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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산소통 없이 8천800m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에 세계 산악계가 경악” ③

2016-01-01

(1977년 9월9일 오전 5시45분 고상돈에 앞서 에베레스트 정상 공격하다 250여m를 남기고 악천후로 후퇴)
■ 원로 산악인 박상열씨의 ‘알피니즘’
■ 대구! 한국 알피니즘의 메카

“산소통 없이 8천800m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에 세계 산악계가 경악” ③
2004년 계명대 에베레스트원정대가 베이스캠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른쪽 뒤에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박무택 등반대장, 김상홍 단장, 배해동 대장, 이정면·배두찬 대원, 백준호 부대장, 현지 연락관, 장민·박무원 대원, 오은선씨, 현지 요리사, 셰르파 누리. <사진제공=김상홍 계명대 석좌교수>


“산소통 없이 8천800m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에 세계 산악계가 경악” ③
원로 산악인 박상열씨

히말라야 고봉등정 18번 어시스트

네팔정부 1992년부터
등반팀 마구 받아들여
상업등반대 성행으로
에베레스트 권위 추락

높은 산만 가치 있는게 아니다
멋진 삶도 멋진 등정 못지않게 고귀


대구 출신이자 대구고 2회 출신인 산악인 박상열씨(73).

그도 그 영화를 눈시울 붉히며 감상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 가슴은 이심전심 히말라야에 있었습니다. 설산에서 사경을 헤매다 빙사한 세 후배의 심정을 저는 그 누구보다 절감합니다. 저도 비슷한 고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까요.”

그는 한국 에베레스트 등정사의 핵심 인물이다. 그에게 필생 잊지 못하는 ‘통한의 날’이 있다. 1977년 9월9일 오전 5시45분. 에베레스트 최후의 관문인 힐러리 스텝(해발 8천800m). 박씨는 정상을 불과 250여m 앞두고 악천후를 만난다. 설상가상 무산소 상태로 온밤 눈속에서 사투를 벌인다. 영화 속 빙사(氷死) 직전 박무택 대원의 처참한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침 첫 햇살이 비치자 셰르파 앙 푸르바를 부축하고 베이스캠프로 생환했다. 80㎏ 가까운 평소 체중이 55㎏으로 급감했다. 당시 세계 산악계는 경악했다. 산소통 없이 8천800m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를 해외토픽감으로 평가했다. 6천㏄가 넘는 초인적 폐활량을 가진 그였기에 가능했다. 고상돈(1979년 북미 알래스카 매킨리에서 사망)은 박씨로부터 성경과 사진을 넘겨받은 뒤 2차 공격에 나섰다. 9월15일 낮 12시50분 태극기를 정상에 꽂는다. 한국 산악사 최고의 날이었다. 하지만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된 고상돈에게 가려 박상열의 쾌거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2007년 그는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 기념 책을 펴냈다. ‘아! 사카르마타(에베레스트의 네팔어)의 여인이여’(해조음)다. 71년 한국 최초 히말라야 8천m급 로체 샤르를 원정한 그는 예전 에베레스트와 현재 에베레스트의 차이를 지적한다.

“40여년전 네팔 왕국은 봄·가을 시즌별 한 개 팀만 등정을 허가했다. 그런데 1992년부터 네팔은 가난한 국가 재정을 채우기 위해 입산료를 대폭 인상하고 등반팀도 제한 없이 마구잡이로 받아들였다. 돈만 내면 정상에 올려주는 상업등반대의 성행으로 에베레스트의 권위는 날로 추락했다. 히말라야에 다녀오지 않으면 산악인 행세를 할 수 없다는 듯 연 30여개 팀이 몰려와 북새통 에베레스트로 전락시켰다. 과학의 힘 때문에 그날 일기도 미리 알 수 있다. 정상 근처에서 정체 현상을 보이는 산악인들, 이게 현재 에베레스트의 위상이라 가슴 아프다.”

그는 원정대 등반부대장이었다. 귀국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올림픽 은메달급)을 받았다. 그해 10월14일 오후 1시30분 동대구역에 내린 뒤 K2에서 마련해준 오픈카를 타고 한일로~대구은행 본점~대구적십자병원 구간을 카퍼레이드했다. 2000년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단장이 되었다. 우연히 악몽의 밤을 지샌 셰르파 앙 푸르바와의 재회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의 체력도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알피니즘 정신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89년 대구산악연맹 초오유 원정대장, 92년 대구산악연맹 아콩카과 원정대장, 99년 대한산악연맹 칸첸중가 원정부단장 등 그동안 18번 히말라야 고봉 등정을 어시스트했지만 정작 자신은 한번도 정상을 밟지 못했다. 한때는 그게 크나큰 ‘통한’이었다. 하지만 일흔을 넘자 모든 게 초연해졌다. 그는 “정상에 오른 것보다 어쩌면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도 산을 오르는 불퇴전의 정신력이 오히려 정상 이상으로 숭고한 가치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가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영국 산악인 말로리(Mallory)의 말로 대신하겠다. ‘산은 결코 정복될 수 없다. 대신 내가 나를 정복할 따름이다.’ 높은 산만 가치 있는 게 아니다. 혈기방장할 땐 산만이 모든 것이라 여겨 가족과 직장도 버리고 산에 덤비기도 하는데 그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멋진 삶도 멋진 등정 못지 않게 고귀하다. 산은 산이고 직장은 직장이다. 균형 감각을 가질 필요도 있는 것 같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알피니즘(Alpinism)이란?

산도 아마추어와 프로가 있다. 아마추어는 하이킹·트레킹 정도에 머물고 프로 산악인은 고소증이 있는 설산 고봉을 피켈, 자일, 카라비나, 아이젠 등을 사용해 올라간다. 알프스에서 세계 등반사가 시작되므로 ‘알피니즘’이란 용어가 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난다. 영국에서 나온 등산 백과사전에는 ‘알피니즘’을 ‘눈과 얼음에 덮인 알프스 정도의 고도에서 행하는 등반’으로 풀이했다. 슈퍼 산악인은 ‘알파인스타일’을 고집한다. 이 스타일은 알프스의 등산 방식을 히말라야에 적용한 것인데 셰르파는 물론 산소통, 캠프, 고정로프 없이 올라가는 걸 일컫는다. 국제산악연맹 알파인스타일 가이드라인은 잔인할 정도다. 원정대원은 6명 이내, 등반 로프는 팀당 1~2동으로 제한, 고정 로프는 사용 못하고 다른 팀이 사용한 것도 사용할 수 없다. 루트에 대한 사전정찰도 불가하고 포터나 셰르파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심지어 산소통도 사용 금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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