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내리는 해안의 나무숲은 詩다”
암남공원 해안선과 바다의 비경. |
겨울비와 단풍낙엽이 아름다운 암남공원 갈맷길. 암남공원 두도전망대에서 본 바다의 비경. 송림공원∼암남공원 구간의 송도해상케이블카(위에서부터). |
해안과 바다는 운무에 쌓여 있다. 간간이 겨울비가 내리기도 했다. 일기예보에 전국적으로 비나 눈이 온다고 하더니만. 과연 틀림없다. 과거와 달리 이제 족집게 기상예보가 되었다. 해안은 회색빛 물안개가 피어올라 그대로 겨울 추상화다. 중년 여인의 우울증 같은 물안개는 추위와 습도 때문에 더 을씨년스럽다. 저 도시의 스모그 닮은 물안개를 따라가면 우중충한 하늘이 보이고, 그 너머에 있는 서울에는 폭설이 내렸다. 첫눈으로는 삼십 몇 년 만에 가장 많이 내렸다고 한다.
요즘 하루에도 수없이 입에 오르내리는 북악산과 청와대에도 첫눈이 내렸을 것이다. 첫눈이 내리면 놓아준다는 청와대 직원 한 사람은 그 눈이 녹기 전에 떠날 수 있을까. 첫눈은 첫사랑처럼 순결하고 시의 모국어다. 그럼에도 그렇게 속된 정치판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제 시인들의, 화가들의, 가수들의 의식에서 첫눈은 탈첫눈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첫눈은 누구에게나 사랑의 그림이고, 마음에 항상 내리면서 쌓이는 눈 나라 편지다.
그때 그 잿빛 하늘에 송도 해상케이블카가 움직인다. ‘부산 에어 크루즈’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겨울 하늘 길을 가고 있다. 송도해수욕장 동쪽 송림공원에서 여기 암남공원까지 1.62㎞ 구간을 운항한다. 암남공원 갈맷길에서 보는 케이블카는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그 물안개 짙은 바다 위 허공을 지나서, 먼 섬처럼 아련한 해안선으로 가는 하늘의 크리스털 케빈은 나의 공상을 한껏 나래 치게 한다. 아래로 들머리인 암남공원 주차장이 차츰 멀어진다. 해안선을 따라가는 암남공원 갈맷길은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율동이다.
겨울비는 내리다가 멈추고, 멈추다가 다시 내린다. 그 오전에 듣는 바다소리가 시나브로 옷이 젖는다. 갈맷길은 해양성 나무와 기암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저 안개 사이로 떠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서울에서 내리는 눈이 여기서는 비가 되어 싸락싸락 내린다. 첫눈이, 첫사랑이 비가 되어 내 눈에 고인다.
바람이 불면 바다는 슬픔 같은 건반을 치며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은 전혀 낯설지 않다. 갈매기 울음과 파도소리가 잔뜩 스민 바람은, 끓고 있는 밥물처럼 온몸을 데운다. 잠깐 햇빛이 나오기도 한다. 여우비다. 출렁다리를 지난다. 몸이 출렁거릴 때마다 내 작은 방울은 마음에서 울린다. 그 고즈넉한 절 마당에서 듣는 풍경소리에 공명하며, 울리던 내 작은 방울소리가. 간혹 목이 꽉 잠길 때마다 어둡고 깊게 울리던 내 작은 방울소리가. 나는 지금 내가 가는 곳을 알 수가 없다. 저 작은 방울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나의 의식을 회복할 수 없다. 겨울비가 내리는 해안의 나무숲은 시(詩)다. 그게 겨울의 시다.
◆포구나무 쉼터에서 후문까지
송림∼암남공원 1.62㎞ 해상케이블카
겨울비에 물안개 짙은 바다 위 가로질러
해양성 나무·기암절벽 황홀한 갈맷길
사람손길 닿지 않은 자연축제장 ‘두도’
갈매기 천국이자 평화로운 바닷새 터전
제3전망대서 비춰진 회색빛 도시 풍경
반짝 나온 햇살에 환희의 공간 펼쳐져
포구나무(일명 : 팽나무) 쉼터가 나온다. 예부터 나무꾼이나 나물 캐는 처녀, 해안의 초병들이 식수를 구하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 옛날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오던 아낙네들이 마을 고개 너머 이곳에 찾아와서 먼 바다로 떠난 남정네를 그리워하며,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며 흰색 붉은색 천을 나무에 두르고 맑은 샘물 한바가지 정화수로 올리고 기도하던 곳이다. 포구나무 의자에 앉아 원시의 숲과 바다를 본다. 여기 어느 곳엔가에서 그 옛날 기도하던 여인들의 모습을 한번 그려본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겨울비가 더 많이 추적추적 내린다. 하릴없이 우산을 쓴다. 두도전망대 이정표가 나온다. 비는 더 줄기차게 내린다. 저 주룩주룩 내리는 비 소리에서 갈매기 울음을 듣는다. 여기는 새들의 땅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을까. 두도전망대에서 바다와 두도를 본다. 여기 모지포 원주민들은 두도를 대가리 섬이라 부른다. 어감이 투박하다. 두도는 개발의 발톱이 비껴간 원시의 섬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자연의 축제장이다. 저 암남반도 남동쪽 바위섬 두도는 ‘갈매기의 천국’이다. 갈매기와 다양한 바닷새들이 터전을 이루고 평화롭게 산다. 섬 주위로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겨울비 내리고, 바위섬에는 새들이 날아오르고, 바다는 슬픔과 그리움을 몇 섬씩 지고 파도친다. 차라리 이렇게 이 두도전망대에서 영원히 서있고 싶었다.
