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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대구 불로동과 봉무동 일대에 자리한 삼국시대 불로동고분군

2022-08-26

충적평야 비옥한 땅에 촌락·고분 형성…삼국시대 대구 동부 장악세력 누구일까

대구의 대표적인 관광자원 중 팔공산이 유명하다. 팔공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하곡이 깊어 동화사, 파계사, 은해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여러 암자가 들어서 있다. 또한 고려시대 팔공산 자락에는 후삼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일대 격전을 펼쳤던 공산전투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대구에서 팔공산으로 진입하는 지점에 불로동과 봉무동이 있다. 불로동(不老洞)은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하다 이 지역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란을 가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봉무동(鳳舞洞)은 현 봉무정에 호를 구축하기 위하여 구덩이를 파니 땅속에서 봉이 나와 북쪽으로 날아갔다 하여 봉이 춤추는 곳이라고 하니 그 이름이 참 재미있다.

[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대구 불로동과 봉무동 일대에 자리한 삼국시대 불로동고분군
불로동고분군 전경. <출처:석진화 작가>

이곳 불로동과 봉무동 일대에 삼국시대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사적 제262호로 지정된 불로동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삼국시대 당시 이 일대의 최고 유력자였을 것이다. 대구 중심부에 위치한 달성고분군이나 남서쪽의 화원 성산동고분군, 대구 북쪽의 구암동고분군 등 대구의 여타 고분군과 비교하여도 아주 탁월한 입지에 위치해 있고 그 규모도 상당한 것을 볼 수 있다.

불로동고분군은 문헌 기록을 고려하면 삼국시대에는 경산의 하위 집단인 치성화현(雉省火縣)의 최고 지배자들이 축조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그런가 하면 삼국시대 경산의 중심지였던 임당유적과는 지리적 위치나 유적 간의 거리, 고분군의 조망권, 토기 양식 등을 고려할 때 불로동고분군 축조 집단을 경산의 하위집단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필자가 앞으로 살펴야 할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아무튼 불로동고분군을 대구의 동부권을 장악한 집단이 축조한 고분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현재 불로동고분군은 대부분 잘 정비돼 개별 고분 번호까지 다 부여된 상태이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해안면 1호분과 2호분이 처음 조사되었고 1963년과 1964년에 불로동 갑호분과 을호분(현 215·216호분)이 발굴되었다. 2002년에는 불로동 91호와 93호가 발굴되었으며 이후 현재까지 크고 작은 발굴이 수차례 진행되었다. 1938년 당시 고분 대부분의 석곽이 바깥에 노출되어 있을 만큼 도굴로 인한 파괴가 심했고 학술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라 경주 또는 대구의 다른 고분과 서로 비교하여 그 성격을 밝히고자 규모가 가장 큰 1호분(현 18호분)과 도굴당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한 2호분(현 22호분)을 발굴했다.


대부분 5세기 중~말엽때 축조
문헌상 기록 고려해 봤을 땐
경산 하위집단 지배자로 추정

지리적 위치·토기양식 등 차이
경산과는 다를 가능성도 존재



해안면 1호분은 하나의 봉토를 축조한 다음 또 하나의 봉토를 이은 표형분으로 판단하였으나 봉토의 동쪽 중앙부에서 수혈식석곽묘 1기가 조사됐다. 이 고분의 부장품은 모두 도굴되었고 부곽에서 고배와 대호, 금동제 행엽 등이 출토됐다. 해안면 2호분도 원형분이었으며 봉토 중앙에서 수혈식석곽묘가 확인됐다. 주곽에서는 토기 50여 점과 철기가 출토됐고, 부곽에서는 토기 60여 점과 많은 종류의 어골편, 부식된 곡류편이 출토됐다. 1호분과 2호분 모두 석곽 내부에 격벽을 설치하여 주곽과 부곽으로 사용했다.

불로동 갑(甲)호분(현 215호분)도 수혈식석곽묘로 확인됐으며 석곽 내부 양쪽에 토기류를 부장하고 측벽에 접해서 고배류를 길게 놓아둔 것으로 추정된다. 불로동 을(乙)호분(현 216호분) 외형은 경작에 의해 사방에서 깎여 방형의 나지막한 봉분만 남아 있었다. 유물은 석곽 동북쪽에 토기류와 은장 행엽, 재갈 등 마구류가 확인되었으며 중앙부에서는 소형 토기가 있었다.

[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대구 불로동과 봉무동 일대에 자리한 삼국시대 불로동고분군
불로동 91호분 전경. <출처: 경북도문화재연구원 2004>
[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대구 불로동과 봉무동 일대에 자리한 삼국시대 불로동고분군
불로동 91호분 출토유물. <출처: 경북도문화재연구원 2004>
[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대구 불로동과 봉무동 일대에 자리한 삼국시대 불로동고분군
불로동고분군 전경. <출처: 세종문화재연구원 2018>

불로동 91호분과 93호분은 구릉 정상부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주 능선상에 위치하는 대형봉토분이다. 91호분은 원형으로 4기의 수혈식석곽이 앞 시기의 분구에 순차적으로 덧대어 축조된 다장분인데 반해 93호분은 타원형이며 수혈식석곽묘 1기가 중앙에 축조된 단장분으로 선명하게 비교된다. 91호분과 93호분의 매장주체부 형태는 세장방형인 수혈식석곽묘이며 하나의 묘광 안에 격벽을 설치한 일(日)자형 주부곽식 구조이다. 주곽에 비해 부곽의 너비가 좁고 부곽의 단벽은 벽석 상부로 가면서 둥글게 처리한 점이 특징적이다.

불로동 91호분의 경우 한 분구에 매장된 여러 피장자가 가족과 같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곽은 석곽 옹관으로 피장자가 유아 또는 어린이일 가능성이 있고 2-1곽 피장자는 치아를 통해 볼 때 40대 여성이다. 3곽 피장자의 치아는 20세 전후의 남성으로 추정되며 4곽의 피장자는 남자일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2-1곽과 4곽은 부모세대, 1곽과 3곽은 자녀세대 관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로동고분군에서 발굴 조사된 고분은 대체적으로 5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순서는 91호분→18호분·3호분→22호분·15호분·216호분으로 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분의 축조 방향을 살펴보면 능선의 정부에 해당하는 가장 입지가 탁월한 곳에 대형분이 먼저 축조되고 이후 고분의 축조 공간이 그 주변으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대구 불로동과 봉무동 일대에 자리한 삼국시대 불로동고분군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불로동고분군이 위치하는 금호강 북안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일찍부터 봉무동유적이나 봉무토성 등 취락을 형성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이러한 자연·지리적 환경 속에서 치성화현의 중심세력이 불로동고분군을 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불로동고분군 주변으로는 단산동고분군, 공산동고분군, 봉무동고분군, 도동고분군, 둔산동고분군 등의 중·소형 고분군이 확인된다. 이는 치성화현 내에 존재하였던 개별 촌락으로 대응되며 불로동고분군 축조집단의 하위 집단으로 존재하였을 것이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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