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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6] “그래, 젊은 나이에 국전심사 초대작가된 게 바로 나다” - 율산 리홍재 편

2013-11-01

99년 타묵퍼포먼스…길이25m 종이에 여덟字 쓴 후 ‘미학적 자살’ 계획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6] “그래, 젊은 나이에 국전심사 초대작가된 게 바로 나다”  - 율산 리홍재 편
율산 리홍재는 마치 조선말 기인 화가였던 오원 장승업처럼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경계를 허물며 글씨와 그림을 혼용시킨 기굴방장(奇堀奔放)한 서체를 개척하는 동시에 초대형 붓으로 한판 노는 타묵퍼포먼스의 신지평도 열었다.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6] “그래, 젊은 나이에 국전심사 초대작가된 게 바로 나다”  - 율산 리홍재 편
항상 한 곳에 머물지 못한 율산이 수묵화 같은 ‘운해무산도’ 병풍을 배경으로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6] “그래, 젊은 나이에 국전심사 초대작가된 게 바로 나다”  - 율산 리홍재 편
율산을 찾은 내방객의 명함.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6] “그래, 젊은 나이에 국전심사 초대작가된 게 바로 나다”  - 율산 리홍재 편
타묵퍼포먼스에 사용되는 대형붓의 형세도 꼭 율산의 몸짓을 닮았다.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6] “그래, 젊은 나이에 국전심사 초대작가된 게 바로 나다”  - 율산 리홍재 편
마른멸치를 소재로 그린 그림 같은 율산의 회화풍 글씨.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6] “그래, 젊은 나이에 국전심사 초대작가된 게 바로 나다”  - 율산 리홍재 편
날 일(日)자를 태양처럼 형상화하고 붉은 색칠까지 한 율산의 작품.


“글이 뭐죠?”

“그럼, 넌 말은 뭐라고 생각하지?”

“구름(말과 글)이 하늘(진리와 이치)을 독점할 수 있습니까.”

“구름이 스스로를 하늘이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대구에 율산(栗山) 리홍재(李洪宰)란 자가 있소. 한국 서화계에선 드물게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자인데 천하 잡놈이고, 스스로 제 작품을 미친서예(美親書藝) 색서작품(色書作品)이라 하질 않나, 심지어 오방색을 글자에 들이부어 퓨전문인화 흉내를 내고 있으니…. 사부님께서 역서(逆書)의 길을 걷는 그 자에게 따끔하게 한 말씀 해주시죠.”

“자네는 그런 자한테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생각하나.”

“자기 복이겠죠.”

“대구에 율산 리홍재라는 자가 있소. 서화계에선 황당무계한 자인데, 천하 잡놈이고, 스스로 제 작품을 미친서예·색서작품이라 하질 않나, 심지어 오방색을 글자에 들이부어 퓨전문인화 흉내를 내고 있으니…. 逆書의 길을 걷는 이 자를 따끔하게…”
?

“잣대로 재단될 사람이 아니야. 교과서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자들에겐 되레 위안이 아닐 수 없지. 그 자는 한 세상 안 태어난 셈치고 맘대로 자신을 뒤흔드는 거야. 뭐랄까, 그래, 일종의 광인(狂人)이지. 정법(正法)을 파법(破法)시키는 데서 존재감을 느끼단 말일세.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그 파괴의 법을 은근히 즐겨. 그러면서도 파법을 빌미삼아 율산을 죽이려 들지. 이율배반이야. 율산인들 왜 그걸 모르겠나. 길 안의 서생(書生)들이 왈가왈부해도 그 끼는 일점일획 변하지 않을 걸세.”

“얼마 전부터 중구 봉산동 봉산문화거리 한복판에 도심명산장(道心名山藏)인가 뭔가 하는 소굴을 만들어 놓고 내놓고 희한한 글씨를 팔고 있습니다. 마른 멸치, 포도씨, 편백나무, 앵두씨까지 작품에 삽입하고, 글씨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묘한 작품으로 혹세무민하고 있습니다.”

