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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③ 조영래를 말하다

2015-12-11

“조영래는 겸손한 경청의 달인…특정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 조영래! 시대를 밝힌 사람, 뿌리는 대구다

20151211
서울지방변호사회관 1층에서 조영래 변호사의 삶에 대한 기록물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서울에 이어 그의 고향인 대구에서도 전시를 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151211


측은지심을 가진
로맨티스트
그림도 잘 그렸다

▲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천지방법원 판사 재직시 조영래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서울대 법대 후배로 나이 차이는 9살. 하지만 평소 조 변호사를 존경해 조 변호사가 개인법률사무소를 낼 때 참석했다. 신 교수는 조 변호사를 비롯해 당시 정영일 판사, 홍기종 판사, 조갑제 기자 등과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고 회고한다. 그는 조영래가 ‘큰 산’이며 ‘큰바위 얼굴’ 같았다고 했다.

“산은 여러가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계절이 다 다르지요. 또 산엔 봉우리가 있고 골이 있으며 계곡과 숲, 나무가 있습니다. 조 변호사는 그런 것을 두루 다 포괄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법관으로서, 법률가로 있으면서 조영래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마음을 늘 가졌다고 했다. 그에게 조 변호사는 정신적 멘토였다.

“조 변호사님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같은 경우 중학교 3학년 때 공납금을 제때 못 내 선생님으로부터 막대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적이 있어요. 눈물이 나는데 아파서 운 게 아닙니다. 어린 마음에 돈을 안 가져 온 게 내 잘못이냐는 그런 생각이 들었죠. 조 변호사에게 이야기했더니 ‘나도 없는 집 자식으로서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고 위로를 하더군요.”

신 교수는 조 변호사가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아주 큰 인물이었죠. 가슴 깊이 인간에 대한 존중, 그게 아주 강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로맨틱했어요.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치던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가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옮겨가며 피아노를 치면 같이 따라 술자리를 옮겨서 듣곤 했습니다. 게다가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신 교수는 조 변호사가 생존해 있다면 우리 국가를 이끌어갈 최고 지도자가 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조 변호사가 타계할 당시 경주에서 대구로 통근을 했는데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안타깝고 서러워 눈물이 계속 났다고 했다.

“조 변호사 사후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충격이 컸던 거지요. 장례식에 참석 못하고 나중에 추도식 때 참석해 제 월급보다 많은 성금을 내 추모장학금에 보탠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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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감각 넘치고
한시도 잘 지어
줄담배가 건강 독

▲김선수 변호사(조영래 변호사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김선수 변호사(법무법인 시민)는 제27회 사법시험 수석합격자다. 서울 법대를 거쳐 1988년 3월 조영래 변호사가 개업한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조 변호사가 세상을 뜰 때까지 3년간 함께했다. 김 변호사는 재조·재야법조인으로부터 항상 대법관 후보로 추천되고 있는 인물이다.

“박석운 소장 소개로 박주현 변호사와 함께 조 변호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조 변호사가 저희 보고 ‘같이 근무해봅시다’고 하기에 월급 액수도 정하지 않고 ‘그럽시다’ 했지요.”

김 변호사는 조 변호사가 많은 이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고 했다. 일례로 ‘조영래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느낌이 들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는 조영래의 인품에 대해 ‘큰 소리 한번 치지 않는 사람’ ‘절대겸손한 사람’ ‘경청의 달인’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또 일을 맡길 때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변호사로서 사회개혁과 인권신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사건을 맡으면 집중력이 엄청났습니다. 엉덩이가 방바닥에 눌러 붙을 정도였지요. 체질적으로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지만 술자리는 끝까지 지켰습니다. 외국어도 무척 잘했지요. 영어는 물론 한시도 곧잘 지었습니다. 그런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어요. 보통 하루에 2갑, 칼럼을 쓸 땐 3갑까지 피웠는데 고치고, 또 고치고 했죠. 절차탁마형인데 줄담배가 건강에 독이 됐습니다.”

김 변호사는 조 변호사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되거나 편협한 가치관을 가지진 않았다고 했다. 사랑, 정의, 인권 같은 근본적인 것에 충실했다고 말했다.

“한번은 사무실 직원들과 MT를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갑자기 노래를 부르라고 하더군요. 전 노래를 워낙 못해 웬만해선 안 하는데 그때 분위기로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했습니다. 노래를 다 부르고 난 뒤 조 변호사께서 ‘노래는 역시 이렇게 독창적으로 해야 해. 틀에 박혀 따라 잘하는 것보다 김 변호사처럼 이렇게 독창적으로 하는 게 좋은 노래’라고 하며 노래 못한 저를 커버해주었지요. 유머감각도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손학규 “영래는 진실한 사람을 좋아했다”
조갑제 “남을 평할 때 욕하지 않았다”
정향아 “조영래 타임 30분…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했다”

▲조성래(동생)= “엄청난 효자였다. 한 번도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적이 없다. 불교에 심취했지만 불교인으로 볼 순 없다.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가톨릭 관계자, 개신교 인사들과도 친했다. 여러 면에서 기본적으로 형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정의로웠다.”

▲손학규(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손학규는 김근태와 더불어 서울대 운동권 3인방이었다. 셋은 경기고 동창이기도 하다.

