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서 펜으로 전하는 '사랑의 언어'
2009년 예이츠 서머스쿨에서 아일랜드 노벨문학상 수상자 세이머스 히니(오른쪽)와 함께. |
1972년 1월30일 데리의 보그사이드 지역에서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이 발발한다.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가 재판없는 구금에 반대하기 위해 조직했던 행진에서 영국군의 낙하산병들이 비무장 시민운동가 13명을 살해하고 1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이 사건의 문맥은 아일랜드 독립전쟁 기간인 1920년 11월21일에 일어났던 원조 '피의 일요일'과 관련해 소위 IRA가 더블린에서 더블린성의 정보부 소속 무장 영국장교 11명을 살해했을 때, 그 보복으로 영국군은 더블린의 크로크 파크에서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 21명을 사살한 역사적 사건과 맞물린다. 북아일랜드 분쟁(The Troubles)이라 불린 이러한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동요의 상황 속에서, 벨파스트에 거주하던 세이머스 히니는 마침내 퀸즈대학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1972년 11월 가족과 함께 북아일랜드를 떠나 남쪽 아일랜드 공화국의 위클로 카운티의 글랜모어 카티지로 이주한다.
북아일랜드 '피의 일요일' 사건 후 남아일랜드공화국으로 떠난 히니
총과 폭력에 대한 공포 극복하며 자연 속 서정적 아름다움 그려내
23년 뒤 '일상의 기적과 살아있는 과거를…'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진심·희망 주는 밝은 어조 눈길…작품속에서 숭고한 삶의 비전 제시
23년 뒤 히니는 '일상의 기적과 살아있는 과거를 찬양하는 서정적 아름다움과 윤리적 깊이의 작품'으로 199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아일랜드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판테온에 W. B. 예이츠, 조지 버나드 쇼, 사무엘 베켓과 함께 나란히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것에 대한 소감을 묻자, 히니는 "산맥 아래 작은 산기슭에 있는 것과 같다"라고 겸손히 대답한다. 조그마한 나라 아일랜드 문학의 산맥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4명이나 있다는 사실은 남북의 문제가 공통분모인 한국에서 숙고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최초의 시집인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에 처음 등장하고 히니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시 '땅파기'에서 시인인 화자는 펜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삽으로 작업한다. 시인은 탐구가이자 고고학자로서 자신의 땅의 도면을 그리고 전통을 발굴하며 다시 써내려 간다.
'내 검지와 엄지손가락 사이에
펜촉 만년필이 놓여있다. 총의 방아쇠를 쥔 듯 가지런히.
창문 아래에서는 자갈밭에 꽂히는
깔끔하면서도 거친 삽질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가 땅을 파고 계신다. 나는 내려다본다. (DN 3)'
감자 이랑과 늪지의 어두운 땅속을 파내려 가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현실적 작업에서, 히니는 고고학적 상상력으로 북아일랜드 정신적·역사적·문화적·영성적 공동체의 현실적 토착 토양을 펜으로 파내려 가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를 보이고 있다. 여전히 펜과 총의 이미지가 독자의 뇌리에 남는다. 펜과 총의 이미지로 시작하는 히니의 의식 속에는 총의 비유가 전하는 폭력적인 위험이 잠재해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지뢰와도 같이 단편적으로 폭발적인 이미지로 시집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에 여기저기 심어져 있다.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에서는 어린 시절의 자연현상은, 더 이상 목가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시선으로 보이지 않는다. '땅파기'에서 언급된 총은 방아쇠가 당겨지면 폭력적인 위험을 상징하여 공포와 두려움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초기의 시인 히니는 폭력의 이미지가 지배하는 북아일랜드 데리에 살면서 자신도 모르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자연은 현실적인 체험에서 생경하고도 낯설게 위협과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이제 낭만주의적 자연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자연주의의 종말' '현실의 비전'을 가져다준다. 습지에서 개구리를 보는 시각뿐 아니라 곡식 창고에서, 강둑에서, 우물에서, 개울에서, 그리고 모스반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포가 다가온다. 목가적이라고 생각했던 데리의 모스반의 곳곳의 공간에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은 시인에게 여러 형태의 관찰을 통해 무의식적인 공포증의 원인을 엿보게 해준다. 공포에서 벗어나면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공포의 대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은, '배움의 진전'에서 제시한 쥐 공포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체득한 것이다. "신중하고도 소름이 돋는 주의를 기울이며" "뚫어지게 바라보는" 새로운 응시의 현실감각을 초기 시에서 구현한 것이다. '블랙베리 따기'와 '버터 만드는 날'에서도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응시의 현실감각을 체득한다. 