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11031010003887

영남일보TV

[인재향 영양 .9] 남자현 지사…독립단체 분열되자 혈서로 단결 호소한 '독립군의 어머니'

2021-11-02

2021103101000927800038871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자리한 남자현지사 생가. 남자현은 11살 때부터 결혼 전까지 이 집에서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생가는 1999년에 영양군과 남자현의 후손들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석보로 가는 길은 온통 산과 들이다. 외로운 집 하나, 작물들을 위한 창고 두어 개가 들 가운데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석보면 면경계판을 지나자 길 양쪽 멀리 자그마한 솔숲들이 높아 처연하다. 옛날에는 아주 무성히 한데 모여 마을 길을 감싸고 있지 않았을까. 곧 자연석에 검게 새겨진 지경리 표지석이 나타나고, 이어 '남자현지사 생가' 안내판이 보인다. 집들이 한결 촘촘히 들어서 있는 작은 촌락의 끝에 솟을대문 높은 남자현 지사의 집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지사(志士)'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때때로 단어가 가진 울림이 매우 불만족스러울 때가 있지만 어떠한 대안도 없음을 안다. 그녀를 향하여, 함께 싸웠던 동지들은 이렇게 불렀다.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친정아버지와 남편도 의병활동
3·1만세운동후 만주서 독립투쟁
군자금 모금·애국계몽 열정쏟아

국제사회에 조선독립의지 전하려
왼손 무명지 절단후 혈서썼지만
결국 日경찰에 발각돼 접촉 실패

부토 만주대사 암살시도하다 체포
혹독한 고문에 생명 위태롭자 보석
임종때도 '독립 염원' 만주벌 여걸



#1. 남자현

남자현(南慈賢)은 1872년 12월7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정대부 수회(守晦) 남정한(南珽漢)이고, 어머니는 진성이씨 이원준(李元俊)의 딸이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안동 일직면 송리에서 세거했는데, 1883년경 아버지 남정한이 이곳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로 이주해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현재의 생가는 1999년에 영양군과 남자현의 후손들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남자현은 11세때부터 혼인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여겨진다. 그녀는 7세 때 한글을 깨쳤고 8세 때부터 한문을 배웠다. 12세에 소학과 대학을 읽었으며 14세에는 사서(四書)를 읽고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19세에 아버지의 제자인 김영주(金永周)와 혼인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남자현의 아버지 남정한의 지도 아래 그의 제자 70여명이 모두 의병으로 나가 싸웠다. 남편 김영주가 그들을 이끌었으며 남자현은 뒤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의병들을 지원했다. 1896년 7월11일 김영주가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그녀의 나이는 24세였고 배 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남편상을 치른 후 그녀는 당시 수비면 계리에 있던 친정집에서 아들 영달(英達, 성삼·선달이라고도 한다)을 낳았고, 아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친정에 머물다 1905년경 분가했다.

길쌈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나갔으나 시부모 봉양에 극진해 효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여 년이 지났을 즈음 시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2021103101000927800038872
생가 옆에 있는 남자현 지사 동상.

#2. 독립군의 어머니

시부모의 삼년상을 마친 남자현은 만주 망명을 결심한다. 이미 아버지의 제자 상당수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말 47세의 남자현은 남대문에 사는 김모 부인의 비밀편지를 받고 서울로 올라갔다. 김모 부인과 남자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여성동지'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남편의 사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서울에서 남자현은 동지들과 비밀회의를 열어 '기미독립선언서'를 준비했고, 3월1일 오후 3시 독립선언문을 배포했다. 그리고 태극기를 들고 보신각까지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후 남자현은 김모 부인에게 소개받은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녀는 죽은 남편의 피 적삼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만주에서 남자현은 김동삼이 참모장으로 있던 서로군정서에 입단해 백서농장에서 일하며 군자금과 양식을 마련했다.그리고 아들을 서로군정서 산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켰다.