“영래는 고등학교 때도 아주 뛰어났다. 고3 때 한일회담 반대 주도시위를 했는데 맨 앞에서 지휘를 하던 모습이 선하다. 영래는 항상 어려운 사람, 힘없는 사람 편에 섰다. 그런 사람의 딱한 처지를 보면 어떻게든지 도와주려 했다. 영래가 사람을 대할 때 소탈했지만 사실은 엄격했다. 운동권이라고 무조건 좋아하는 게 아니고 진실한 사람을 좋아했다. 이름 좀 났다고 우쭐해하고 건방져진 사람, 자기만 내세우는 사람, 독선적인 사람, 위선적인 사람에 대해선 평가가 냉혹했다. 그가 만약 살아있다면 퉁합의 리더가 됐을 거다. ”

▲박원순(서울시장)=조영래보다 9살 어리지만 사법연수원 동기로 만났다. 삶의 멘토로 조 변호사를 꼽고 있는 박 시장은 자신이 시민운동가의 길을 걸었던 동기도 그의 한마디 권유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조 변호사는 시대를 통찰하는 능력이 있다. 당시 인권이라면 주로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이란 측면에서 인권이었는데 사회적 인권이나 경제적 인권에 대해서도 눈을 떴다.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는데 조 변호사는 그걸 다 가지고 있었다. 시대에 대한 통찰력은 물론 추진력, 포용력이 있었다. 살아있다면 정치를 했을 것 같다.”

▲정영일 변호사(서울 법대 동기)=“절대 겸손에다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영래는 남의 얘기를 잘 듣는다. 진지하게 듣고 생각이 다를 땐 열심히 설득한다. 열심히 설득하고 남을 욕하거나 비방하지 않는다. 글도 참 잘 썼다. 예컨대 ‘대통령은 제1시민이다.’이런 것.”

▲천정배(국회의원)=조 변호사가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할 때 인연을 맺었다.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의 창립멤버이며 민변의 토대를 함께 닦기도 했다.

“성경에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나는 그분의 들메끈을 매기도 부족한 사람’이라 했다. 조영래가 그런 인물이다. 사람이 넉넉하고 굉장히 여유가 있다. 대인의 풍모, 느긋하고 자애롭고, 포용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시간을 잘 안 지키는 게 흠이다. 아침에 한 9시부터 나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12시쯤 나와 밤늦게까지 일하는 스타일이다. 정치인이 돼도 잘 했겠지만 현실정치만으로 조영래를 담기는 어렵다. 88년 노무현 의원이 청문회스타가 됐을 때 ‘아, 이제 우린 굉장히 좋은 대통령감을 가지게 됐다”고 하며 노 대통령에 대해 높은 평가를 했다.”

▲임도빈(서울 법대 동기)=“학생운동을 같이 했다. 1학년 때 데모하고 등산하면서 이러다 어렵게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군대에 가겠다고 말했다. 등록금도 없었고 그랬는데 조영래가 등록금을 대신 내주고 학생증도 만들어줬다. 한문 실력이 뛰어나 당대 불교계 큰스님과도 통할 정도였다. 영어도 잘했고 글 쓰는 재주가 비상했다.”

▲안경환(전 서울대 법대 교수)= “엄청난 수준의 독서가였다. 동서양 고전을 포괄한 그의 지적 탐구영역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한정되지 않았다. 많은 자연과학 고전 역시 탐독의 대상이 됐다. 조영래에게서 법과 문학의 성공적인 결합을 본다. 그의 변론문은 창의적 발상과 수사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수더분하다. 조용하고 목소리 높이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남을 평할 때 욕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할 때 화제가 많다. 노래도 잘 부른다. 특히 ‘고향’이란 노래를 잘 불렀다. 그가 살아있다면 세대, 이념, 지역, 계층갈등을 넘어 이 사회에 통합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재조와 재야를 가리지 않고 동시에 인정을 받는 사람이다. 법치주의자, 휴머니스트이며 균형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생긴 것도 둥글둥글하고 성격도 그렇다.”

▲권인숙(명지대 교수)=“놀랄 정도로 폭넓은 대인관계를 가졌다. 아는 것이 많고 생각이 앞서 있음을 가파르게 표현하지 않고 서서히 설득해가며 상대방의 생각을 교정해 나간다. 조 변호사와 대화를 하고 나면 세상일이 제자리를 찾으며 정리가 되곤 했다.”

▲정향아(조영래 변호사 전 사무원으로 7년간 같이 일함)=“첫 여직원이다. 결혼하고 출산을 했는데 당시 법률적으로 육아휴직이 한 달이었다. 하지만 나는 3개월을 쉬었고 유급이었다. 23세 때 동생을 잃고 망연자실하자 한 달을 쉬라고 했다. 그때도 유급이었다. 국수를 굉장히 좋아했다. 사무실 책상이 어지러웠다. 어느날 정리를 하다가 “나는 이렇게 어지러움 속에서 일을 해야 잘 할 수 있어”라고 했다.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다. 코리안타임이 아니라 조영래 타임 30분, 그럼에도 다른 사람은 그걸 다 이해하더라.” (조영래 추모문집 등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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