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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NGO단체 돕기…대구서 사진전 여는 ‘미스터 지리산’ 시인 이원규

2015-07-10

“난 우리시대의 마지막 기마족…걷고 타고 국토 구석구석 안 가본 곳 없다”

20150710
지리산에서의 세월을 정리한 그의 몽유운무화 사진에는 구름과 안개가 주인공. 지리산 유유자적도 빚이라 생각한 시인은 대구에서 처음으로 지난 3년간 찍은 몽환적인 사진 20점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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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못말리는 바이크족, 35년간 15대 이상 오토바이를 교체하며 110만㎞ 이상 달렸다(이원규 시인 제공).

모두 희망으로 갈 때 시인은 ‘절망’을 자청할 것이다. 절망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리산에서 ‘탁발승’처럼 살아가는 이원규 시인(54). 18년간 지리산 빈집 7군데를 전전하며 살고 있다. ‘내 집이 없으니 오히려 지리산의 그 모든 빈집이 내 집이 되었다’고 말하는 ‘미스터 지리산’. ‘빨치산 편지’ 등 그동안 6권의 시집을 낸 그가 지난 3월 여수·하동·울산 등을 돌며 남도순회 사진전을 연데 이어 10일 대구 독립영화관 오오극장에서 NGO 단체 돕기 사진전을 연다. ‘몽유운무화(夢遊雲霧畵)’전시회 준비차 우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그가 대구에 나타난 지난 7일. 한 시절 지리산에서 까무룩하게 지냈던 그의 절절한 ‘지리산 애가(哀歌)’를 들어봤다.


오토바이 15대 이상을 바꾸며
110만㎞ 이상을 달려

안개와 운무 속 야생화에 매료
비오는 날 산꼭대기 꽃앞에
9시간 동안 쪼그리고 앉아
970장 찍어 딱 한 장 건지기도

지리산댐 백지화 위한 삼보일배
새만금갯벌살리기 등 환경운동
지금은 지리산행복학교에 간여

지리산 땅·집값 너무 많이 올라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다

▲몽유운무화란 단어가 묘한 울림을 준다. 개인전을 열 정도라면 사진에 미쳤을 것 같은데.

“지난 3년 시를 젖혀뒀다. 안개와 운무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야생화 때문이다. 몽유운무화를 찍는 게 화두였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멸종위기 및 희귀 야생화를 거의 다 찾아내 기록할 수 있었다.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의 꿈을 꾸고는 그 내용을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했다는 그 몽유도원도를 날마다 지리산 형제봉 등의 구름 속에서 직접 체험했다.”

▲운무를 머금은 야생화, 산삼만큼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장마철이 절호의 기회다. 여느 야생화는 쉽게 찍을 수 있어도 운무에 갇힌 야생화는 일정한 시기를 놓치면 다음해를 기다려야 한다. 특히 섬진강과 주변 논의 물빛이 함께 드러나는 기막힌 장면을 찍기 위해서는 하지 무렵 열흘 정도 오후 7시30분에 30분 남짓 셔터를 눌러야 된다. 산정의 구름 속에 갇혀도 이중삼중 구름의 결이 보이고 새벽 안개도 그 흐름과 농도가 수시로 바뀐다. 그 찰나에 드러나는 야생화, 한마디로 ‘신탁’이고 ‘통정’이었다. 꽃 앞에서 일주일 동안 야영하기도 했다. 우중의 산정에 쪼그려앉아 9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다. 970장 정도를 찍어 딱 한 장 건지기도 했다. 발가벗은 내 몸도 꽃이다 싶어 찍었다. 비바람 몰아치는 비포장 산길을 오르다 구르기도 하고 벼랑에서 미끄러져 갈비뼈에 금이 갔다.”

▲지리산 유람이 아니라 왠지 처절한 만행 같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구도가 아니라 ‘구생(求生)’을 위해 절벽 같은 시간이 절실했다. 그동안 한반도 남쪽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3만리를 걷고 걸어 순례하고, 나의 애마(愛馬)인 모터사이클을 타고 100만km 이상을 달렸다. 5대강을 다 걷고, 2001년부터 지리산 아랫도리 850리 둘레길을 네 번 이상 걸었다. 스스로를 가두는 텃새가 아니라 무정처의 철새가 되고 싶었다.”

