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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향 영양 .14] 금경연 화백…교사생활하면서 예술혼 발휘…한국 서양화단의 1세대 선각자

20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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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군 수비면 발리리 금촌마을에 자리한 '금경연화백예술기념관'에는 조선미전 수상 도록과 유화, 수채화, 연필소묘 등이 전시돼 있다. 또 대구사범학교 시절의 사진과 유품 등 500여 점을 볼 수 있다.

영양의 북동 끝인 수비면은 해발 600m가 넘는 산들이 대다수인 산간벽지다. 그 중심이자 첫 마을은 발리리로 발(發)은 시작을 뜻한다. 발리리의 중심은 금촌마을이다. 300여 년간 봉화금씨(奉化琴氏)가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다. 마을 초입의 발리천변에는 빼어난 소나무 동산이 펼쳐져 있는데, 천 건너 동네가 내다보이는 자리에 조선 순조 때의 학자 약천(藥泉) 금희성(琴熙星)의 약천정(藥泉亭)이 자리한다. 현판은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이 21세 때 쓴 친필이다. 동산의 양지에는 커다란 기념비가 우뚝하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교육자이자 화가였던 봉화금씨 금경연(琴經淵) 화백을 추모하는 비다.

#1. 금경연

금경연은 1915년 6월15일 발리리 금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약천 금희성의 5세손으로 어머니는 전의이(全義李)라는 기록이 있으며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발리리는 지금도 작은 마을이지만 20세기 초에는 영양군 내 타 읍면의 소재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금경연은 1928년 마을 명륜당에 입학해 한학을 배웠는데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다고 전한다. 이후 1930년 16㎞ 거리에 있는 영양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했고 1932년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로의 진학은 어려웠지만 그의 재능과 영특함을 알아본 일본인 교사 다카미 쇼헤이(高見昇平)의 도움으로 그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당시 대구사범은 전국 각지에서 최고의 수재가 모이는 학교로 면내 소학교 전체에서 1·2등을 해야만 입학할 수 있었다.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영양 출신은 금경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당시 영양군수의 관용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벌일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강압적인 헌병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했고 예술가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미술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22년 충독부가 개설한 '조선미술전람회'(관전)는 식민지 조선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전시·홍보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 되었다. 광복 이전 경북 화단의 발아기를 책임졌던 국내파 작가로는 대구사범 출신들이 단연 손꼽힌다. 대구사범학교는 일선 학교의 교육자 겸 서양화가를 배출하던 요람이었고 미래의 유망주들은 '조선미전'을 통해 그 싹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바로 금경연이었다.


어린시절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영특
영양 출신으로 첫 대구사범학교 입학
일본인 미술교사 영향으로 화가의 길

안동 성소병원 모델 '붉은 벽돌 건물'
조선미전 특선작으로 일본인에 팔려
당시 교사 봉급의 2년치가 넘는 금액

화단 관심받기 전 기억하는 이 없어
집안에 있던 그림들 6·25때 사라져
첫 입상작 '양파와 능금'도 행방 묘연
영양 기념관엔 유품 등 500여점 보관



금경연은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한 뒤 형 금두연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학업에 정진했다. 그런 가운데 미술교사 다카야기(高柳)를 만나면서 화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다카야기는 '제국미전' 추천 작가이자 심사위원을 지낸 실력자로 일본 학무당국의 특별요청으로 대구에서 교직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금경연의 탁월한 미술적 재능을 알아보았고 기초 데생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전통 유교 집안에서 화가라는 직업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가족의 이해 부족은 금경연을 정신적인 주변인으로 떠돌게 했다. 절망적인 상황이 그를 옥죄여 오면 올수록 그는 더욱더 온몸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934년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은 지 1년 만에 그는 제13회 조선미전에서 수채화 '양파와 능금'으로 입선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후 가족들은 그의 미술적 재능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고 정신적으로 그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나 가장 큰 후원자였던 형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금경연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곤궁에 빠지게 된다. 이때 그의 사정을 알게 된 다카미 쇼헤이가 다시 한 번 더 정신적·경제적 도움을 주면서 그는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금경연은 더욱 정진했고 이듬해 제14회 조선미전에서 '대구 시가지'로 다시 입선했다. 그는 고마움의 보답으로 그 작품을 스승 다카미 쇼헤이에게 증정했다고 한다. 훗날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교단에 서게 되었을 때는 월급을 쪼개 매달 신세를 갚아 나갔으며 다카미 쇼헤이가 사망한 뒤에는 유족에게 매달 송금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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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촌마을 동산의 양지바른 솔숲에 세워진 금경연화백추모비.