“이 놈아, 너도 네 작품 많이 팔리길 바라지 않는가. 자네는 죽었다 깨어나도 율산처럼 살지 못허이. 자네가 율산을 못마땅해 하지만 실은 너도 율산처럼 되고 싶은 게야. 율산(栗山)? ‘밤산’이란 말이 아닌가. 가시에 덮여 있는 밤 알을 까먹으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란 말일세. 사람들은 아직 율산의 가시를 나무랄 줄 알지 그 속에 숨은 알밤의 실체를 잘 몰라.”

갑자기 방광이 뻐근해 이른 새벽에 잠을 깬다.

꿈 속에서 그 대화를 엿들은 율산. 갑자기 막걸리 한 병을 들이켜더니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자신한테 보내는 통한의 글귀를 적어내려 가는데 꼭 이랬다.

‘세상에 참 스승이 많고 많은데, 하라는 공부는 열심히 하지도 않고선 공모전에 상이나 챙겨 초대작가랍시며 경력이나 번지레하게 치장해 과시했겠다. 심사위원을 하면서 칼을 휘두르고 이득이나 챙기며 군림하였겠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 큰 소리치고, 붓 조금 놀린다고 선배와 스승을 무시하고, 제자나 후배들에게 지는 ‘바담 풍’하면서도 ‘바람 풍’하라고 외치고 다녔으니 가히 가관이로다. 법첩 몇 권 베껴서 붓 조금 놀린다고 유명한 서예가인 척했고, 글씨 몇 자 써서 전시하고 작품이라고 팔아 돈을 챙겨 향락에 빠져 놀았고, 건방지게 한자 몇 자 안다고 선비인 양 거드름 피우고 한학자를 우롱했겄다. 남의 그림 흉내 내 그림 칠하고 그려서 화가인 척 했고, 도장 몇 개 새겨 유명 전각가인 양 돈받아 챙겼으니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또한 누군가 삼절(三絶)이니 팔능(八能·석재 서병오의 아호)이니 하니깐 지는 술이나 퍼마시고 나쁜 짓 다 하면서 모든 것에 다 능한 척 천지를 모르고 생지랄 했으니 네 이놈 율산아, 어찌 네가 서예가로서 참 스승이길 바라는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세상 똑바로 살아라.’

으!어!억!

그것 또한 몽중몽(夢中夢)이었다. 율산이 도심명산장 해우소를 나와 마당에 갓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한 모과나무 이파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갑자기 일필휘지를 한다.

무용지용(無用之用).

“언뜻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큰 구실을 한다”는 의미인데 장자의 ‘인간세’편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이 용(用)을 얘기하면 무용(無用)으로 역습하고, 남들이 무용으로 공격하면 다시 용으로 응수하는 불한당 서객(書客) 율산의 뒤안길이 혹 궁금하시다면?


◆독학서생(獨學書生)

끌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평지돌출’이었다. 집안에도 먹물 유전자가 없었다. 땅의 재주가 아니라 하늘의 재주라고 했다.

김천시 감문면 구야리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초라한 서당을 운영하면서 한약방도 겸했다. 문자속이 없는 아버지는 농사꾼이었다. 전주이씨 효령대군 19세손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미술반에 들어간다. 화가는 물론, 서예가의 꿈조차 전혀 없었다. 그냥 누나가 그림 그리는 걸 옆에서 봤다. 5학년 습자시간 때 난생처음 서예용 붓을 잡는다. 누구 눈에 발탁될 정도의 실력도 아니었다. 당시 습자 담당 선생은 한학자 겸 서예가인 김인규씨.

한자에 대한 한없는 동경과 호기심이 있었다. 습자본능이다. 학습용 한자사전을 만화보다 더 정독했다. 그냥 땅바닥에 똑같이 그려댔다. 납작하게 부풀게 길쭉하게 홀쭉하게 빽빽하게 찌그러지게 성글게 진하게 연하게…. 정자체가 아니라 일부러 다양하게 변형시켰다. 첫 사부는 ‘호기심’이다. 그의 몸도 점점 글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김천 성의중 미술반에 들어간다. 거기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 상과 전혀 인연이 없었다.

