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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연〈작곡가〉 |
몇 해 전 일이다. 길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우연히 한 모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엄마가 뭔가를 유심히 관찰하는 딸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걸음을 재촉하는 듯했다. 시계와 딸을 교대로 쳐다보던 엄마는 아이가 말을 듣지 않자 결국 아이를 덥석 안고 건널목을 지나며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녀가 자리를 뜬 후 꼬마가 무엇을 관찰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그들이 서 있던 자리로 가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 막 자라고 있는 꽃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래 봤자 5분인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이만의 세상을 배려하지 못한 어른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필자도 아이를 키울 때 내 시간과 시선에 모든 것을 맞추고 살았다. 이처럼 어른들은 자신의 생업에 바빠 아이의 시선과 시간을 기다려 주지 못하고 "빨리빨리"라는 단어를 입에 붙이고 산다.
현대인들은 초고속 인터넷, 고속철, 심지어 음식도 패스트푸드(fastfood)라는 빠른 것을 선호한다. 많은 사람들은 빠름이라는 속도의 병을 앓고 있고 이 '속도앓이'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극심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빠른 속도를 감지하지 못해 옳고 그른 길에 대한 판단력도 상실한다.
무궁화호 열차는 고속철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차창 밖의 풍경에 눈길을 줄 수 있고 생각과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이처럼 느림은 우리에게 평화로움과 정서적 안정감, 그리고 삶의 여유로 풍요로움을 안겨주기에 어쩌면 느림의 속도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빠름의 가속력을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그 하나의 예가 모두가 익숙히 알고 있는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의 속도경쟁이 아닐까 한다.
음악의 빠르기를 나타내는 지시어 중 '매우 느리며 장중하게'라는 뜻을 가진 그라베(Grave)가 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8번 '비창' 1악장의 서주는 무게 있는 선율이 장엄하며, 느린 속도의 그라베를 만나 곡의 진중한 카리스마를 표현한다. 서주에 이어 전개되는 알레그로(Allegro)의 빠른 속도는 긴장과 감정을 고조시키고 도전적인 느낌을 가져다주는데, 이는 그라베의 전개가 빠른 속도의 변화로 음악의 맛을 더욱 조화롭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빠름과 느림의 적절한 조화가 음악에도 담겨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속도가 적용되어야 한다. '느리게 가는 사람은 확실히 가고, 확실히 가는 사람은 멀리까지 간다'라는 이탈리아 속담처럼 매우 빠른 프레스토(Presto)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 번씩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매우 느리며 장중한 그라베의 속도가 필요하다.
이정연〈작곡가〉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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