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시인 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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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텍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14년 만에 대구로 이사온 직후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김원중 시인. 한때 대구세계문학제를 성사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고 그 후유증 등으로 인해 몸에 무리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초인 같은 의지로 병마를 극복해 이젠 혼자 걸을 수 있게 됐다. |
나는 1936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토대학교 출판부 직원이었다. 군국주의 일본 본토는 점점 전장으로 변해버렸다. 툭하면 주민을 철수시키는 ‘소개령’이 하달됐다. 일본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고향으로 가자고 했다. 가난의 악령이 감도는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로 왔다. 아버지는 내가 남후국민학교 5학년 때 채 쉰도 안된 나이로 저승으로 훌쩍 가버린다. 졸지에 어머니와 여동생 셋을 거느린 12세 소년가장이 된다. 거기서 벗어나는 데 무려 12년이 소요됐다. 내 맘은 강물 위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하지만 내 몸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생계’란 족쇄 때문이다.
공부하러 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다. 고향 검암리 대실마을에서 무릉리 학교까지 무려 12㎞. 매일 걸어다녀야만 했다. 나는 고향에서 처음으로 중학교에 진학한다. 1949년 8월 어느날, 나는 기차를 탔다. 안동농림중 입학시험 때문이다. 당시 중학교는 6년제. 농과, 임학과, 축산과 등 모두 3개과가 있었다. 나는 임학과에 찍었다. 아버지의 만년의 꿈이었던 과수원을 겨냥한 것이다.
2학년이 되자 6·25전쟁이 터진다. 우리 가족은 청도군 매전면까지 피란을 간다. 중학교에 복학할 형편도 못됐다. 대신 취직의 길을 선택한다. 친구 어머니의 주선으로 모교의 급사(사환)가 된다. 하지만 도무지 미래가 없어 대구로 가출한다. 16세였다. 대구시청 앞 구멍가게를 거쳐 신문팔이로 건너간다. 전쟁으로 중단된 학업은 4년의 공백기를 거쳐 오성중·고 야간부로 이어진다. 스무살 때였다. 난 그때 상금을 노리면서 문학적 재능을 맘껏 발휘했다. ‘소년세계’와 ‘새벽’ 등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청구대(현 영남대) 대학등록금 마련을 핑계로 ‘별과 야학’이란 시집을 낸다. 당시 교동시장 안에 있었던 대구예식장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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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오성고 야간부 시절, 처녀시집을 낼 무렵의 김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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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고학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첫째·셋째 시집. |
어머니·여동생 셋 12세 소년가장
상금 노리며 문학적 재능 맘껏 발휘
스무살 무렵 시집 ‘별과 야학’ 발표
세상물정 잘알아 문단 중심부 진출
영남詩壇 명사 행적 지근거리 관찰
경북문협 지부장 문학 멘토 박양균
자잘한 심부름 덕분 지부장 맡기도
대구 대표 박양균·김춘수·신동집
고교시절 박양균 낭송한 詩에 전율
대우 김우중·영남일보 연결 박시인
정계 입문 김춘수와 끈끈한 인연도
주당파 문인 윤장근·금동식·도광의
영남대·대구한의대·포스텍 교수
시인 삶보다 짙은 34년…터닝 준비
대구세계문학제 코앞서 좌절‘멘붕’
뇌졸중·문학의 즐거움 한몸 ‘苦樂’
◆나의 문단교류기
난 청구대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어릴 때부터 삶의 바닥을 훑고 다녔기에 세상 물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기질 탓인지 난 지역 문단의 중심부를 종횡무진 파고들 수 있었다. 백기만, 박양균, 이설주, 신동집, 김종길, 김윤식, 정석모, 박훈산 등 영남 시단 명사의 시시콜콜한 행적을 그 누구보다 리얼하게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문단의 낭만과 문단의 정치, 그 모순을 난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1962년 한국문협 경북도지부가 결성된다. 대구에서 시인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채 20명이 안되던 시절이었다. 사무실은 현재 대구콘서트하우스 자리에 있던 KG홀 공회당에 있었다. 경북문협의 중심은 단연 내 문학적 멘토였던 박양균이었다. 초대 경북지부장은 유치환이었지만 실제 조직과 운영은 부지부장인 박양균이 도맡았다. 유치환이 지부장이 된 지 얼마 안돼 대구여고에서 경남여고 교장으로 전근가는 바람에 박양균이 경북지부장이 된다. 나도 덩달아 바빠졌다. 기관지 ‘계간문예’ 편집을 맡는 등 경북문협의 자잘한 심부름은 거의 내 차지였다. 덕분인지 나도 1978~82년 경북지부장을 맡게 된다.