성의상고에 들어가서도 미술반에 들었다. 더욱더 한자에 미친다. 한문·고전·국어 시간을 특히 좋아했다. 선생은 “조그마한 녀석이 한자를 왜 그렇게 좋아하지”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졸업하고 대구로 온다.

모 대학교 전자과에 들어간다. 손재주 많기 때문에 그 학과에 들어갔다. 한자가 몸에 붙자 다음은 한문의 영역으로 간다. ‘동양고전 죽이기’에 나선다. 사서삼경과 명심보감 등을 독학했다. 서당에 다닌 것도 아니다. 값싼 모필 하나 갖고 혼자 글을 적는다. 중봉(中鋒·글을 쓸 때 붓대를 곧바로 세워 붓의 끝이 필획의 한가운데를 지나도록 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는 것)이 뭔지 알 턱이 없었다.

‘구궁격지’(九宮格紙·아홉 개의 모눈 칸이 있는 서예연습용 종이) 위에서 ‘영자필법(永字筆法)’부터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니었다.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반복연습 끝에 저절로 글꼴이 갖춰졌다.‘제 맘대로 서체’였지만 모친의 눈에는 아들의 글씨가 그럴듯해 보였다. 모친의 계추 안내문 등에 필요한 글귀는 그가 챙긴다.

하지만 서예의 세상이 얼마나 광대무변한지 그가 알 리 없었다.

◆난득호도(難得糊塗)

1976년이었다.

기본기가 없었다. 열정만 있었다. 글씨의 앞날이 막막했다.

급기야 대구시청 앞 대한서예원(원장은 도의원을 지낸 죽헌 현해봉으로, 석재 서병오와 죽농 서동균의 맥을 이어받음)에 들어간다. 서실에 들어가려다가 몇 번 되돌아 온 뒤였다. 그의 나이 20세.

한 수 배우러 간 게 아니다. 한 판 ‘쌈질’하러 갔다. 몸 속에는 ‘반란의 피’가 돌고 있었다.

청나라 때 전위적 민중 서예가 판교(板橋) 정섭(鄭燮) 때문이었다.

서예 사상 최초로 전통 서예의 단정하고 균일한 글씨의 스타일을 깨트리면서 창안한 ‘육분반서(六分半書·해서·행서·예서·초서·전서·문인화를 뒤섞은 크기가 서로 다른 복합서체)’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는다. 판교의 글에 스멀거리는 기(奇)와 괴(怪)를 다 훑어내 보고싶었다. 하지만 판교한테는 ‘가시’가 있었다. 판교의 좌우명이기도 한‘난득호도(難得糊塗)’ 때문이었다.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수룩하기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어수룩해지기는 더 어렵다. 한 생각 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면 마음이 편안해지리니. 도모하지 않아도 나중에 복된 응보가 올 것이다’란 의미다. 난득호도는 판교의 좌우명이자 훗날 중국인의 인생철학이 된다.

육분반서는 탐이 나면서도 난득호도는 애써 지우고 싶었다. 청나라를 호령했던 서예가 옹방강으로부터 법첩을 선물받아 추사체를 터득한 김정희. 추사가 죽은 뒤 5년 뒤에 태어나 1935년 타계하기까지 서예의 온갖 변형체를 다 실험한 한말 영남 최고의 서예가였던 석재 서병오까지 사숙했다.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 왕희지의 ‘난정서’ 등 서체별로 다양한 법첩들을 닥치는 대로 베껴썼다. 해서(楷書)에서 행서(行書)로, 그리고 예서(隸書)에서 초서(草書), 전서(篆書)로 가는 길은 목화토금수, 오행(五行)의 길처럼 한 치의 오차없이 맞물려 돌아갔다. 하나가 부족해도 하나가 넘쳐도 다른 글씨가 시들어버렸다.