이제 독자들도 시인 히니가 익숙하게 연단 시킨 동식물에 대한 집중력으로 사물을 응시할 수 있다.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연단된 응시로 독자의 상상력을 일깨워 자연현상과 인간, 물고기, 폭포에 대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응시와 연단을 통한 예술적 재현의 사례를 '아란섬의 싱' '성 프란체스코와 새들' '조그마한 마을에서' 3편의 시에서 찾아본다. '아란섬의 싱'에는 아란 섬의 사방의 바람이 소금으로 그 날카로움이 더해지고, 땅을 깎아 내려가며, 절벽을 깎기도 한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존 밀링톤 싱(John Millington Synge·1871~1909)은 아란 섬의 '영감'의 바람과 함께하며 항상 머릿속에는 작품을 구상하며 '소금 바람으로 다듬어지고' 연마되고 감정의 격동 속에서 '통곡하는 바다에 담긴 펜촉'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천재적이고 날카로운 비평적 시각을 지닌 작가가 된다. '성 프란체스코와 새들'에서는 1209년 가톨릭 프란시스칸 수도회의 설립자인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1191~1226)가 새들에게 사랑을 전파하는 언어는 새로운 신비로운 의사소통의 선물로 재창조되어, '날개로 춤을 추고, / 투명한 기쁨을 위해 놀며 노래하는' 날개 달린 단어가 되어 새와 함께 춤을 춘다. 사랑의 믿음을 가진 이들의 진심과 희망을 주는 빛나는 밝은 어조가 바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조그마한 마을에서'에서 반 고흐(Van Gogh)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풍의 독특한 스타일로 풍경화를 그리는 초현실주의 화가 콜린 미들톤(Colin Middleton·1910~1983)은 총처럼 장전된 돼지털 쐐기로 큰 브러시 윤곽선과 세척을 사용하여 바위 안의 수정이 나타날 때까지 화강암과 점토를 구별하여 쪼개어, 석재의 그라운드가 더 선명하게 정의되고 배경이 고정될 때까지 가장자리를 연마한다.
마지막에 위치한 프레임 시 '나만의 헬리콘산'에서 우물은 화자에게 시적 영감의 원천을 제시한다. V자 모양으로 두 갈래로 갈라진 개암나무 막대로, 목표장소를 빙빙 돌다가 가야금 줄을 퉁기듯 개암나무 가지의 떨림으로 물소리의 튕김을 감지하는 '수맥 탐지자(The Diviner)'처럼, 안나 스위르(Anna Swir)의 '세상의 목소리를 포착하는 안테나'처럼, 시인 히니는 자신의 잠재의식과 집단적 잠재의식 사이(in-between)의 안테나가 되어 영감의 물줄기를 찾아낸다. 이제 히니의 시는 우물이라는 제한된 공간의 증폭된 소리와 같이 자신의 시적 목소리로 '어둠을 메아리치는' 시적 소명을 결단한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북아일랜드의 사회적, 정치적인 동요와 소용돌이를 목격하고 시적인 현실의 비전을 재현하여 아일랜드 전역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숭고한 어둠을 파헤쳐 메아리쳐 울려 퍼지게 할 것이다.
김영민 (동국대 명예교수)
공동기획 : KNU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김영민 (동국대 명예교수) |
김영민 교수는 동국대 영어영문학부에서 '현대영미시' '아일랜드 문학' '캐나다 문학' '정신분석학' '비평이론' '포스트모더니즘' '초국가주의' '비교문학' '세계문학' '디지털 인문학' 등을 강의해왔으며, 1998년에는 미국 코넬대 강의 교수로 한국학을, 2011~2014년에는 버지니아대학 객원교수로 동아시아 관련 연구를 했다. 2016년에는 동국대 연구 우수 교수, 2019년부터는 동국대 명예교수로서, 2019년부터 현재까지(2022) 중국 항주사범대의 Jack Ma Chair Professor로 영문학, 비교문학과 세계문학, 트랜스 미디어와 디지털 인문학의 융합과 통섭의 문맥에서 미래인문학에 관한 강의와 연구를 해오고 있다.
동국대 국제교육원장, 인문대학장, 한국사립대인문대학장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트랜스미디어세계문학연구소와 디지털인문학 LAB을 설립해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초국가주의와 문화번역'(2009~2011), '트랜스미디어, 디지털인문학, 세계문학의 융합의 미학'(2017~2020),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의 미학과 통섭의 윤리'(2020~2022) 등 미래인문학에 관한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또 교육부·한국연구재단에서 세계인문학포럼 추진위원 및 운영위원, 인문학대중화사업 운영위원, 학술지발전위원회 발전위원 등을 수행하였고, 대산문화재단 자문위원, 부산영화제(BIFF)콘퍼런스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영어영문학회, 한국라깡과 현대정신분석학회, 한국예이츠학회의 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저널 편집위원장(2013~2021), 한국동서비교학회 편집위원장(2022~)을 역임했다. 국제윤리비평문학협회(IAELC), 국제아일랜드문학협회(IASIL) 부회장, 국제비교문학협회(ICLA), 국제번역과문화간연구협회(IATIS), 국제W.B.예이츠학회, 국제에즈라파운드학회의 집행이사직을 수행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에즈라 파운드: 포스트모던 오디세이아', '예이츠, 아일랜드, 그리고 문학'(공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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