50~70년대 한국시문학사에 길이 남을 괄목할 만한 시인이 대구에 세 분 계셨으니 그게 바로 박양균·김춘수·신동집이다. 이를 입증하듯 셋은 80년대 들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된다. 셋은 어쩜 맞수 같으면서 적수였던 것 같다. 셋은 개성도 작품 성향도 달랐다. 박양균은 내 분신 같았다. 그의 시정신은 항상 ‘등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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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펴냈던 여러 저작물을 배경으로 소파에서 빙그레 웃으며 오후의 망중한을 만끽하고 있는 김원중 시인. |
◆나의 롤모델 …박양균 시인
55년 어느 가을밤이었다. 중구 공평동 문화예식장에서 열린 현대문학연구회 문학의 밤에 나는 고교생 신분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 난 박양균이 낭송한 시 ‘바람’의 첫 구절의 전율을 아직 잊지 못한다.
‘산짐승이거나 날짐승 더러는 죽고 멸할 것/ 바위 돌 할 것 없이/ 어울려 한 개 소리로 남는 것은/ 바람이어라 모두가 바람이어라…’
그렇게 해서 당시 대구의 고교 문학도로 구성된 문학동아리 칡넝쿨 지도시인으로 그를 모시게 된다. 박양균은 자전거를 타고 월 1번씩 경북대 사대부고, 효성여고, 원화여고 등에서 열린 합평회에 참석했다.
어느 날 동인동 박양균의 집에서 아주 무뚝뚝한 시인 한 분을 만나게 된다. 바로 경북대 영문학과 교수인 김종길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엘리어트의 명시 ‘황무지’를 번역한다. 김종길은 늘 “대구에 시인은 양균이 말고 누가 있나”란 농담을 잘 하셨다. 그럼 박양균은 “대구에 영문학자는 종길이 말고 누가 있나”라고 화답했다.
사실 영남일보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한테 건너갈 수 있게 가교역할을 한 것도 박양균이었다. 처음에는 김우중이 복간되는 영남일보 사주가 될 맘이 없었다. 김우중은 중앙지에 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박양균은 영남일보의 역사가 조선과 동아일보 다음일 정도로 최고의 지방지란 점을 강조하면서 그를 설득했다.
◆김춘수 시인과의 인연
이제는 고인이 된 김춘수. 그는 시적이면서도 일견 정치적이기도 했다. 김춘수는 해인대학(현 경남대학) 교수로 있다가 60년대 경북대 국문과로 오게 된다. 시간강사로 있던 박양균이 적임자였는데 당시 문과대학장이었던 아나키스트 철학자인 하기락이 정계에 입문한 이효상의 후임자가 된다. 하기락과 김춘수는 절친이었다. 김춘수는 80년대 초 영남대 국문과로 갔다가 정계에 입문한다. 김춘수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는 과정에 나도 가교 역할을 했다. 민정당은 유명한 시인 한 명을 꼭 영입하려 했다. 처음에는 박두진이 대상자였는데 그는 단칼에 고사해버렸다. 다음 카드는 김춘수. 나는 김춘수의 부탁을 받고 함께 민정당 실세인 권정달 사무총장을 만나러 간다. 권 총장과 나는 안동 남후국교 동기였다. 이후 82년 김춘수 회갑기념논문집도 내가 맡아서 간행할 정도로 그와의 인연은 끈끈했다.
동아백화점 근처에 있었던 다방 무랑루즈, 본영당 서점 옆에 있었던 왕비다방, 나중에는 다방보다 은정·무림·행복 등 주점을 거점으로 주당파 시인들이 몰려다녔다. 죽순문학회 회장을 맡았고 일제강점기 숱한 스토리를 머릿속에 가득 담고 있었던 수집가 유전자가 짙은 소설가 윤장근, 그리고 가족과의 오순도순한 행복을 거부한 채 죽을 때까지 술을 버리지 않고 고독하게 살다간 취석 금동식 시인의 광기와 해학의 나날을 이제는 더 이상 다른 문인한테서 발견하기 어렵다. 한 명 더 거론하자면 목이 유달리 긴 도광의 시인 정도가 그시절 낭만문단시대의 마지막 증인으로 지금도 올곧게 술판을 누비고 있다.
