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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1920년대 후반~1945년 대구 항일 학생운동

2013-12-13

黨 만들어 군사훈련…악질 日人교사 집단구타…유대인처럼 경제운동…

20131213
1930년대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이 일본 군사교관으로부터 실전과 같은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학생들은 여기서 배운 군사지식을 이용해 항일무장운동을 기획했다.
20131213
신우동맹사건 당시 대구고보 정문
20131213
1943년 당시 대구상업학교 전경.
20131213
대구상업학교의 비밀 항일결사체인 ‘태극단’의 단장 이상호 열사.

3·1운동, 광주항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항일운동이었던 6·10만세운동의 주역 권오설과 김단야는 각각 대구고보와 계성학교 출신이다. 권오설은 1918년, 김단야는 1916년 학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을 당했다. 두 명은 이후 사회주의계열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 1919년 대구3·8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고보 학생 가운데 계성학교 학생 35명과 대구고보 학생 7명 등이 실형을 언도 받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두 학교는 지속적으로 등교거부와 동맹휴학을 펼쳐갔다. 그 가운데 많은 학생이 민족차별에 항거하다 퇴학이나 정학처분을 당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 대구지역의 항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학교는 대구고보와 대구사범학교, 대구상업학교였다.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대구고보의 신우동맹
전국적 항일조직 추진
105명 체포 옥고 치러…
동맹휴학으로 퇴학도
졸업률 30∼50% 불과

대구사범 비밀결사체
백의단·문예부 등은
기관지 발행·야학 활동
무려 300여명 체포돼
“전시체제하 항일운동”
일제 놀라 보도 통제

대구상업의‘태극단’은
군사·항공부 등 조직…
폭동 전략까지 세웠지만
결성 직전 밀고로 와해

■ 대구고보의 신우동맹

일제는 경기고보(1900), 평양고보(1909)에 이어 삼남지방(경상·호남·충청)에서 처음 관립학교인 대구고보(1916)를 세웠다.

하지만 관립 이전 대구고보는 경상감영 내에 건립된 달성학교(1899)가 모태다. 당시 초대교장은 경상도관찰사 김직현이었으며, 구 한말정부로부터 매달 10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1909년 달성학교는 협성학교로 교명을 바꾼다. 당시 교사였던 홍주일은 조선국권회복단 결성과 3·1운동을 주도하다 두 차례나 투옥된 독립지사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협성학교 학생 10여명도 동맹휴학을 결행하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일제는 삼남지역 유생의 자녀를 계몽시킨다는 미명하에 협성학교 재학생과 신입생을 선발해 1916년 옛 대구향교에서 대구고보를 개교했다.

대구고보는 대구지역 항일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3·8대구만세운동 때는 200명의 전교생 대부분이 참여할 정도로 민족심이 높았다. 1919년~30년 대구고보에 입학한 학생의 평균 졸업 비율은 30~50%였다. 특히 대구고보에선 1928년 9월~11월 3개월간 동맹휴학을 하다 2~3학년 205명 중 45명이 퇴학을 당했다. 이들이 요구했던 내용은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가르치거나 시간을 연장할 것, 조선인교사를 늘릴 것, 교내·외 언론과 집회의 자유, 악질 일본인교사 퇴출 등이었다.

대구고보에서 두드러진 사건은 1928년 11월에 발각된 비밀결사사건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선 최초의 ‘적색(공산주의)학생결사사건’으로 봤다. 처음엔 40명이 검거됐으나 고등계형사 9명이 투입돼 40일간의 고문과 탐문수사 끝에 105명이 체포된 뒤 간부 2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이 단체의 첫 명칭은 1927년 11월 대구고보에서 창립된 신우동맹(新友同盟)이다.

박광세와 장홍상(장적우)의 지도 아래 대구고보생 남국희·윤장혁·이봉재·백대윤 등을 중심으로 대구상업학교, 대구농업학교 학생이 모여서 조직했다. 이들은 대구시내 각 학교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반일학생결사체를 만들 계획을 했다. 결사의 동기는 1926년부터 시작된 사회과학 사상 강좌였다. 이후 신우동맹은 혁우동맹(革友同盟)~적우동맹(赤友同盟)~일우동맹(一友同盟) 등으로 바뀌었다.

