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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마음, 아장아장

2020-09-23

이하미
이하미 〈연출가〉

최근 방어기제 파악 수업을 들었다. 방어기제란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심리적 방법이다. 내가 스트레스 상황에서 주로 사용하는 기제는 무엇인지 객관적인 지표로 파악하는 수업이었다. 도중 어쩌다 보니 내가 '막막하던 시절에 많이 걸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굉장히 반기시면서, 걷는 것이 아주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이며 몸과 마음의 정렬을 맞춰가는 행동의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나는 과거의 나 자신 중 꽤 여럿을 용서할 수 있었다.

스물여덟에 이런 말이 민망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시절이 몇 번 있었다. 그런 시절은 대개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고처럼 찾아왔다. 수능 직후 겨울부터, 번아웃으로 첫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코로나로 상반기 공연이 모두 연기돼 하루아침에 날 백수가 되었을 때까지 생각이 쭉 흘렀다. 처음은 겨울 내내 집에 누워만 있었고, 시간이 흘러 신천 강가에서 물비늘을 하염없이 구경했고, 최근은 아무 라디오나 들으며 집 앞 공원을 뱅뱅 걸었다. 나는 늘 그 시절들을 실패의 시절이라고 규정지었다. 자기발전으로 채워도 모자랄 시간을 우울함에 허송세월로 보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절마다 나의 모습이 달랐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좌절을 어떻게든 대면하고 이겨내려는 몸부림이 차차 발전해왔다는 사실이 놀랍고, 안쓰럽고, 예뻤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사가 생각났다.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은 최악이 아니다.…(중략) 불어라 실체 없는 바람아, 내 너를 끌어안겠다."

'리어왕' 4막1장의 구절이다. 백작 집안의 장자였으나 동생의 모함으로 모든 것을 잃고 미치광이 걸인으로 전락한 '에드거'가 운명에게 외치는 대사다. 작중 내내 '에드거'는 고통에 몸부림칠지언정 '마음의 빛'을 절대 놓지 않는다. 바람아 불어보라고, 버틸 뿐 아니라 끌어안겠다고. 나는 그만큼 거창할 필요는 없지만, 그토록 단단히 설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언젠가는 가져보고 싶기도 하다.

시간은 많으니 찬찬히 자라고자 생각해 본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내 마음에 말도 걸어본다. 바람을 끌어안을 필요는 없다고, 실체 없는 바람에 흔들렸을지언정 뿌리 뽑히지 않았음에 감사하다고. 또한 지나보면 실패의 시절이 아니라 아주아주 느린 호시절이었을지 모른다고.

이하미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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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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