반세기 이상 목격해 온 대구의 문단이면사. 웃음 묻어나는 그 내용들은 2009년 묶여 ‘기인이 그리운 세상’이란 부제가 달린 ‘사람을 찾습니다’란 산문집으로 출간된다. 덕분에 4년전 ‘영남인물문학사’까지 출간할 수 있었다. 장사현 시인이 ‘영남문학’을 창간할 때 연재 제의를 해서 21명의 불세출한 문인의 삶을 정리할 수 있었다.
◆회한의 대구세계문학제
내 삶은 시인보다는 교수로서의 삶이 더 짙었다. 영남대에서 15년, 대구한의대에서 5년, 87년부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로 14년을 보낸 뒤 정년퇴임하고 대구로 돌아왔다. 시인으로의 터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채 1년도 안 돼 나는 뇌졸중에 걸린다. 2002년이었다.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가려고 넥타이를 매다가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퇴임 후 대구로 오자마자 나는 대구은행 북성로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대구세계문학제 발기추진위원장으로 종횡무진했다. 고령 가야대학교 문예창작과 수업에도 매달렸다. ‘고락(苦樂)’이라 했던가. 즐거움은 고통과 한몸인 모양이다. 다된 줄 알았던 세계문학제는 모 대구시장의 반대로 물건너 가버렸다. 난 멘붕이었다.
예전 문협 시절 내게는 남다른 추진력이 있었다. 경북지부 차원에서 지방 문협으로는 처음으로 자체 문학상도 제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학상은 서울의 몫이었다. 기관지 ‘달구문학’도 창간했다. 김동리 이사장에게 “왜 지방 문인은 문협 임원이 될 수 없냐”고 따졌다. 덕분에 나는 지방 회원으로는 처음으로 문협 감사도 될 수 있었다.
병원에서 해를 넘겼고 이어 휠체어생활로 이어졌다. 반신불수로 망가진 왼쪽 팔다리는 회복기미가 없었다. 침도 많이 맞았다. 그런 어느 날 행운의 ‘복병’을 만난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온 며느리와 손자였다. 며느리가 대뜸 “아버님, 왜 휠체어만 타고 다니십니까? 오늘부터 걸어보세요. 붙잡아 드릴 게요!” 그러면서 지팡이를 내 손에 쥐어주는 게 아닌가. 쓰러진 지 3개월 만이었다. 첫날은 10m도 못 걸었다. 한달 후 나는 아파트를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이젠 지팡이만 있으면 문제없다. 서울 출장도 다녀올 수 있다.
매주 월요일 반월당 적십자병원 뒤에 있는 한비문예창작대학에서 문학강의를 한다. 10년째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을 달콤하게 걸어서 올라간다. ‘어둑한 김원중의 한 가닥’이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빙그레 웃음 짓는다. 나는 삶의 본질이 뭔가를 놓고 젊은시절 참으로 많은 철학서적을 탐독했다. 결국 답이 안 보였다. 그런데 얼마전 알게 됐다. 부산의 한 문학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동대구역에서 무궁화 열차를 탔다. 밀양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한 아낙네가 계란을 팔며 촌철살인의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 “삶은 달걀이요~”. 나는 번쩍 무릎을 쳤다. 지금도 삶은 달걀이라 믿으며 매일 웃으며 걷고 그 정한 몸으로 한 손으로 책을 읽고 있다.
그래, 삶은 ‘무병장수’가 아니지. ‘일병장수(一病長壽)’라야 제격 아닐까. 내가 자문자답하자 비뚤거리는 내 걸음을 다림질해주던 아내(이옥희)가 여린 제비꽃처럼 보랏빛으로 웃는다. 아내도 나처럼 시인이다. 결혼한 지 50년. 늘그막에 나를 원고지라 생각하며 빈칸을 채워나간다. 비로소 김원중이라는 병(病) 하나가 문학강(文學江)에서 별로 피어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삶은 고락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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