서실의 일상은 ‘공업용 바늘’처럼 돌아갔다. 사부가 내려 준 ‘법첩(法帖·훌륭한 옛 법서의 글씨를 토대로 서예 학습용으로 만든 책)’을 묵묵히 ‘임서(臨書·법첩을 토대로 닮게 써보는 것)’해야만 했다. 거의 한달 만에 길 영(永) 자를 받았다. 한 자 갖고 한 달 남짓 놀아야 했다.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는 사부 앞에서는 사부 흉내를 내고 없으면 자기 색을 내뱉었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주위에서 자꾸 “야, 사부 글보다 더 낫다”고 추켜세웠다. 그의 글을 몰래 가져가서 익히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속으로 득의만면했다. 해서에서 행서로 넘어가면서 사부와 다른 운필을 했다. 사부는 “서둘지마라”고 지적했다. 사부도 그의 ‘피냄새’를 알고 있었다. 이미 자기 품안에 만족할 위인이 아니란 걸 안다.

암중모색하면서 3년여 서실에서 먹도 갈아주고 청소도 하면서 은거한다. 무당이 굿을 하듯 본능적으로 썼다. 극도의 무력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서예만 빼면 그는 극도로 ‘불온한 사내’였다.

1978년 초가을 무렵이었다. 서예가로서의 한계를 발견한다. 소리꾼이 폭포에서 독공하듯 그도 지리산의 품에서 붓을 다시 잡는다. 아무래도 서예는 아니라고 결심한다. 지리산을 다녀와 진짜 붓과 이별하기 위해 합천 해인사 앞 여관에서 혈서로 절필선언을 한다. 오른손 약지를 깨물었다. 그때 쓴 그 혈서를 한 친구가 소장하고 있다.

스물둘에 서실 원장이 되고, 스물넷에 서울미술제 초대작가가 돼 개인전을 연다. 15점이 비싼 값에 팔렸다. ‘제2의 석재’가 된 양 혈기방장했다. 그리고 사십에 국전심사 초대작가로…. 두주불사 통음의 나날…. 하지만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가 애장하고 있는 15종의 한자사전이 배추장사 수첩처럼 너덜해진 이유를…. 그에겐 성실과 광기가 혼재돼 있었다. 그리고 99년 남들 모르게 휘발유를 준비하는데…

◆20대 서실 원장

붓을 꺾는다.

하지만 세상은 전과 같았다. 남구 대명동에 있는 모 도난경보기 회사에 취직한다. 부모는 이제 사람 구실한다고 좋아한다. 글을 버린 지 50여일, 강력한 금단현상이 그를 집어삼킨다. 멍한 나날이었다. 설상가상 공사 현장의 물탱크에 빠진다. 그대로 집으로 온다. 회사를 버렸다. 다시 붓에 입성한다. 전과 다른 붓이 다가왔다.

서실에서 율산을 찾았다. 그는 거부한다. 독존(獨存)하기로 맘을 먹는다. 한 푼 벌지 않으면서도 툭하면 필방에 종이를 사러 다녔다. 물론 용돈은 아버지의 몫. 시내 문흥당을 자주 이용했다. 한번 갈 때마다 100여장이 넘는 한지를 사갖고 왔다. 그리곤 2~3일 만에 다시 종이를 사러 간다. ‘왜 젊은 사람이 그렇게 종이를 많이 내버리느냐’고 의아해 하면서도 다들 그의 글을 궁금해 했다. 그는 보여주지 않았다. 어느 날, 필방에 온 그를 서예인 몇 명이 에워싸고 지필묵을 내놓으며 무조건 일필휘지 해보라고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마땅히 쓸 글귀가 없었다. 옆에서 경서 한 구절을 불러주었다. 불러주는 족족 다 써버렸다. 전광석화 같았다. 다들 탄성을 질러댔다.

‘아, 나도 이제부터 전면전이다.’

그의 재주를 꽉 잡은 사람이 있다.

필방을 운영했던 김진구씨였다. 율산에게 서실을 차리자고 권유한다. 그는 흐뭇해 하면서도 아내와 강릉 경포대로 도망을 친다. 한달여 뒤 다시 필방에 갔다가 마침내 덫에 걸려든다. 김씨가 덕산동에 그를 위한 서실을 미리 만들어 놓고 덜컥 원장 자리에 앉혀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타의에 의해 79년 7월 율산서도원이 태어난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22세의 서실 원장이 탄생한다.

