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시작한 그림이지만 한때 건축설계사로 일했던 실력 덕분인지 벌써 프로 화가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비운에 죽은 낙서화의 대가인 바스키아 풍의 자화상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가 왠지 ‘르네상스맨’ 같다. |
미술도 학원 가지 않고 혼자 공부
틈만 나면 목탄·연필을 들고 그려
지역 미술협회에도 가입
지난해엔 개인전도 열었지만
아직 내 색깔이 없는 무명화가
오토바이도 내 열정의 한 부분
집단 투어링·동호회 활동은 사절
자리 잡으면 큰 도시로 떠나지만
나는 도회의 사람들을
상주로 오게 만들려고 노력
죽을 때까지
커피 볶는 기타리스트 할아버지로
상주에 남고 싶어
자리를 잡으면 다들 더 큰 도시로 떠났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내 가게가 ‘역사’가 되려면 여기를 놀이터로 여기고 잘 놀아야 된다고 믿었다. 좋은 원두를 맛보기 위해 상주로 큰 도시인을 오게 만들자 싶었다.
커피와 관련된 빈티지 그라인더, 에스프레소 기계 등을 하나씩 사 모았다. 역시 내가 우직하니 우직한 단골이 형성되었다. 상주로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 커피 좋아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 음악 하는 사람, 오토바이 동호인, 서울 등지의 화가 등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로스팅이 절정으로 치달으면 내 연주도 절정으로 응사한다.
커피가게 문이 닫히면 난 귀가하지 않고 자정 넘어 지하 합주실로 간다. 모여서 3~4시간 연습한다. 결혼 전에는 커피가게에서 먹고 자고 했다.
13시간 이상 커피가게에서 시달린 상태에서 합주실로 가게 하는 광기가 내 삶의 유일한 의미였다. 매일 난해한 것을 작곡했다. 상주문화회관, 지역 대학교 등에서 자주 연주 무대를 가졌다. 드러머 최규철 등 20여 명의 연주자가 나와 의기투합을 했다. 난 속으로 머잖아 ‘상주의 신중현’으로 등극할 줄 알았다. 로스팅은 고향에 머물더라도 연주만은 서울을 넘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 유명 기타리스트의 꿈도 접었다. 왜 서울로 간 뮤지션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들 젊은이들에게 밀리고 마는가? 왜 늙으면 무대에서 밀려나야 하는가? 말년이 비참한 대한민국 뮤지션의 삶. 난 그러지 않고 싶었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 출연한 쿠바의 80대 무명 연주인처럼 은퇴 없이 임종 때까지 단골의 박수갈채 속에서 매일 연주생활을 하는 게 진정 위대한 뮤지션이다. 그건 인기 차트와 무관하다. 나도 상주에서 죽을 때까지 커피 볶는 기타리스트 할아버지로 살자고 다짐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 커피가게가 훌륭한 연주무대로 보였다. 일부러 관객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손님이 바로 ‘관객’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지독한 독서파워 때문이다. 내 주장에 힘이 실리려면 ‘인문학적 안목’이 있어야 된다고 어릴 때부터 생각했다.
20여 년간 3천권 이상의 책을 독파한 것 같다. 지인들 모두 내 독서목록에 기겁한다. 독서가 대학교에도 안 간 나를 교양인으로 숙성시켜준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학을 비롯해 철학, 역사학, 사회학, 물리학, 명상, 심지어 카비르 시는 물론 일본의 하이쿠까지 관심권에 있었다. 독서는 나를 망상과 허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힘을 갖게 해주었다.
커피가게 바로 아래 1층은 로스팅룸 겸 기타 연습실 겸 아틀리에.
그동안 틈틈이 연주한 곡은 테이프로 만들어 단골에게 선물도 했다. 올해부터 정식으로 음반을 만들 작정이다. 사무엘이란 프랑스 출신의 보컬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중이다.
커피가게의 인기 프로그램은 단연 무료 카페음악회였다. 카페에서 록 공연. 시골 단위에선 처음일 것이다. 월 1회 밴드 공연도 했다. 보통 2~3개 팀이 온다. 김광석 노래부터 재즈, 블루스, 록, 포크송, 클래식 등도 했지만 일반 성인 트로트는 제외시켰다. 한국을 방문한 중국의 플루트 교수, 국내 유명 카운트테너도 왔다.
커피와 음악은 잘 상응했다.
하지만 뭔가 하나 더 필요했다. 동면에 들었던 건축설계사의 잠재의식이 발동했다. 그게 3년 전부터 그림 그리기 열정으로 분출한다.
일단 손님의 다양한 표정부터 스케치해서 선물로 주었다. 커피가게로 올라오는 계단 벽에도 데생화를 전시해두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게 내 그림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다.
미술도 학원에 나가지는 않고 스스로 터득했다. 틈만 나면 목탄, 연필 등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신문에 난 좋은 사진을 그리기도 했다. 난 유화보다 크레파스화에 관심이 많다. 미술 관련 전문가가 잘 그린다고 칭찬을 해준 덕분에 지역 미술협회에도 가입하게 됐다.
