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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옛길따라 이야기따라 영남대로 .4] ‘노상추 일기’로 본 영남대로 과거길

2015-10-08

“10년째 오르는 고행길, 정월의 유유한 낙동강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

[구미 옛길따라 이야기따라 영남대로 .4] ‘노상추 일기’로 본 영남대로 과거길

영남대로는 중앙의 명령이 하달되고 지방의 민원이 올라가는 관도였다. 임지로 부임해 나아가는 관리가 걸었던 길이었고, 등짐과 봇짐을 지고 다녔던 보부상의 길이었다. 조선의 통신사들은 이 길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무엇보다 영남대로는 풍운의 꿈을 안고 걸었던 선비들의 과거길이었다.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은 영남대로의 주요 거점이었던 구미를 거쳐 길게는 보름 동안 천리길을 걸어 한양으로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과거길은 고행의 길이기도 했다. 만만치 않은 경비가 필요했고, 이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선비도 많았다. 또 각종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과거길 예행연습’에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구미 영남대로’시리즈 4편은 구미 선산 출신의 노상추라는 선비가 영남대로를 거쳐 과거길에 나선 이야기이다. 노상추는 스물여섯살부터 ‘과거길 예행연습’에 나섰고, 그때마다 각종 정보를 수집하며 시험을 준비했다. 10년 넘게 과거길에 나서면서 경비 조달에 애를 먹다가 결국에는 집안 살림이 거덜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일기를 남겼는데, 그의 일기 곳곳에서 과거길에 나선 당시 행적을 엿볼 수 있다. 노상추의 일기를 바탕으로, 1780년(정조 4) 그가 영남대로를 거쳐 과거길에 나선 여정을 되짚어 본다.


#1. 영남대로로 과거길 시작하다

[구미 옛길따라 이야기따라 영남대로 .4] ‘노상추 일기’로 본 영남대로 과거길
열일곱살부터 여든네살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썼던 노상추의 일기. 일기 곳곳에는 노상추가 영남대로를 거쳐 과거길에 나선 행적을 엿볼 수 있다. <출처: 무관 노상추의 일기와 조선후기의 삶>

다시 과거길에 오르면서 노상추는 마음을 다잡는다. 강창나루 건너 그의 마을 독동리 앞으로 난 영남대로에 한양 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이어진다. 그중에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선비들이 꽤 있어서, 한눈에 과거 보러 가는 이들임을 알아본다. 그 역시 때맞춰 과거 준비를 해왔다.


26세때 시작된 과거길 예행연습
그때마다 정보 모으며 시험 준비
구미서 한양까지 1주일 간 여정
경비 탓에 집안살림 거덜나기도


지난해에 먼저 향시를 봤다. 동생 상근이 함께했다. 동생도 형과 함께 무과에 응시하겠다고 벼른 지 오래됐지만, 처음 따라나선 것이다. 과거를 앞두고 둘은 자주 집 앞의 낙동강 모랫벌에서 힘자랑을 하곤 했다. 동생의 팔에서 유난히 근력이 느껴졌다.

향시에서는 그러나 노상추 혼자 말단에 이름을 얹었다. 이어서 대구에서 실시하는 도시(都試)에 응시했으나, 노상추는 건성으로 임했다. 넉 달 후 한양에서 치러질 정과(庭科)에 온통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게다.

1780년(정조 4), 드디어 해가 바뀌어 2월22일로 무과시험일이 잡혔다. 그의 나이도 서른다섯살이 됐다. 무과에 도전하기로 작정하고 서울행을 시작한 게 스물여섯살 때(영조 47년, 1771년)이니, 꼬박 10년을 노심초사해온 것이다. 처음으로 한양으로 가던 날이 불현듯 떠오른다.

처음에는 과거시험이 어떤 것인지 ‘간’을 보기 위해, 여러 정보들을 얻기 위해 한양행을 감행했다. 친구들이 과거길을 떠난다기에 동행했다. 노비 손돌이와 함께해서 일행은 흡사 관광길에 나선 듯했다. 종일 걸은 다음 각지에 유숙하는, 일주일가량 걸리는 노정이라 볼 게 많았다.

그렇게 시작된 과거길은 그러나 갈수록 멀기만 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무과로 행세한 집안이니, 나 역시 과거에 합격하는 게 평생의 업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특히 조부인 노계정을 존경하는 마음이 컸다. 노계정은 무과 급제 후 관직의 길로 승승장구했다.

노상추는 애초 문과를 생각했으나 무과로 마음을 바꾸었다.

노상추의 집안인 안강노씨는 노상추 이전까지는 전형적인 영남 남인의 가풍을 지닌 사족 집안이었다. 안강노씨의 선산 입향조(入鄕祖)로 알려진 고려 장흥고사 노한, 2세 경흥부사인 노인도, 3세 사헌부 집의 노호, 4세 회덕현감 노진해, 5세 첨정 노종선, 6세 사직 노소종 대까지는 별남(현 구미시 봉곡동)에 거주하다가 7세 부장 노관이 현재의 고남평이 있는 독동리의 문동으로 이거 후에 대대로 세거했다.

