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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혜〈대구문학관 학예연구원〉 |
정비석은 6·25전쟁 시기 대구로 피란하여 종군문인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작가 가운데 하나다. '색지풍경' '여성전선' 등의 소설집을 대구에서 출판한 것은 물론 육군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한 바 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에 정비석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결정적인 작품을 서울신문에 연재하게 된다. 바로 '자유부인'이다.
'자유부인'은 대학교수의 아내이자 가정주부인 오선영이 대학 동기 최윤주의 소개로 양품점에 취직하게 되면서 화려한 생활에 빠져들고 남편 외의 다른 남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퇴폐나 문란 풍조에 대해 엄격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춤바람이 나고 외도를 저지르는 이 작품의 내용은 충격적이었고, 때문에 정비석은 잦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황산덕으로부터 '자유부인'이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 비난을 들었으며, 일부 장면은 문제가 되어 연재 지면에 사과문을 게재해야만 했다.
그러나 '자유부인'은 부패와 부정, 부도덕이 판치는 1954년 전후의 한국사회를 진솔하게 담은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일종의 '풍기 문란한 작품'으로서 압박했던 당시의 평가는 정비석 작가에게는 다분히 억울한 것이었을 것이다. '자유부인'에 대한 악평은 부패와 무능을 특권으로써 덮고자 했던 당대 정치 권력의 의도에 어느 정도 기댄 바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평론의 필요성이 있다. 논거를 통해 이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규명하는 목소리가 충분했다면, '자유부인'과 정비석은 그 나름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평론은 '표현의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기 위해 필요하기도 하다. 흔히 예술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예술의 이름 아래 모든 행위가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늘날의 예술은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어 있어 무엇을 예술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무엇이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자유와 방종을 구분해 줄 것인가.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에 평론의 역할은 더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적어도 평론은 예술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이기 때문에.
윤지혜〈대구문학관 학예연구원〉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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