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70년 창간70년…‘위안부·강제징용 문제 해결 앞장’ 최봉태 변호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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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광복절, 최봉태 변호사가 올해 연말 개관예정인 강제위안부역사관(대구시 중구) 앞에 결연한 모습으로 서있다. 그는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창립을 주도했다. |
최 변호사는 1962년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말대로라면 집안은 넉넉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가내수공업과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어머니도 분식집을 했다. 대명초등과 경상중, 대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81학번) 졸업 후 도쿄대 법대 대학원을 마쳤다. 초등학교 때 짝이 그의 아내다.
그의 결혼식은 당시 친구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초등학교 친구인 조엽씨에 따르면 대명초등 6학년2반 교실이 예식장이었고, 주례는 담임선생님이었다. 부조금도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는 내가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봤어요. 한 동네서 살다 결혼했기 때문에 이성이라는 특별한 느낌도 없었고.”
그는 고교 시절에도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다. 그를 아는 지인에 따르면 81학년도 학력고사 대구 인문계수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법대를 간 건 그의 뜻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역사과목이 특히 재미있었어요. 역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갈 건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잖아요. 특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조항래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고등학교 친구의 아버지였는데, 찾아뵙고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을 들었어요. 사학과에 가려고 했으나 학력고사 성적이 너무 잘나왔어요.(웃음) 적성보다 성적을 보고 대학에 들어가는 시절이었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법대에 갔죠.”
80년대 초 군부독재 시절 그는 학생운동에 직접 뛰어들기보다 노동야학을 했다. “그때 당시는 분신정국이었습니다. 데모에 참여해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투철한 국가의식이 그땐 없었어요. 법학에 관심이 없어 법학 관련 책보다 역사책을 더 많이 봤습니다. 한때는 기자도 하고 싶더라고요. ‘사회의 목탁’이란 말도 괜찮았고.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중배 칼럼을 열심히 읽었죠. 출가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방황을 하다 군대에 갔죠.”
그는 강원도 포천에서 육군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그가 군생활을 하면서 단식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입대 동기였던 우석기씨의 증언이다.
“당시 부대에서 구타에 의한 총기사고가 일어났어요. 그때는 군대 안에서 구타 같은 가혹행위가 만연했잖아요. 최 변호사가 일병인가 상병인가 됐을 때입니다. 갑자기 더 이상 내무반에서 구타가 있어선 안 된다며 단식을 하더군요. 그러면서 근무도 빠지지 않았죠. 처음엔 고참과 신참들이 대수롭지않게 여겼는데 열흘을 지속하다 쓰러졌어요. 다들 반성했죠. 그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내부반에서 구타가 완전 사라졌어요. 그 이후엔 어찌됐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최 변호사는 고참이 돼도 티를 안내고 솔선수범했죠. 존경하는 친구입니다.”
그는 대학에 복학했으나 여전히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마음을 잡았다.
대구에서 고시공부를 한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 생활을 했다.
그는 91년 대구로 와서 이듬해 개업을 했다. 변호사시보 생활을 하면서 뜻이 통하는 사람을 찾았다. 당시 페놀사건이 터져 법인을 만들려고 했다. 그는 김준곤·송해익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 삼일을 만들었다.
그는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환경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자주 접촉했다. 사노맹 같은 국가보안법사건 변론도 맡았다. 그러면서 시민단체 활동도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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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태 변호사가 경상감영공원 뒤에 있는 역대 경상도관찰사비를 보며 걷고 있다. |
▲광복 70주년이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한마디로 분단시대다. 나와 분단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영원히 분단돼 살면 된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랬다. 영화 ‘암살’에서처럼 누가 광복이 될 줄 알았나 하면 안 된다. 일제강점기에 비하면 지금은 행복한 거다. 그 당시엔 어떠했나. 독립군의 가정은 쑥대밭이 됐다.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자신만 ‘등따시고 배부르게’ 살아선 역사에 죄를 짓는 거나 마찬가지다. 특히 분단시대에 정치하겠다는 사람은 칼날 위에 서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분단공고화에 죄를 짓고 있지 않나 늘 성찰해야 한다. 그건 북쪽도 마찬가지다.”
▲2003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단식을 했다고 들었다. 왜 했는가.
“일제강점기 피해자 문제 해결 관련 남북공동행사 때 평양에 갔다. 그런데 북한이 입으로는 자주적이라고 하면서 전혀 자주적이지 않았다. 남쪽 대표단을 무시했다. 같이 간 일본 측에는 벤츠를 제공하고 우리 측은 버스로 이동시켰다. 완전 ‘찬밥신세’였다. 항일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그래서 되겠나. 그래서 단식을 했다. 이게 상부에 보고가 됐던 모양이다. 같이 갔던 이용수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만류했다. 당시 남측 대표단이었던 지은희 민화협상임의장도 말렸다. 하루를 단식하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북측 기관원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악수도 안 하려고 했다.”
▲분단시대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그럼에도 북한과는 접촉을 늘려야 한다. ‘햇볕정책’이니 ‘당근과 채찍’이니 이런 말을 해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된다. 흡수통일이란 것도 환상이다. 북쪽의 자주권을 존중해야 한다. ‘주체’란 말은 좋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우상화가 돼선 안 된다.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란 게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그게 민주주의다. 기독교에서도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지 않나. 그건 존엄하다는 의미다. 북한의 슬로건이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인데 하나가 전체를 위하지 않고 있다. 사람끼리의 접촉을 통한 변화는 동아시아의 화두다. 접촉을 하면 오해가 풀리고 교류를 하게 된다. 대구와 대구시민이 통일을 선도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
역사공부 관심 가졌으나
아버지 권유로 법대 진학
군대 가선 구타근절 단식
결혼식 초등학교 교실서
축의금도 일절 받지 않아
▲평소 대구정신을 강조하는데.
“대구헌법에 기초한다. 이것 역시 대구시민의 주체의식이다.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 하고 심부름꾼이나 종이 되려 한다. 대구정신은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 정신이 그 뿌리다. 민족자주정신이다. 국가가 갚지 못하는 국채를 대구시민이 갚자는 것이었다. 둘째는 2·28민주화운동 정신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의 고등학생들이 민주주의 하자고 떨쳐 일어났는가. 그게 대구정신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분권정신이다. 분권은 대구에서 촉발됐다. 개인적으로 분권은 돈, 권력, 명예를 혼자서 독점하지 말자는 것이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권력과 명예를 탐해선 안 된다. 가치분권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난하게 살아도, 권력이 없어도 명예는 지킬 수 있다. 이런 정신이 지역과 나라를 넘어 동아시아까지 이어져야 한다. 서울에서 돈과 권력, 사람까지 다 가지려고 하는 게 수도권 집중 아닌가. 동아시아도 그렇다. 솔직히 군사·정치적으로 아시아에선 그래도 중국이다. 경제도 일본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언가. 김구 선생이 말한 대로 문화다. 한국은 문화강국이다. 그것을 나누고 공유하면 동북아시아평화란 해법이 보인다. 정치인, 종교인, 법조인, 교육자, 언론인이 솔선해야 한다. 욕망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 이들이 권력과 돈을 탐하면 그건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다. 세 가지를 다 가진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남과 비교하고 감사하지 않아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거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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