃음)
-스스로 독특하다고 느낀 적은 없나.
“특별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나는 왜 이렇게 바쁘지?’ ‘집에서는 느긋하게 있어도 되는데…’라는 생각은 해본다.”
-당신에게 연기란 무엇인가.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었고 꿈을 주었고 나를 밝아지게 했지만 너무 힘든 것. 너무 힘들어서 진짜 관둘 생각도 했다. (연기를) 못한다는 생각이 연기할 때마다 든다. 외로워서 운 적도 많다. ‘미나 문방구’를 하면서도 숙소에서 혼자 많이 울었다. 힘들었다. 남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게 너무 힘들다. 그래서 ‘난 부족하다, 부족하다’라고 늘 가슴속 깊이 되뇌고 생각해 왔다. 역설적으로 그런 점이 나를 지금껏 있게 만든 것 같다. ”
-아직도 자신의 연기에 부족함을 느끼나.
“아직도 그렇다. 난 (연기) 기술이 거의 없다. 남들은 몇 테이크 만에 원하는 연기를 뽑아내는데, 난 몇 개밖에 없으니 그때부터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연기가 기술은 아니지만 훌륭하게 잘하시는 분들을 볼 때마다 부럽다.”
-배우로서 꿈이 있다면.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될까요’에 이런 카피가 쓰여 있다. ‘감독·배우의 재능과 사랑에 빠지다’라고. 나도 늘 관객들과 사랑에 빠지고 싶다. 그게 내 최종 목표이자 꿈이다.”
글·사진=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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