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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7> 구미공단·포항제철 건설

2015-04-30

박태준 “對日청구권 자금 전용해 제철소 짓자” 박정희 “기막히군, 임자가 日설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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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공단 전경. 구미공단 조성을 계기로 대구·경북의 중심산업이 섬유산업에서 전자산업으로 바뀌었다. <영남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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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 공장 착공식에 참석한 김학렬 부총리,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오른쪽부터)이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영남일보 DB>

1969년 1월 하순 하와이. 박태준은 와이키키 해변을 걷고 있었다. 종합제철소 건설에 쓸 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 워싱턴까지 날아갔지만 믿었던 국제제철차관단(KISA)의 프레드 포이 대표에게 퇴짜를 맞았다. 세계 철강업계와 금융기관들은 이름조차 낯선 후진국 대한민국에서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이 성공할 수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제철에 목숨을 건다고 했는데, (건설비) 1억달러가 없어서 나가떨어지다니. 일본에 가서 차관을 더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박태준의 머리에 불현듯 ‘대일 청구권 자금’이 떠올랐다. 박태준은 쏜살같이 콘도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에서 협상은 실패했지만 마지막 방법이 있습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轉用)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식민지배 기간 끼친 각종 피해에 대한 배상청구로 받기로 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자금 중 농수산 지원 용도로 사용하기로 한 자금을 제철소 건설로 돌려서 활용하자는 이야기였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기막힌 아이디어군. 대일 청구권 자금이 1억달러는 남아 있을 거야. 일본 정부는 임자가 설득해"라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은 농수산 지원 용도로 쓰일 자금을 전용하는 데 반대했다. 국회의원의 80%가 농촌 출신이었기 때문. 하지만 박정희와 박태준은 국가의 농수산업 대신 제철소를 선택했다. 그날의 결정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포항제철소 ‘하와이 구상’
본격적인 산업화로 철강수요 급증
70년대이후 중화학공업 수출 견인
포항, 국제 철강산업 중심지로 부상

◇구미공단은 ‘근대화 구상’
‘고향에 공단건설’비판 받고도 추진
경제개발 실현 가능성 의지 보여줘
지역산업 섬유→전자 전환 계기로


◆ ‘근대산업의 쌀’ 포항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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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3개월의 공기를 거쳐 1973년 7월3일 완공된 포항종합제철 전경. <영남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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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소 1고로 첫 출선. 박태준 사장(가운데)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자신이 꿈꾸고 있었던 조국근대화를 위해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했다. 경제기획원이라는 새로운 부처를 만들어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기획하고 추진하도록 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중단되었지만 30년 이상 지속된 우리나라 산업화의 핵심 추진전략이었다. 구미공단 조성과 포항제철 건설은 바로 이 산업화 추진전략의 구체적인 산물이다. 공단 조성과 공장 건설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에서부터 입지 선정, 건설 규모, 건설 자금 조달 등은 모두 정부가 주도적으로 결정해서 이뤄졌다.

철강은 흔히 ‘근대 산업의 쌀’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모든 근대산업의 바탕이 되는 소재이다. 우리나라 역시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철강수요가 급증하였다. 산업화에 따라 도처에서 건설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건설작업의 중요한 자재는 바로 철강이었다. 게다가 철강은 전자나 기계산업에 필요한 부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소재였다. 1960년대 수출산업이 섬유산업과 같은 경공업 위주였다면 포항제철 건설로 자동차, 조선, 화학과 같은 중화학공업이 수출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포스코는 현재 글로벌 톱 4위권의 철강업체가 됐다. 생산능력이나 제품 경쟁력에서도 40년 전 포항제철소 건립을 지원해줬던 일본의 신(新)일본제철을 뛰어넘는다. 또 자동차와 IT·조선·플랜트 등 현재 한국 기업이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도 모두 철강 소재의 자립(自立)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스티브 잡스 애플 CEO가 세계 IT업계에 남긴 영향보다도 박 회장이 한국 산업과 경제에 미친 영향이 몇 배는 클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포항제철 건설이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도 컸다. 특히 포항이라는 지역사회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포항제철 건설을 계기로 포항은 인구 50만명의 대도시로 성장하여 대구·경북 제2의 도시이자 국제 철강산업의 새로운 중심도시가 됐다. 포항제철은 생산설비와 함께 포스텍과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설립하여 산·학·연 체계를 갖춤으로써 포항을 세계적인 교육연구도시로 만들었다. 산업구조적으로도 철강기계산업이 전자산업과 함께 대구·경북의 중심산업이 될 수 있도록 만든 바탕이 되었다.