◆시인이 되기 전까지

그가 처음 본 교과서 밖의 시는 세계의 문학 1호 등단자이자 25년만에 첫 시집을 내고 현재는 은퇴해 야생화와 그림에 빠져 있는 조욱현 선생의 ‘파계사’라는 시였다. 당시는 겨우 연애편지를 대필하거나 ‘오랜만에 오신 삼촌 간첩인가 살펴보자’는 식의 반공표어로 참으로 비극적인 상(?)을 받는 것이 전부였다.

문경에서 태어났다. 문경고 1학년 때 자퇴하고 백화산 만덕사에 들어갔다. 그 무렵 절간에는 읽을 만한 책이라곤 연초록 표지의 ‘세계명시 선집’. 이것을 정독했다. 1980년의 10·27 법난 때 강제 하산당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계명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 무렵 대구의 신동엽 선생이 문학 강의를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문제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쓴 이성복 시인이 임시 강사로 내려왔다. 한 학기 정도 청강할 때 절간에서 읽었던 시들이 되살아났다. 경제학 공부는 뒷전이었다. 자취방에서 쫄쫄 굶어가면서 시 비슷한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1984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과 시문학의 대학생 문예현상 모집에 처음으로 투고했는데 두 곳에서 모두 당선되었다. 당시 창비와 실천문학 등은 폐간된 상태. 뒤늦게야 덜컥 겁이 나서 당시 국문과 최미정 교수의 강의도 청강하고, 계명대 노천문학 서클과 고인이 된 여종구 시인, 그리고 김용락, 노태맹, 김진환, 박정미, 공혜경 등 청년 문사들과 장정일, 안상학 시인 등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일단 시인이기를 포기했다. 시보다 삶이 먼저였다. 휴학을 한 뒤 문경의 홍성광업소 막장 후산부로 들어가 광부로 일하며 시를 썼다. 1989년 다시 실천문학과 창비에 투고했는데, 실천문학의 사장이었던 송기원 선생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재등단이었다.

서울에서의 십년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촌놈 이라 도시는 언제나 낯설었다. 노동해방문학 창작실장, 한국작가회의(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총무간사로 일할 때는 그나마 견딜 만했다. 그러나 생계 문제와 구속을 피할 방편으로 들어간 중앙일보 기자 시절은 술 없이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다. 1997년 말 어머니가 별세한 다음날 김대중정부가 들어섰다.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어머니 장례식을 마치고 곧 바로 다니던 언론사에 사표를 냈다. 그의 나이 35세.

지금 내려놓지 못하면 일흔 넘도록 살아도 늘 그날이 그날일 것이라는 예감이 끔찍했다. 일단 3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목표였다. 사표를 내고 지방 취재 때 가보았던 지리산 어느 스님의 토굴을 거처로 삼았다.

▲지리산으로의 입성, 하지만 현실과의 이별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이와 아내를 내려놓았다. 입산 직전 서울역 노숙자로 보름 정도 보내며 환멸과 권태의 서울을 기억에서 지우는 ‘서울 하야식’을 했다. 단돈 200만원을 들고 전라선 야간열차를 타고 구례역에 도착했다. 한 스님의 빈 토굴에 자리잡고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산짐승처럼 살았다. 주먹밥을 싸서 지리산 여기저기를 들락거리며 한 달에 5만원도 쓰지 않고 견뎠다. 80만원짜리 중고 오토바이를 산 뒤 나머지 돈 120만원으로 3년을 견뎠다. 돈 없이 견뎌보니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그때부터 다시 시를 들었다.”

▲초월하면 결국 현실로 돌아온다고 했다.

“맞다. 지리산에 많은 빚을 졌으니 사회를 위해 갚고 싶었다. ‘삼보일배’의 수경 스님, 도법 스님 등과의 인연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리산댐을 백지화하고, 낙동강 1천300리 도보 순례, 지리산 850리 도보 순례 등을 시작으로 지리산에서 돌아가신 좌·우익 모두를 위한 ‘지리산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때부터 새만금갯벌, 북한산, 천성산 등 산과 강과 바다를 살리려는 환경운동에 뛰어들었다. 생명평화 탁발 순례와 삼보일배, 오체 투지, 대운하 반대 4대강 순례 등 거의 모든 순례에 총괄팀장을 맡으며 10년간 3만리를 걸었다. 이젠 지리산행복학교에 간여하고 있다.”