이 사건으로 대구고보생 장종환(3년)·윤장혁(3년)·상무상(2년6월)·조은석(2년6월)·이봉재(2년)·김성칠(2년)·이대덕(2년)·백대윤(1년6월)·박득룡(1년6월)·황보선(1년6월)·박명근(1년)·김승한(1년)·이인팔(10월)을 포함해 대구상업학교, 대구농업학교, 대구중학교 학생 20여명이 수 개월에서 3년의 옥고를 치르거나 집행유예를 언도받았다.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한 장진홍 의사가 수감 중 자결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윤장혁, 박득룡 등이 감방 벽을 부수고 농성과 단식으로 저항하다 8개월 가형을 받았다.

대구고보의 전통을 간직한 경북고(대구시 수성구 황금동)에는 2·28학생의거기념비와 조형물은 있지만 1920년대 말 항일운동과 관련한 기념비는 없다.

이준복 경북중·고 총동창회 사무처장은 “지난해 수성구 청호로와 인접한 경북고 서편 담장을 허물고 2·28기념비를 역사관 근처로 옮겼다”면서 “2016년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항일학생운동과 6·25참전학도병기념비를 함께 건립해 교문 주변을 메모리얼 파크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대구사범의 비밀결사

◆독서회·문예부·연구회·다혁당

일제는 1929년 식민지 아동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교사양성기관으로 대구사범학교를 설립했다. 모태는 1906년에 개교한 사립 대구사범학교였다. 경상도관찰사 신태휴와 광문사 사장이었던 독립지사 김광제가 설립했다. 1923년 경북공립사범학교로 전환됐다 다시 대구사범학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당시 경성·평양사범과 함께 3대 사범학교였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개교 초기부터 시작됐다. 1930년대 중반 일시적으로 침체되기도 했지만 30년대 후반~40년대 초 대구지역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30년대 후반 대구사범학교를 비롯한 전국의 10개 사범학교에는 전국의 수재가 모여들었다.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됐을 뿐만 아니라, 학비면제에 용돈 명목으로 관비까지 지급됐기 때문이다. 대구사범의 학생운동은 1930년 현준혁 교사가 중심이 돼 만든 사회과학연구회로부터 출발한다. 현 교사는 ‘독서회’조직을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계급의식,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다 1931년 11월, 그를 포함한 학생 37명이 체포되고 10명이 기소를 당했다.

1934년에는 2·3기생 20여명이 마르크스 강좌를 비롯해 조선역사 등을 탐독하다 체포됐으나 특별한 조직을 결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방됐다. 1938년 4월, 일본인 학생을 중심으로 2년제의 연습과가 설치되면서 대부분 조선인 학생으로 구성된 심상과와 마찰을 빚으면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이는 결국 1939년 ‘왜관사건’으로 표출됐다. 경부선 왜관철교~약목 구간에서 근로보국을 하다 민족차별로 싸움이 일어났는데, 학교 당국이 일본학생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자 조선인 학생이 평소 악명 높았던 3명의 교사를 집단으로 구타했다. 이 사건으로 18명이 퇴학 또는 정학처분을 당했다. 이를 계기로 후배인 9기생 20여명이 백의단(白衣團)이란 비밀결사체를 만들었다.

1940년 1월, 8·9기생이 중심이 돼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발간해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1940년 11월엔 박효준의 주도로 이태길·강두안·박찬웅·류흥수 등 8명이 독립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체 ‘문예부’를 조직했다. 이는 1941년 ‘연구회’로 이어져 기관지인 ‘학생’을 발간했다. 문예부와 연구회는 류흥수의 주도로 그해 다혁당(茶革黨)으로 확대 개편됐다.

다혁당원은 방학 중 야학을 개설해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도 앞장서는 한편, 공휴일과 일요일을 이용해 앞산 등지서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하지만 그해 8월, ‘반딧불’과 ‘학생’이 탄로나면서 다혁당의 실체가 드러나 무려 300여명이 체포됐다. 결성된 지 5개월 만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대구사범학교 교사였던 김영기를 비롯해 졸업생, 학부모까지 포함됐다. 일제는 전시체제하에서 대규모 조직의 항일학생운동단체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일체의 보도를 통제하고 민심동요와 사건 확대방지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체포된 학생 가운데 권쾌복·박효준·류흥수 등 34명이 재판에 회부돼 5명이 징역 5년, 2명이 징역 3년, 27명이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이 가운데 강두안·박제민·박찬웅·장세파·서진구 등 5명은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옥중 순국했고, 5명이 일제의 패망으로 석방됐다.