처음에 노상추는 족숙 노성여로부터 글을 배웠다. 그러나 집안은 가세가 기울어 있는 데다 향촌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던 때여서 할아버지에 이어 과거길이 급하기도 했다. 3대가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면 양반행세를 못한다는 당시의 사정 때문에 결국 무관으로 바꾸어 과거에 나가기로 했다. 궁핍해져 가는 경제 사정과 신분 하강의 가속이라는 현실에 대한 대응이었다.

“내 드디어 붓을 던지고 무예를 시작하기로 뜻을 정하다”라고, 그는 스물세살 되던 해 그렇게 일기에 썼다. 뜻을 이루기 위해 활쏘기 연습에 매달렸다. 친구들과 함께 무과 시험을 참관하러 한양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스물여섯살에 한양에서 구경한 과거시험은 그러나 개장한 지 며칠 만에 폐장되고 말았다. 혼란한 정치상황 때문이었다. 사도세자의 관직이 삭탈되는 등 정국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던 게다.

그후 몇 차례 정시 구경을 하면서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한양의 지인들을 방문하고, 무과 시행방법과 시행날짜 등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하여 무과에 도전하기 시작한 서른두살 때부터 매년 시험에 응했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 서른다섯의 나이로 치르는 무과시험에 대한 그의 결연한 의지는 눈물겹고도 대단할 수밖에 없다.


#2. 서른다섯에 무과급제하다

연초부터 마음이 급하다. 일찌감치 한양행을 하기로 한다. 경비조달에 애를 먹었지만, 친척에게 밭 열두 마지기를 팔아 충당한다. 일주일이 걸리는 한양 가는 길의 비용, 한양에서 유숙할 한 달간의 비용 등이 적지 않아 그 돈으로도 빠듯할 지경이다. 그래, 10년 동안 내리 과거길에 올랐으니, 과거 때문에 살림이 거덜난 거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고 그는 마음을 다진다. 그가 한양행을 일찍 서두르는 건 무엇보다 이번 시험에 대한 각종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드디어 집을 나선다. 정월 21일. 날씨는 쌀쌀하지만, 강창 나루를 건너와 북으로 올라가는 영남대로 오른편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 집에서 30리를 지나 노곡참(魯谷站)에서 말을 먹인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이내 길을 떠나 어둠이 제법 짙을 때까지 걸어 함창의 덕통참에 다다라 잠잘 곳을 찾는다. 아침에 다시 걸어 10리를 가니 함창. 진주의 곽선·곽진 형제와 의령의 조명계가 아들 석리를 데리고 합류한다. 상주 외남의 안민수도 동행에 섞인다. 다시 30리를 가서 문경의 신원참에서 말을 먹이고, 이내 20리를 내처 가서 문경읍참에서 유숙한다. 다음날(23일) 걸어서 문경새재(조령)를 넘어 연풍에 다다르니 짧은 겨울 해가 졌다. 다시 잠자리를 채비한다. 24일 충주에서 자고, 이어서 죽산과 용인을 거쳐 27일 한강에 당도한다. 서빙고 나루에서 얼음이 언 한강을 건너 숭례문으로 들어간다.

다음 달 22일 드디어 무과가 개장된다.

첫날 목전(木箭)과 철전(鐵箭)은 무난히 치른다. 그러나 다음날의 편전(片箭)과 조총은 과녁을 정통으로 맞히지 못해 불안하다. 셋째 날 경국대전 등에 대한 응강(應講)을 치른다. 드디어 25일 모화관에 합격자 방이 붙는다. 열둘째에 노상추의 이름이 보인다. 몇 번이나 눈을 씻고 방을 바라본다. 가슴에서 울컥 차올라오는 게 있다. 참으로 기다리던 소식이 아니던가. 이어서 전시(殿試)가 남아있지만, 이미 당락은 결정된 것.

그는 하인을 불러 바로 고향 선산으로 내려보낸다.

“이 소식을 얼른 집에 알리거라.”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축하객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이어서 전시는 빈궁의 가례 때문에 연기됐다가 다음 달 16일 춘당대에서 치러지고, 21일 정식으로 창방(唱榜·과거 합격자 이름을 호명하는 일)이 이루어진다. 그새 집에서는 하인 손돌을 올려 보낸다.

“도문연(到門宴·과거 합격자의 집에서 베푸는 잔치) 날짜가 잡혔습니다. 4월1일입니다”라고 손돌은 과장하여 큰 소리로 소식을 전한다.


#3. 평생 일기를 쓰다

노상추는 과거 합격 후 4년이 지나 서른아홉살에 비로소 관직을 제수 받는다. 금군(禁軍)으로 입직(入直)한 것이다. 만 40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이후 벼슬 운이 없다고 할 정도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47세 때 당상선전관이 되면서 벼슬길이 순탄하게 열려, 48세 때 삭주부사가 된다. 66세 가덕첨사를 끝으로 벼슬을 끝낸다. 이후 늘그막인 83세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는다.

노상추는 평생 일기를 쓴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가 남긴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는, 평생 일기를 써온 아버지의 명에 따라 대를 이어 쓰기 시작해 18세 되던 계축년부터 자신이 사망하는 순조(純祖) 29년(1829)까지의 일을 기록했다. 당대 조선 사회의 생활상과 시대적 변화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하석 <시인·영남일보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참고문헌=문숙자의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무관 노상추의 일기와 조선후기의 삶’
공동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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