◆ 고향에 공단 조성 특혜 비판

1964년에 제정된 ‘수출산업공업단지조성법’에 따라 정부는 1968년 구미지역을 지방공업개발 장려지구로 지정하였다. 1968년 3월 공단 조성이 시작되어 1973년 12월 제1단지가 완공됐다. 1단지에 이어 2, 3, 4단지가 순차적으로 조성됐고 현재 5단지 조성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구미공단은 내륙에 조성된 공단으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2014년 구미 수출액 325억달러를 이끌어내는 등 수출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에 대규모 수출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고향에 공단을 건설함으로써 특혜를 주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에 대규모 수출공단을 조성함으로써 조국근대화가 헛된 꿈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이념임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반신반의하던 국민들에게 조국근대화와 경제개발이라는 구호가 구체적인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구미공단의 1단지는 섬유단지와 전자단지로 구성되었으나 그 후 추가적으로 단지가 조성되면서 섬유업종의 비중은 크게 약화됐다. 지금은 구미공단에서 전기전자와 기계 업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2018년까지 완공될 5단지에는 첨단전자산업을 중심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구미공단 조성은 대구·경북의 산업구조를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바꾼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경북의 중심산업은 섬유산업이었다. 구미공단 조성을 계기로 대구·경북의 중심산업이 섬유산업에서 전자산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한계도 있다. 무엇보다 구미공단 내 전자업종에 속하는 많은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1, 2차 협력업체로 대기업의 수직적인 지배구조 속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대구·경북지역은 지금 새로운 산업적 전환의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다. 실제로 구미와 포항은 구미공단 조성과 포항제철 건설로 우리나라 수출산업화를 상징하는 도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과거의 수출산업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만족할 시점은 지났다. 선도적인 첨단산업화에 나서지 않으면 언제 낙후지역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구미공단 조성과 포항제철 건설에서 얻은 지혜와 자부심을 살려 대구·경북지역을 세계적인 첨단산업의 중심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해방 70년을 준비해 나갈 때다.

백승대<영남대 교수>


69년 구미공단 기공식때 “7개 대기업 입주 등 수출 기대” 게재

영남일보에 비친 구미공단·포항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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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1973년 7월3일자 1면에 실린 ‘포항종합제철 3일 준공’이라는 제목의 톱기사.

73년 7월3일 1면 톱에 포철 준공 실어
대구지역 기계공업 활기 찾을 것 기대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절대 상징인 포항제철 건설 역시 구미공단 조성과 마찬가지로 국가주도적 산업화 전략의 산물이다. 포항제철 창립연도가 구미공단 조성이 시작된 1968년이라는 것 그리고 조강 103만t의 포항제철 1기 설비가 준공된 것도 구미공단 1단지 조성이 완료된 1973년이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포항종합제철공장은 3년3개월의 공기를 거쳐 1973년 7월3일 완공됐다. 완공까지 들어간 비용은 1천215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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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는 포항제철 완공에 맞춰 73년 6월30일부터 7월4일까지 ‘중공업 한국의 태동’이라는 제목으로 기획특집 기사를 실었다.

영남일보는 1973년 7월3일 1면에 ‘포항종합제철 3일 준공’이라는 제목으로 경북개발의 핵이 될 포항종합제철공장 설립으로 침체된 대구지역의 기계공업이 활기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포항제철 완공에 맞춰 73년 6월30일부터 7월4일까지 ‘중공업 한국의 태동’이라는 제목으로 4차례에 걸친 기획특집 기사도 실었다. ‘종철의 전모’ ‘건설되기까지’ ‘생산과정’ ‘장래의 청사진’ 등의 소주제로 나뉘어 건설 과정과 효과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기사는 1958년도 자유당 말기부터 시작된 종합제철공장의 구상과 계획에서부터 차관교섭 진행과정, 포항제철 건설의 필요성과 그 과정, 공법 등으로 상세히 보도했다. 1973년 12월2일자에서는 포항제철의 2차 설비착공식이 보도됐다. 2차 완공으로 국내 철강재생산능력과 설비가 2배 늘어나고 연간 2억1천500만원의 외화증대와 2천400명의 고용증대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구미산업공단 기공식은 1969년 7월18일자 신문에 실렸다. “일본 도시바를 비롯해 7개 대기업이 입주해 1천800만달러의 수출이익을 올릴 것”“구미공업단지는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공업용수가 저렴하여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이 많아 부지가 120만평으로 늘어날 예정”이라는 내용이 실렸다. 하지만 한때 우리나라 수출을 주도했던 구미공단은 지금 기업의 역외 이탈이 가속화되면서 공동화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역 경제의 양대 축으로 자리잡고 있던 삼성과 LG 계열사들이 생산물량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협력업체의 주문량이 감소, 구미공단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2000년 이후 10년간 지켜오던 ‘내륙 수출 1위 도시’ 타이틀도 충남 아산시에 뺏겼다. 구미공단은 물론 대구·경북 산업 전반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자료조사 조사팀 박성희, 심지영 인턴기자(경북대 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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