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시인' 송재학의 열한 번째 시집
자아-외부 경계 허무는 존재론적 사유
분화된 '색채 언어'로 덧칠하고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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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등단 36년을 맞은 송재학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연과 예술품을 빼어난 색채 언어로 관조하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론적 사유와 그 외연의 확장을 보여준다.
색채를 향한 시인의 호기심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일찍부터 검은색을 죽음의 색에서 모든 색의 혼합이자 포용의 상징으로 끌어올리는 시적 실험을 선보였다. 또 묘사의 여백이자 무채색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허공까지 색채의 가능성을 이야기해 왔다. 흰색과 분홍색을 거쳐 검은색으로 대표됐던 시인의 색채는 이번 시집에서 더욱 무한한 영역으로 뻗어 나간다. 시인의 시선에서 새로이 조색 된 세계는 천 개의 다양한 색으로 분화한다. 여명의 시간부터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드는 순간까지 색의 향연을 직관적이고 단단한 시어로 펼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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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지음/문학동네/76쪽/1만원 |
'아찔한 것과 서늘한 것들을 자꾸 끄집어내는 저녁놀, 석양의 질감은 장면전환의 페이드아웃처럼, 생각을 오래 해야 할 문답처럼, 오래 반복되고도 늘 새것인 저녁의 이유가 방금 도착했다.'(-일몰의 구름은 무엇의 일부였을까-중에서)
'아침을 담는 항아리는/ 천 개의 색을 모으는 중이다/ 무채색 주둥이까지 포함하니까/ 구부리고 번지는 밀물까지 돌과 함께 물렁해져서/ 어딘가 스며들어야 하는 해안선이 되었다.'(-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중에서)
시인의 시는 내부와 외부가 나뉘지 않는다. 자아와 세계는 경계 없이 연속된다. 이는 외부 물질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자아가 다른 물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이미 '내 속의 잠재태'로 존재하는 것을 재발견한 것이 된다.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황비창천명경(개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청동거울)'과 같은 옛 예술품과 '노을'과 같은 자연을 시어로 재구성한다. 이를 통해 예술품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면서 동시에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아의 내부에서 한 쌍의 '데칼코마니'와 같은 미적 발견을 이뤄낸다.
'황비창천의 거울이 별이 되기 위해 바다에 잠길 때 서쪽 노을의 아랫도리마저 뚝뚝 뜯겨나갔다(중략) 물의 눈썹 자욱이 근심을 없애는 우식악무늬를 거울에 돋을새김할 때 물길이 본받고 누누 고요하기만 했을까.'(-황비창천명경-중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일찍이 "송재학 시의 시적 화자는 세계의 풍경을 자기 외부의 무언가로 인식하지 않고 자기 내부의 연속이라 여긴다"고 해설하기도 했다.
'숨쉴 때마다 꾸역꾸역 붉어지는 서쪽의 비위가 싫지 않은 것은 이미 내 몸이 비애와 바뀌었기 때문이다. 몸 속의 모든 것을 피로 뱉어내며 내가 흥건해졌다 나와 섞이기 위해 저렇게 붉어졌다.'(-붉은 아가미-중에서)
'이건 껴묻거리, 죽은 자의 눈물이라 비탄이며 원한까지 산화락 공양으로 함께 묻는 고려의 풍속이다. 우리 모두 몇 겹의 윤회인 채 흘러가고 있는 장단이다.'(-용수전각문경-에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서쪽 노을이 나의 외부이기도 하지만 그게 생활의 불온이며 내부라는 짐작을 한다. 내부는 애면글면 또 누군가의 외부, 지금 내 눈동자와 눈썹까지 들여다보거나 헹구어야 하는 이유"라고 밝히기도 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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