경북대사범대 부설중·고가 위치한 달구벌대로 남쪽에 1973년 학생의 날(11월3일)을 맞아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생존자들이 건립한 순절동지추모비가 있다. 추모비 서문에 ‘겨레의 역사 오램이 자랑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 참되이 살았음이 자랑이요’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추모비 뒤편 건물에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97년 9월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대구사범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이 들어섰다.

◆무우원

대구사범학교 특설강습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 조형길·김병욱·현영만 등이 1940년 12월 항일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다. 무우원(無憂園)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취지로 불교정신을 통해 정신적 강화와 결합을 도모했다. 특히 무력으로 투쟁하기보다 유대인처럼 경제력을 길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43년 6월까지 일본에서 독립운동자금모금을 했으며, 기관지 ‘문장연구’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원의 밀고로 단원 18명이 체포돼 조형길·김병욱·현영만·강증룡 등이 징역 5년~1년6월을 선고받았다. 이 중 최수원이 일경의 고문으로 순국했으며, 조형길은 1945년 6월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대구상업학교(현 상원고)는 올해가 개교 90주년이다. 대구가 상공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상업교육의 필요성이 증대돼 설립됐다. 이 학교 역시 개교 직후부터 민족차별로 학교측과 조선인 학생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수차례 일어났다. 1920년대 후반 대구고보생들이 주도한 신우·적우동맹, 일우당 등에 일부가 참여해 활동했다. 1929년과 30년에는 동맹휴학을 했다. 37년 정문택이 항일결사체를 조직하려다 피체됐다.

■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대구상업학교의 학생운동은 태평양전쟁 직후부터 다시 전개됐으며 그 중심에 이상호가 있었다. 1942년 6월 이상호는 같은 학교 김종우·이태원을 비롯해 대구직업학교(대구공고) 윤삼룡, 경북중(경북고) 최두환 등 7명과 심신단련과 연구를 위한 모임을 만들려고 했으나 좌절됐다. 이듬해 서상교, 김상길 등과 만나 민족차별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민족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체 태극단(太極團·일명 T·K·D)을 조직했다. 이어 김정진·김종우·이원현·윤삼룡·이태원·최두환도 가입했다.

그해 5월, 이상호가 단장, 서상교가 체육국장, 김상길이 관방국장을 맡았다. 5월9일 앞산에서 결성식을 열려고 했으나 참석이 저조해 무산됐으며, 6월6일에 다시 결성식을 모의하다 조직원의 밀고로 이상호가 붙잡혔다. 이상호는 끝까지 자신이 혼자 기획했다고 버텼으나 이상호의 집을 압수수색한 일경이 집 천장에서 대원명단을 입수해 26명을 체포했다.

이들 가운데 17명이 불기소되고 이상호·서상교·김상길·김정진·이원현·윤삼룡 등 6명이 재판에 회부돼 10년~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태극단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준윤이 순국하고, 투옥 중이던 이원현이 혹독한 고문을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10년 형을 선고받은 이상호도 수감 중 석방됐으나 광복직후 순국했다.

태극단은 정단원, 준단원, 건아대로 구분됐다. 이들은 인도의 간디, 중국 쑨원의 삼민주의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독서토론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체력단련을 위해 등산부, 씨름부 군사부를 뒀다. 특히 항공부를 조직해 일제의 패전과 조선독립의 가능성을 알리는 전단을 살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폭동을 일으키는 전략까지 세웠으나 결성식도 못한 채 조직이 와해됐다.

상원고 야구장 뒤편 학산남로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공원에 의거를 기리는 탑이 서있다. 1975년 기념사업회가 교정에 세운 기념탑을 대구상고 출신인 황대현 전 대구달서구청장이 2003년 공원을 조성하면서 옮긴 것이다. 상원고동창회 태극단추모사업회가 매년 5월과 광복절에 추모제를 연다. 하지만 공원주변에는 잡풀이 무성하고 꽁초 등 쓰레기로 가득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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