▲몸이 감당할 수 있던가.

“대운하 반대 4대강 3천리 순례를 마치고 난 뒤부터 급격히 몸이 망가졌다. 오래된 노숙 생활 끝에 심한 결핵성늑막염을 앓게 됐다. 순례를 마치고 지리산 집에 돌아왔는데, 어느날 밤 내가 내 몸을 뒤집지 못하는 통증이 찾아왔다. 웬만한 통증을 견디는 데는 이골이 나있었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병원을 찾아갔더니 결핵성늑막염이었다. 등 뒤에 구멍을 내고는 흉수를 빼낸 뒤부터 그 독한 약 한 줌을 먹으면 피처럼 붉은 오줌이 나와 남몰래 오줌을 누어야 했다. 언제나 건강을 자신하다가 한방 맞았다. ”

▲오토바이와 인연은.

“스무살 무렵 어머니의 땔감나무나 도탄(광산 폐석더미에서 훔쳐오는 석탄)을 실어주기 위해 시작한 산길의 라이딩이 출발이었다. 35년 동안 15대 이상의 바이크를 갈아타며 110만km 이상을 달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걷고 가장 많이 달렸다고 자부한다. 나는 언제나 우리 시대의 마지막 ‘기마족’이라 여긴다. 국도와 지방도 어디든 안 가본 곳이 없는 ‘인간 내비게이션’ 수준이다. 나는 아직까지 자동차 면허가 없다. 250㏄ 이상의 바이크를 모는 2종 소형 면허만 있다. 어찌보면 시쓰기는 내 라이딩 경력보다 한 수 아래인지도 모른다.”

20150710

▲시인에게 오토바이가 잘 어울린다고 보나.

“시인과 오토바이가 잘 안 어울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내 생각은 정반대다. 바람의 결을 온몸으로 읽어내는 탈것은 자전거와 모터사이클밖에 없다. 야영 장비를 싣고 달리면 대한민국 어디든 집이 되고 고향이 된다. 경의선 열차만 연결된다면 세계 일주를 꼭 해보고 싶다.”

▲지리산 도사를 원없이 만나봤겠다.

“‘명산에 도인 없다’는 말을 절감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지만 지리산 도인, 별것 아니다. 사실 도시의 은둔자가 더 고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지리산에서 언제 쫓겨날지 알 수가 없다. 땅값과 집값이 너무 올랐다. ‘돈 없이 행복하게 잘 놀기’가 쉽지 않아졌다. 빈집 전전하기도 어렵다. 해마다 위기를 느낀다.”

▲산에서 뭘 얻었나.

“성격도 낙천적으로 바뀌었다. 뭔가 일이 생기면 곧바로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순응한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걱정거리가 생기면 곧바로 걱정거리를 인정한다. 발버둥치지 않는다. 술값이 없으면 누군가 술을 살 때까지 기다린다. 산중에서 외로우면 외로움을 친구로 삼는다. 휴대폰도 거의 꺼놓고 산다. 예전에는 인생의 모토가 ‘자리이타(自利利他)’였다. ‘내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운 일만 하면 살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제는 확연히 달라졌다. 내게는 이로우면서 남에게는 큰 해만 되지 않으면 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정말 부지런해졌다. 새벽 안개 한 줌이 아깝고 농부처럼 봄날의 햇살 한 줌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다.”

▲ 이원규의 지리산 정신의 모토는 뭔가

“리우 정신이 담긴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이 한마디와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유마 거사의 말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환경운동과 생태주의를 넘어 생명평화 운동으로의 안착이다. 문학적인 위치적 기반 또한 지리산으로 고정해 놓고 지리산의 푸른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있다.” 문의 010-8963-0103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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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은 환경운동을 넘어 생명평화운동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대운하반대 3대강 3천리 순례 등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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