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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미〈연출가〉 |
얼마 전 공원을 걷다가 산책로 한가운데서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뒤이어 오던 행인이 밟을 뻔한 것을 제지하고 얼른 풀숲으로 옮겨주었다. 공원에는 주인과 산책하는 강아지들도 많았다. 문득 모든 생명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달팽이를 살리고는 뿌듯해했지만 만약 강아지를 살렸다면 뛸 듯이 기뻐했을 것이다. 이 지점이 문득 불편해졌다.
"초파리와 인간의 유전자는 5분의 3 일치한다."
'죽고 싶지 않아'라는 작품의 대사다. 충격적인 대사일지도 모르지만, 인간과 유인원의 유전자가 97%가량, 실험용 흰쥐의 유전자가 90%가량 비슷하니 초파리가 60% 일치한다는 점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리고 아마도 누군가에게 초파리와 흰쥐 중에 무엇을 살릴지 정하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쥐를 살릴 것이다. 흰쥐와 유인원 중에선 유인원을 살릴 것이다. 마치 내가 달팽이보다는 강아지를 더 귀하게 여기듯이.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할 수 있다. 내가 어떤 가치를 매기느냐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가치판단을 하는 기저에 깔린 아주 큰 기준의 하나가 '나와 얼마나 유사하게 느껴지느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아주 중요한 가치를 판단하는 기저에 인간인데도 어떤 도덕이나 철학보다는, '나라는 종에 가까울수록 살린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감각이 새로우면서도 '사람이 뭔가'하는 허탈감이 함께 들었다.
코로나라는 링거를 맞고 혼수상태에서 겨우 깨어난 지구에게, 병문안 온 북극곰과 바다거북이 "이제 좀 정신이 들어"라고 묻는 한 컷 만화를 본 적 있다. 다른 종들과의 공존은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였고,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의도치 않게 생태계가 회복되면서 공존이 아직은 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이 지속 가능하려면 인간 또한 유전자로 이뤄진 유기체에 불과하고, 아직도 본능을 기저에 깔고 사는 동물이란 점을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적'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보통 정의롭고 따뜻한 정서를 가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가장 비인간적이란 명제 또한 진실이다. '인간적'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표상인지, 모순적인 관념인지 되짚어볼 때가 되었다. 그 생각을 끝마칠 즈음에는 우린 더 이상 인간적일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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