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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36] 적나라함의 너머를 향하여

2020-05-21

무엇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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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와 '만세전' 등으로 유명한 염상섭은 돈과 성욕의 문제로 사람살이의 복잡함과 유구함을 잘 그려낸 작가인데 정작 연애다운 연애를 그린 적은 거의 없다. 낭만적 사랑 같은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일 터인데 그래도 사랑 이야기를 굳이 찾아보자면, '삼대'(1931년)에서 조상훈과 홍경애가 인연을 맺는 부분이 눈에 띈다. 조상훈은 파락호로 전락한 인물인데, 홍경애를 처음 만날 때는 그렇지 않았다. 계몽운동을 펴는 지식인이자 교회의 유력 인사로서, 홍경애의 부친이 죽자 장례를 치러 주고 남은 모녀를 보살펴 주는 신사였다. 그런 그가 자신도 모르게 자라난 사랑의 감정 때문에 괴로워한다.

경애를 마주하기도 괴로워 병을 핑계로 학교를 쉬다, 병문안을 온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그는 끝내 심정의 한 자락을 내비친다. "남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 사십이나 된 놈이 나이 아깝다고 욕을 할지 모르지만 아직 이십 때의 생각 - 내 자식 보기가 부끄럽고 경애 양에게 눈치를 보일까 봐 부끄러운 그러한 십 년 전 이십 년 전의 정열과 얼마나 싸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오"(글누림, 2008, 112쪽)라고 말이다. 이후 그는 말을 바꾸어 곧 결혼을 하라고 경애에게 권하면서도 그녀의 손을 잡고 만다. 그러고는 "별안간 손이 으스러질 듯이 꽉 쥐었다가 탁 놓으며 노한 사람처럼, '가우! 가 -' 하고 돌아서 가버린다"(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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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닥터 지바고' '안나 카레니나'
주인공 연애과정 직접 묘사는 생략
인물 사이 관계와 인생 서사에 관심

세상 떠들썩하게 만든 'n번방' 사건
무차별적 보여주기 문화 기승도 요인
고전이 보인 '가림의 문화' 회복 필요




이것이 전부다. 딸뻘 되는 젊은 여성에게 끌리는 마음과 아내와 자식이 있는 신사요 지식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 의식 사이에서 그가 했을 고민도, 끝내 그들 사이에 아이가 생기게 되기까지의 연애 혹은 불륜의 과정도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그러한 묘사는 건너뛴 채 인물 사이의 관계만 알려 줄 뿐이다.

'삼대'가 보이는 이러한 처리 방식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기 전에 한 가지 예를 더 들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1957년)다. 모두 아는 대로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은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인데, 이들의 관계가 급전되는 과정에 대한 기술 또한 직접적인 묘사는 전혀 없이 처리된다. "시내에 갔다가 어느 날 저녁 무렵 집에 돌아가지 않고 라리사 표도로브나의 집에 머무른 다음 집에는 볼일 때문에 시내에서 지체되어 삼데뱌토프 집의 여관에서 밤을 보냈다고 말한 후로 두 달여가 지났다. (중략) 유리 안드레예비치는 토냐를 속이고 훨씬 더 심각한, 용납되지 않는 일을 숨겼다"(민음사, 2019, 2권 100쪽). 이게 다다.

지바고와 라라 두 사람의 이전 관계가 어떠했는지 또한 단 한 장면에서 확인될 뿐이다. 멜류제예프에서 둘이 함께한 의료 활동이 끝나갈 무렵 지바고가 자신의 감정을 에둘러 고백한 데 대해, 그렇게 될까 봐 항상 두려웠다며 그러면 안 된다고 라라가 거절하는 대화의 묘사가 전부이다(1권 271쪽). 이 장면 이전에 둘이 서로에 대해 느꼈을 감정이나 고민 등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다.

이렇게 '삼대'와 '닥터 지바고'는 주인공들의 연애 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생략하는 특징을 보인다. 소설의 기술에 있어 건너뛰기 혹은 가리기라 할 만한 이러한 특징의 이유로 그들의 연애가 사회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불륜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들 소설의 배경인 1920년대 상황을 기준으로 보면 당시 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이라 할 수 없을 듯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소설이 연애 과정의 묘사를 보이지 않는 것은 작가의 관심사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사랑을 그리되 육체의 욕망이 질주하는 양상은 건너뛰고 가리는 이러한 작가적 태도의 바탕에는, 공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가 분명하고 연애의 구체적인 경과란 후자에 속한다는 문화의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두고 20세기의 소설이 다 그렇다고 일반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대부분의 고전적인 연애소설들 또한 그러했다는 점만큼은 지적해 둘 만하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년)이나 '파우스트'(1831년)도 그러하고 투르게네프의 '첫사랑'(1860년)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1877년) 또한 다르지 않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인 문예비평가 게오르그 루카치는 '서사냐 묘사냐'(1936년)라는 글에서, 세부 묘사가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운명의 변화에 대한 서사야말로 훌륭한 소설의 특징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강물처럼 흐르는 인생의 서사에 관심을 두고 순간순간의 세세한 일상은 개인의 사적 세계로 남겨 두는 이러한 문화 풍토가 아쉽고 그립다. 우리 사회가 그로부터 너무 멀어져서 사람살이의 거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시각화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n번방' 사건 때문에 든 생각이다. 범죄 자체의 놀라움에 더해서 '박사'니 '갓갓'이니 하는 용의자들이 불과 20대 전반의 청년들이라는 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무엇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그들 개개인의 성향이나 처지, 환경 등을 접어 두고 사회 문화 차원의 요인을 찾아볼 때, 시각 문화의 무제한적인 확산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을 열면 누구나 쉽게 성인물, 음란물, 폭력물을 볼 수 있는 상황 말이다.

자극적인 시각 문화의 확산은 사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시민들의 소비를 끌어내는 상품 판매 경쟁이 격화되었는데, 이때 일반화된 것이 바로 상품 진열장들이 죽 늘어선 아케이드요 백화점이다. 19세기 중반 제2제정기의 파리가 대표적인 예가 되는 소비 공간으로서의 대도시가 이렇게 생겨났다. 쇼윈도와 광고 조명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란하게 하는 이러한 양상은 전 세계 모든 도시로 퍼져 나갔고, 이 위에 20세기의 초와 말에 각각 영화와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비단 경제 분야에서가 아니라 문화 전반에서 시각적인 것이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래 상황은 더욱 심하다. TV 연예물이나 SNS, 유튜브 같은 각종 플랫폼을 통해 관음증을 자극하는 보여 주기 문화가 크게 유행하면서,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데 있어서 아무런 제한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적나라함과 비속함을 거리끼지 않는 무차별적인 보여 주기 문화가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다.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이 피해자가 되는 첫걸음이 자신의 사진을 과시하는 것이었다는 지적도 이 면에서 우리의 주의를 끈다. 시각적 자극으로 타인의 관심을 끄는 것이 일상이 된 사회가 'n번방' 사건의 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는 지켜져야 하지만 문화의 저속화가 질주하는 상황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거리끼지 않아 하는 문화의 풍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사진을 꾸며서 올리고 성형까지도 마다 않는 문화의 일상화, 이 두 가지가 얽혀 한층 가속화된 시각 문화의 독재에 저항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전들이 보인 건너뛰기 혹은 가리기의 자세를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경제 논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상황을 거부함과 더불어, 보는 문화의 홍수 속에 읽는 문화를 다시 세우고 대중문화의 적나라함에 맞서 인문교양이 주는 가림의 문화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학부장·문명시민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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