80년 5월 더 충격적인 일을 저지른다.

24세에 동아백화점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이미 그해 그렇게 어렵다는 서울미술제 초대작가가 된다. 1년에 고작 2~3명뿐이다. 대다수 50~60대다. 하지만 지역 서예계에선 새까만 무명이었다. 기라성 같은 대선배가 수두룩한 지역에서 언감생심 개인전을 열다니. 사부한테도 허락을 받지 않았다. ‘당돌하고 무엄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77점을 내밀었고 15점이 꽤 비싼 가격에 팔린다. 표구비를 갚고 남는 돈으로 술을 퍼먹었다. 다들 율산의 혈기방장함의 말로를 걱정했다.

‘제2의 석재’가 된 양 ‘대구발 법고창신파’인 ‘묵향심우회’를 만든다. 법통을 지키는 걸 싫어하는 야당 기질의 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96년 불혹의 나이에 전국 최연소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국전심사 초대작가가 된다. 남의 시가 아니라 항상 자작 한시를 내민다.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았다. 두주불사에 통음의 나날이었다.

◆절차탁마 & 위편삼절

추사는 10개의 벼루, 1천여개의 붓을 버렸다. 그리고 309권의 법첩을 임서했다.

더러 율산이 아무것도 모르고 날뛴다고 꼬집는 이도 있다. 율산을 두둔하는 쪽에선 그가 애장하고 있는 15종류의 큼지막한 한자사전을 눈여겨 보란다. 수험생의 영어사전을 방불케 한다. 사전 곳곳은 형광펜 투성이다. 배추장수 수첩처럼 변한 한자사전을 보고 다들 말문을 닫는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옥편을 통째로 외워 왔다. 풍류에 여념없는 그한테는 너무도 낯선 대목이다. 고은 시인이 감옥시절 한글사전을 정독하면서 맘에 드는 단어를 익힌 것처럼 그도 서문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줄도 놓치지 않고 정독했다. 한없이 무식한 공부법이었다. 특정 한자의 고자(古字)와 현재 글자의 전이과정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사전에 체크해 둔다.

광적인 메모광이다. 하루에 일어난 일을 일기장 같은 다이어리에 다 적어둔다. 이런 성실함과 광기가 어떻게 매칭될 수 있을까.

한학보다 도교와 불교적 마인드가 더 짙다. 그게 열정을 만나 기인으로 숙성됐다. 80년대엔 아산 김병호한테서 주역까지 배운다. 하지만 문(文)이 그의 불콰한 기운을 다 누르지 못한다.

그의 광기는 시절과 불화를 일으키면 ‘자살충동’으로 이어진다. 20대 어느 날이었다. 부산 태종대 자살바위에 갔다. 뛰어 내리려고 하는데 파도에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한밤에 대취해 대로에 누웠는데도 차가 몸을 밟고 지나가지 않았다. 자기가 죽을 환경을 일부러 만들었지만 죽지 않았다. 하늘이 나를 죽일 것이라면 죽일 것이다. 아직 안 죽은 건 할 일이 더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남들은 생의 길을 간다. 하지만 그는 생과 사의 경계를 걷는다. 그는 툭하면 ‘덕보는 것도 싫고 원래 실패를 즐겨’라고 독백한다.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매일 ‘주유찬란(週遊燦爛)’하다.

의가 상하거나 누가 잘난 척하면 술판을 뒤엎어버린다. 취해서 수도없이 필름이 끊겼다. 분위기 때문에, 사람 때문에 먹는다. 길바닥에서 자다가 파출소에 잡혀가기도 부지기수였다.

혼자 있을 때는 자주 발가벗고 글을 휘갈긴다. 사람이 맘에 안 들면 글을 안 준다. 모씨가 거금을 내밀며 한 점을 원했지만 거절했다. 수가 틀리면 다 완성된 병풍 위에 먹물을 끼얹기도 한다. 어느 식당 한 구석에 자기 작품이 세워져 있는 걸 봤다. 그가 바닥에 눕혀 놓고 박살내버렸다.