1920년 이후 만주지역 독립운동에서 최대 걸림돌은 우리 민족끼리의 파벌싸움이었다. 만세운동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는 동포들이 증가했고 독립단체 또한 늘어나면서 단체 간 충돌이 잦아졌다. 1920년 8월29일 국치기념대회 날 남자현은 1천여명이 참석한 대회장에서 왼쪽 엄지를 잘랐다. 그리고 독립투쟁의 당위성과 독립운동 진영의 내부분열을 질타하는 혈서로 청중에게 호소하자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고 오열했다고 한다. 그해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10여 차례에 걸친 격전 끝에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전투가 벌어진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의 교관들과 생도들이 참여해 대활약을 하였고, 남자현은 전선에서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동지들은 그녀를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렀다.

#3. 손가락을 자르며

이후 남자현은 교육에 집중해 1921년에는 만주의 액목·화전·반석 등지에 여성독립군인 여의군을 양성하기 위한 20개가 넘는 여성교육기관을 세웠다. 같은 해 삼송육도구(杉松六道溝) 전투 때는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1922년에는 한족회,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이 연합한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었지만 이러한 통합의 노력에도 동포 간의 갈등은 여전했다. 결국 독립군 간의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고 이 소식을 들은 남자현은 산속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며 검지를 잘라 독립운동계의 단결을 호소하는 혈서를 썼다. 혈서를 본 사람들은 잘못을 뉘우치며 화합을 다짐하는 합의문을 발표한다. 갈등에서 벗어나게 된 지역 동포들은 곳곳에 목비를 세워 그녀의 공덕을 기렸다. 이로써 그녀의 이름은 만주의 조선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모두가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25년에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였지만 일경의 감시로 실패하고 만다. 이듬해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좌우익 연합 유일당 운동에도 남자현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7년 신민회가 출범되고 국내의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을 만주지역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안창호가 지린성을 방문했을 때 남자현도 중앙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때 일본의 압박으로 독립지도자 47명이 지린성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남자현을 포함한 국내외의 여러 석방운동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특별조사단이 하얼빈에 파견되었다. 이때 김동삼, 남자현, 이원일은 항일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파악한 일경에게 김동삼과 이원일이 체포되었다. 아슬아슬하게 검거를 피했던 남자현은 수배를 받는 중에도 김동성을 면회하며 그의 지령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녀는 김동삼의 마지막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국제연맹 특별조사단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 2절을 자르고 그 피로 흰 천에 '조선의 독립을 원함(朝鮮獨立願)'이라고 쓰고 절단한 무명지와 함께 옥양목에 쌌다. 그것을 특별조사단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뺏기고 말았다. 그녀의 왼손에는 엄지, 검지, 무명지가 없다.

#4. 독립의 날을 위한 200원

1933년 남자현은 동지들과 함께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일인 3월1일에 주 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를 암살하기로 계획한다. 앞서 2월22일 암살단 동지들은 무송사진관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2월27일 남편의 피적삼 위에 거지 복장을 걸친 그녀는 몸속에 권총과 폭탄을 숨기고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조선인 첩자 이종현의 밀고로 일경에게 알려졌고, 남자현은 하얼빈을 지나던 중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는 6개월 동안 날마다 모진 고문을 하며 고급정보를 캐려 했다. 남자현은 일체의 진술을 거부했고, 8월6일부터 14일 동안 일제의 음식을 거부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혹독한 고문으로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일제는 황급히 보석을 허가하고 적십자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남자현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인 여관으로 옮겨진 날 남자현은 아들에게 중국 돈 249원 80전을 주면서 "이 돈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정부에 독립 축하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손자를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라. 남은 돈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의 학자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종손을 찾아 공부시켜라"고 했다. 그리고 손자에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잘 테니 깨우지 말라"하고 눈을 감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1933년 8월22일이었다.

그녀는 하얼빈지역 동포들과 중국인 지인들에 의해 남강외인(南崗外人) 묘지(현재 하얼빈 문화공원 내 러시아정교회 건물)에 안장되었다.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 그녀가 남긴 독립 축하금 200원이 김구와 이승만에게 전달되었다. 시간이 흘러 1962년 3월1일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남자현 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석보면 지경리 그녀의 집 옆에는 항일순국비와 동상, 추모각이 세워져 있다. 추모각에 놓인 그녀의 흑백 영정이 우리를 본다. 방명록에는 수많은 짧은 글이 적혀 있다. '그 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늘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남자현의 독립운동 전사-이주와 행적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8집, 2019. 디지털 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yeongnam/public_html/mobile/view.php on line 399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 인기기사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