#2. 교육자이자 화가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금경연은 1938년 안동중앙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교육자와 화가의 길을 병행해 나갔다. 교사 생활로 인해 작업 시간은 한정적이었지만 재학 시절보다 더욱 수준 높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과 열망은 컸다. 그리고 1938년 제17회 조선미전에서 '신록의 풍경'으로 입선한다. 이 세 번째 입선은 그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1939년 제18회 조선미전에서 그는 안동 성소병원을 모델로 그린 '붉은 벽돌건물'로 특선의 영예를 얻는다. 그의 특선작은 일본인에게 팔렸는데 당시 교사 봉급의 2년치가 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 돈으로 항상 부족했던 화구들과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세계명화전집과 세계미술전집 50권을 사고 기뻐했다고 전한다. 현재 그 그림은 흑백사진으로만 볼 수 있지만 야수파의 화풍과 같은 강렬한 터치감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총독부에서는 금경연의 '붉은 벽돌건물'을 그림엽서로 제작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통용시켰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가진 우수성을 입증하고도 남는 것이다.

1940년 금경연은 경산 하양의 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해 제19회 조선미전에서 '정(庭)' 및 '경산'으로 입선했다. 1942년에는 경주 계림 공립보통학교 교사와 경주중 미술교사를 겸직하면서 경주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거주할 집이 없어 애태우던 중 경주 최부자 집의 99칸 중 두 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경주 최부자 집에는 100촉 전구가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정규 수업을 하고 밤에는 그림 작업이 가능했다. 당시 일제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회화도 전쟁의 기록이나 전시체제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금경연은 순수미술을 지향했고 일제가 전쟁 완수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미술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경주로 내려간 1942년에 경주향토미술협회 창립 멤버로 활동했고 1943년 제1회 경주 미술전람회를 주관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후 그는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위해 문교 당국에 간청해 1944년 영양군 입암 공립보통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광복을 맞이한 1945년 고향 수비의 공립보통학교 교장이 되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교장이자 교사로서의 역할과 화가의 길을 병행했다. 그러다 그는 결핵을 얻게 된다. 광복된 조국에서 마음껏 그림에 대한 꿈을 펴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야간작업 속에서 각혈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금경연은 1948년 4월11일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33세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림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원망과 상실감이 컸다고 한다. 금경연의 작품은 아주 소수만이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의 집안에 캔버스째로 쌓여져 있던 그림들을 구루마 두 대에 가득 싣고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고도 남아 있던 그림들은 6·25전쟁 때 사라졌다고 한다. 조선미전에 처음으로 입상했던 '양파와 능금'은 한동안 집안에 있었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행방이 묘연하다.

오랫동안 '대구시사'와 '영양군지'에 이름만 비칠 뿐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1983년 조선미술전람회도록 영인본이 발간되면서 그의 입선작품과 기록들이 알려졌고 화단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후 1984년 그의 수채화 작품 3점이 새로 발굴되었다. 종이의 앞뒷면에 고향의 '약천정'과 '경주 안압지 풍경'을 그린 것, 그리고 '과수원 정원'을 담은 그림이다. 그의 작품 중 1940년대에 그린 수채화 '여름정원'과 연대미상의 유화 '경산 가로수 풍경'은 대구문화예술회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의 추모비는 1993년 영양문화원이 주관해 약천정이 있는 마을 입구 언덕에 세워졌으며 2003년에는 경북도와 영양군의 지원으로 수비면 발리리 326 금촌마을에 '금경연화백예술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기념관에는 금경연이 조선미전에서 수상한 도록 내용과 유작인 유화, 수채화, 연필소묘 등이 전시돼 있으며 대구사범학교 시절의 활동사진과 유품 등 500여 점을 볼 수 있다. 금경연은 한국 서양화단의 1세대 선각자이며 영양의 현대 서양회화를 시작하고 발전시킨 화가이자 교육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디지털영양군지. 한국근대미술사학. 대구미술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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