◆천지삐까리…山山山山山

그 사내의 팔자에는 왜 그렇게 뫼산(山) 자가 많이 들어 있을까.

그의 작업실은 봉산동, 아호는 율산, 살고 있는 곳은 지산동, 공방은 덕산동, 작업실 당호는 도심명산장. 5개의 산을 가진 자는 그 혼자밖에 없을 것이다.

◆ 타묵퍼포먼스

매일이 퍼포먼스적이었다.

율산의 전매특허는 ‘타묵퍼포먼스’.

원래 취하면 큰 종이에 글 쓰는 걸 즐겼다. 그게 타묵퍼포먼스로 발전했다. 한번은 울산에서 필방을 운영하는 김종춘씨가 지름 10㎝ 이상의 초대형 붓을 갖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율산과 인연이 됐다. 97년 여름이다. 그 광경이 TV로도 방영됐다. 처음에는 글이 안됐다. 초대형 글씨는 쓰는 사람도 지상 10m 정도 올라가지 않고서는 전체 균형 여부를 판별하지 못 한다. 그냥 감으로 써내려 가야만 한다. 물론 흉내가 아니라 완성된 서체도 엄정해야만 했다. 그냥 붓만 빗자루처럼 질질 끌고 다니는 서예퍼포먼스와는 거리가 멀다.

당시 그런 서예가가 없어 단번에 전국적인 이슈가 된다. 나중에 가로 3m·세로 4m 크기의 한지에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썼다. 별로였다. 여느 서예가처럼 잡았는데 다시 생각을 바꾼다. 술을 거나하게 마신 뒤 다시 ‘용비봉무(龍飛鳳舞)’를 적었다. 격파용 송판을 잡듯 양손으로 붓을 움켜잡고 떡메를 치듯 품새를 잡았다. 종이와 붓이 그렇게 통쾌하게 뒤엉킬 수가 없었다. 면도칼이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전율이 지나간다. 서예의 신장르가 개척되는 순간이다.

99년에 봉산미술제가 생긴다. 그때 명실상부한 타묵퍼포먼스가 태어난다. 현재 봉산문화회관 공터 자리에서 폭 1.5m·길이 25m 크기의 한지 밑에 20여장의 합판을 깔았다. 모두 8자(龍遊鳳舞 世樂民喜·용은 놀고 봉황은 춤추니 세상은 즐겁고 백성들은 기쁘다)를 적었다.

뒤늦게 고백한 사실이지만 그날 행사장에서 자살할 심산이었다. 여러 사람이 볼 때 황홀하게 미학적으로 죽어버리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휘발유까지 준비해갔다.

재즈의 즉흥연주 같은 즉석휘호였다. 서예를 전혀 모르는 이에게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체험토록 연출한 것이다. 행사마다 새 한복을 입는다. 그런식으로 갖고 있는 흰 한복이 이미 100벌이 넘는다.

◆ 율산은 이제…

정적인 서예가 있다면, 율산의 동적이며 파괴적 서예도 있다. 정과 동이 맞물려 돌아가야 된다. 율산은 글과 그림, 그리고 서각의 경계를 통음해봤다. 10번의 개인전을 통해 붓으로 하는 장난은 거의 다 해봤다. 문자의 개념도 떠나고, 고전 법첩의 한계도 내려놓고 붓을 들고 그냥 놀다가고 싶어한다. 여력이 주어진다면 해서·행서·예서·초서·전서가 혼융된 ‘율산식 육분반서체’의 진경을 맛보고 싶단다. 그의 파법(破法)의 끝이 남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겨 스스로 강해지는 ‘자승자강(自勝自强)’의 ‘NEWVISION(新秘展)’에 가 닿는다면….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타묵퍼포먼스 : 음악에 맞춰 수십㎏ 되는 큰 붓으로 춤추듯 글씨를 치는 서예계의 행위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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