그 겨울비가, 겨울 섬이, 겨울바다가, 회색의 갈매기 울음 모두가 슬픔이고 그리움이다. 그 내면에서 완성으로 이끌어 가는 기쁨이, 슬픔과 그리움이란 것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언젠가 때가 되면 사랑의 노래를, 당신의 목소리를 닮은 악기를 연주하겠다고 약속한 그 바닷가의 풍경이 슬픔이고 그리움이란 것을 이제서 알게 되었다. 그 누군가가 저 빗속으로 사라지듯이 서둘러 가버리는 시간의 틈으로 나도 당신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어찌 슬픔이 아니고 그리움이 아니랴. 우리가 입술이 닳도록 뱅뱅 굴리던 사랑도 오로지 관능만의 마술이 아닐까.
아무리 극적인 사랑의 신화도 비극이 없으면 의미가 없고 관객도 없다. 오늘 암남공원 갈맷길 트레킹의 시간만이라도, 그리고 함께 슬픔과 그리움에 푹 젖어 걸어보고자 한다. 두도전망대에서 돌아 나온다. 비는 하염없이 내린다. 안개가 지나간 숲은 이미 동화의 나라다.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덜 다닌 길로 걷는다. 이 길을 걸어도 다른 길과 만나게 될 것이지만. 길은 헤어지고 만나고 한다. 우리가 헤어지고 만나고 하듯이. 남동쪽 바다 해변이 나타난다. 부산환경공단 중앙사업소와 국제수산물도매시장이 보인다. 규모가 놀랍다. 그 저편으로 감천항이 보이고 아직은 해가 남았는지, 구름 사이로 붉은 햇무리가 언뜻언뜻 보인다.
어느덧 비가 그쳤다. 그 흐느끼듯이 내리던 겨울비가. 나는 네가 그렇게 빨리 그치는 것을 보고 한탄한다. 내리는 겨울비의 비애로움을 마음에 담아 집으로 가려했지만, 너의 음악은 너무나 짧아 나의 작은 방울에 악보를 미처 적을 수가 없다. 나의 평생 여행이 너처럼 짧고, 나의 오늘 트레킹은 그것보다 더 짧다. 제3전망대가 나온다. 날씨가 맑았다면 활기가 넘쳐날 부산바다의 풍경이 썰렁하고 황량하다. 비 온 뒤의 개운치 못한 도시는 회색의 풍경화를 그린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구름이 걷히면서 햇살이 비친다. 사방의 공간이 밝아지며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공간이 펼쳐진다.
이맘때쯤이면 고질병처럼 나타나는 형이상학의 술래잡기에 오니가 된다. 그리고 영혼은 사후 세계는 있는지, 우주는 왜 탄생되었고 과연 신의 솜씨인지. 영혼과 사후 세계, 신의 개념 역시 과학 실험과 증명으로는 밝힐 수가 없다. 이런 비물질적인 세계는 과학의 영역을 뛰어넘기에 실험과 증명은 무의미하다. 형이상학은 비물질인가, 반물질인가. 이제 물질의 역학구조를 이해하는데 신(神)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지만,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사랑과 지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아직 신은 절대자다. 현재 물질에 대한 과학적 해석은 거의 다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털 없는 원숭이로 지구에 출현한 인류에게 우주는 여전히 두렵고 신비스러운 곳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발달로 이제 인간은 스스로 신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이 될 수는 없다. 겨울비 직후 저 도시와 바다의 공간이 신비이듯이, 나의 우리의 마지막 신비는 비물질 방울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라는 존재일 것이다.
글=김찬일 시인·대구힐링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김석 대우여행사 이사
☞여행정보
▶트레킹 코스 : 암남공원 주차장 - 부산 갈맷길 이정표 - 출렁다리 - 암남공원 포구나무 쉼터 - 두도전망대 - 제3전망대 - 암남공원 후문
▶문의: 암남공원 (051)240 - 4538
▶내비 주소 : 부산시 서구 암남동 620-18
▶주위 볼거리 : 아미산전망대, 용두산공원, 국제시장, 송도해상케이블카, 자갈치시장, 태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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