작년에 상주의 한 고가에서 개인전을 했다. 크레파스, 아크릴 등으로 10여 점 그렸다. 은하수가 주제였다. 오로라도 그렸다. 올해 어린이날 기념으로 경천대 쪽에서 크레파스화를 전시했다. 석양과 여자 얼굴을 주로 그렸다.
최근에 그로테스크한 그림을 한 점 완성했다. 다양한 예술적 열정을 가진 정체 불명의 내 자화상을 낙서 같은 바스키아풍으로 그려보았다. ‘퓨전 해골화’ 같았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 곁에 미국의 재즈 트럼펫 연주가인 마일즈 데이비스, 자메이카의 싱어송라이터 밥 말리의 음악적 오르가슴 가득한 얼굴도, 미국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의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눈빛도 그려 이젤에 세워놓고 매일 경전처럼 바라본다.
커피와 음악의 지원사격을 받은 내 미술은 전방위적으로 뻗어가고 있다. 일단 세계의 미술관과 국내 유명 갤러리, 세계 유명 작가 그림부터 정독하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현대미술이 이미 미술의 선을 넘어가버렸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오히려 르네상스 시절의 정물화와 성화 등에 더 호감이 갔다.
다다이즘(1915~24년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반문명, 반전통적인 예술운동) 전에는 그림에도 일정한 범주가 있었다. 그런데 이젠 현대미술에 주관적 철학이 너무 들어가 모든 게 다 허용된다.
나는 장 보드리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시물라시옹(현대는 본질 대신 덧입혀진 허상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세상을 풍자하고 정화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본질에서 이미지가 나왔는데 나중에는 이미지가 본질을 다 집어삼키는 세상이다. 본질은 아무런 힘이 없고 모두 과장된 이미지에 지배당한다. 그래서 세인은 이미지의 포로가 돼 본질은 모른 채 죽어간다.
머리는 23세부터 길렀다. 일정의 반항이다. 7년 전부터 수염까지 길렀다. 수염도 세상에 맞서는 나만의 연주법. 장발에 대한 고정관념을 생각해보자. 예전에는 상투를 자르느니 내 목을 자르라고 대들었던 사람들인데 세월이 얼마나 흘렀다고 대뜸 긴머리를 나무라는가. ‘세상사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 그림의 풍은 판화 같은 풍경화. 아직 내 색이 없는 무명화가. 하지만 곧 내 스타일이 나오면 도발적인 개인전을 할 것이다. 요즘 여행사진 관련 그림을 전시하는 문화관광부의 기획전에 동참하고 있다. 연말에는 상주·울산 2인 순회전도 준비 중이다.
골목도 훌륭한 캔버스다. 짬이 나면 곧잘 가게 앞 의자에 앉아 멍 때리기를 잘 한다. 내 뒷면에 베이스기타 잘 쳤던 죽은 내 친구와 오토바이 타고 전국을 누비는 부산 출신의 보헤미안 사진가 김홍희의 인물화가 그려져 있다. 그것만으로 골목이 쿨해졌다. 그림 한 점의 위력이다.
옆집 친구 컴퓨터 가게도 입구 분위기가 밋밋한 것 같아 고흐 얼굴을 그려 붙여주었다. 가게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예술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닌가. 그림으로 재미가 흘러넘치는 골목을 만들고 싶다. 파는 그림 못지않게 나누는 그림도 소중한 법. 담장, 길바닥 등 괜찮은 공간이 있으면 거기에 그림을 삽입해나가고 있다. 상주 그라피티(벽화) 문화를 더욱 확산시켜나가고 싶다. 시골이 쿨해야 미래가 밝다. 나는 고리타분한 시골을 모던하게 붓질해주고 싶다. 커피향도 그것에 일조하고 있는 셈.
오토바이는 내 열정의 마지막 종족이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타던 125㏄ 오토바이를 징그럽게 타고 다녔다. 사고 때문에 사경을 몇 번 헤맸다. 현재 이탈리아제 두카티(1100㏄)와 스웨덴제 허스크바나(600㏄), 출퇴근용으로 국내산 RX(125㏄)를 탄다.
오토바이는 차보다 훨씬 자유롭고 직접적이다. 점핑까지 가능해 3차원적이다. 오토바이는 계절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알려준다. 하지만 난 집단적으로 투어링하는 동호회 활동은 사절이다. 주 2~3번 2시간 남짓 야생마처럼 자연을 친견하고 온다.
2002년 간호사였던 아내와 결혼했다. 비로소 ‘착한 짐승’이 될 수 있었다. 새벽 3시 무렵 하루 일과가 끝난다. 아내와 아이가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남극 세종기지, 두바이, 전국 사찰까지 내가 볶은 커피가 나가 있으니…. 그러고도 아직 고향을 지키니 마흔한 살, 김민우 넌 그다지 후회 없지? 그럼. 내 열정이 다 발효되면 그 소유권은? 그것은 당신의 몫이겠지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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