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20826010002250

영남일보TV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 인물고…'400년간 영남을 빛낸 인물'…정조 특명으로 경상도 57개 고을 860명 수록

2022-08-26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 인물고…400년간 영남을 빛낸 인물…정조 특명으로 경상도 57개 고을 860명 수록
영남인물고 필사본 (규장각 보관) 표지와 속지. 영남인물고는 경상도 71개 고을 중 57개 고을 인물 860명(3명 중복)을 고을별로 수록했다. 인물이 수록되지 않은 14개 고을은 경산 청송 흥해 연일 장기 청하 거제 진해 곤양 칠원 남해 기장 언양 웅천으로 대체로 해안이나 벽지 고을이다. 수록 인물수는 문풍에 따라 고을별로 차가 컸다. 안동(141명) 상주(78명) 진주(42명) 영주(38명) 예안(37명) 성주(35명) 경주(33명) 예천(31명) 영천(30명) 대구(25명)이고 한 명만 수록된 고을도 8곳이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 인물고…400년간 영남을 빛낸 인물…정조 특명으로 경상도 57개 고을 860명 수록
조선 시대 선비 모습. 〈국학진흥원 제공〉
'영남인물고'는 정조의 왕명으로 만든 영남인물 전기이다. 태조 때부터 정조 때까지 영남 출신의 뛰어난 인물을 수록한 17권 17책의 필사본인데 7권 7책이 분실되어 오랫동안 10권 10책만 남아 있었고 10권에 수록된 영남인물 450명의 국역본이 1978년에 발간됐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부 시절에 일본으로 가져간 우리 고서적 1천205권이 2011년에 국내로 반환됐는데 그 속에는 그동안 분실됐다고 여겨왔던 영남인물고 7권 7책이 들어 있었다. 이로써 정조 특명으로 만들어진 영남인물고가 백 년 만에 17권 17책으로 다시 완성됐고 그 속에 4백년간 영남을 빛낸 인물 860명을 알 수 있게 됐다. 조선후기 오랫동안 조정으로부터 외면당했지만 조선 인재의 반이 나와 인재의 부고(富庫)라 불렀던 그 땅의 인물을 그 시대로 돌아가 찾아본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 인물고…400년간 영남을 빛낸 인물…정조 특명으로 경상도 57개 고을 860명 수록
태조 때부터 정조 때까지 영남 출신의 뛰어난 인물을 수록한 17권 17책의 필사본인데 7권 7책이 분실되어 오랫동안 10권 10책만 남아 있었고 10권에 수록된 영남인물 450명의 국역본이 1978년에 발간됐다. 사진은 정조 표준 영정.
◆군주가 바뀌니 호시절

무신난이 일어난 지 한 갑자가 지난 1788년, 정조는 당시 공을 세운 209명에게 포상과 증직을 내리고 의병 사적에 누락이 없는지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각 도 관찰사에게 명했다. 그러나 경상감사가 적극성을 보이지 않자 퇴계 방손 이진동의 주도로 영남 각 고을의 의병 기록을 모아 '무신창의록'을 편찬하여 조정에 올렸다.

정조는 무신창의록을 치하하며 영남인이 오랫동안 고초를 겪고 있음을 알게 됐고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남 선비의 숙원인 조덕린과 황익재를 죄적에서 풀고 창의록 소두 이진동과 김한동을 접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파가 생긴 후 서로 보는 눈이 달라 근래 조정에서 영남을 거의 다른 나라처럼 여기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인재가 부족한 이때, 영남 인물 가운데 등용할 만한 사람이 많을 터이니 함께 수용해 조정에 같이 선다면 공평의 도에 부합할 것이니라.'

이로써 숙종조 갑술환국(1694년)이후 백 년 만에 영남인에게 조정의 문이 다시 열렸다. 4년 뒤 도산서원에서 별시가 열리고 연이어 영남 차별을 없앤 성은에 보답하고자 만여 명의 영남 선비는 사도세자 신원의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만인소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복위에 힘을 얻었고 변방의 시골뜨기라 무시당했던 영남 유림은 결집돼 조선 정치·사회사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정조 치세에 등과하여 고위직에 오른 영남 인물은 봉화 바래미의 김희주·김한동, 하회의 류이좌·류상조, 경주 양동의 이정덕, 달성 묘골의 박광식, 의성 산운마을의 이희발 등이 있으며 류상조와 이희발은 훗날 판서까지 올랐다. 그리고 1801년에 단행한 공노비 6만6천명 혁파에 기폭의 상소를 올린 경주 구정동 출신 이진택도 정조의 사랑을 받은 영남인물이었다.


갑술환국 후 백년만에 열린 조정의 문
영남차별 없앤 성은 보답 '영남만인소'
변방 시골뜨기서 정책 한축 자리매김

문중·조상행적 수록에 온 힘 기울여
7권7책 분실후 100년만에 日서 귀환
필사본 17권17책 2011년에 다시 완성

정약용도 영남인물고 편찬에 큰 감명
정조 승하하자 목판으로 간행은 못해



◆왕명으로 인물고 편찬

영남만인소로 든든한 우군을 얻은 정조는 1798년 바래미 출신으로 도산별시로 등과한 초계문신 김희락에게 영남에 선현 문적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김희락은 퇴계제자 대사간 정유일이 만든 것이 있었으나 임란 때 없어졌음을 아뢰자, 편찬 중인 해동인물고와 유사하게 영남인물고를 만들도록 명을 내린다.

승정원 승지 채홍원의 명을 받은 김희락은 안동 호계서원, 예안 도산서원, 상주의 정종로, 경주의 이정덕, 선산의 박천건에게 영남 선현의 행적을 고을별로 조사하여 1개월 안에 올리도록 공문을 보낸다.

통지를 받은 호계·도산서원은 영남 공의를 대표하던 수선(帥先)서원이었고, 정종로는 정경세의 후손으로 영남유림을 이끌고 있었으며 양동의 이정덕은 대사간을 마치고 낙향한 직후였고 박천건은 선산 장원방 출신으로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낸 박춘보의 장남이었다.

공문은 영남 71개 고을의 유력 문중과 서원, 향교에 통문으로 전달됐고 영남 문중은 국조 이래 처음 나라에서 만드는 영남지역 인물고에 조상 행적이 수록되도록 온 힘을 기울였다. 조상 받들기가 삶의 전부였고 조상의 문집 발간과 증직벼슬에 가문의 명예를 걸었던 영남문중이었다.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했고 무현관(無顯官) 백년을 무사히 견디게 해 준 조상의 음덕에 감사했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 인물고…400년간 영남을 빛낸 인물…정조 특명으로 경상도 57개 고을 860명 수록
귀환 된 영남인물고 7권. 연합뉴스
◆영남문적 천여 건이 조정에 쌓이고

영남 문중은 한 달간 말미이니 만사를 제쳐놓고 매달려 조상의 언행과 사적으로 문적을 만들었고 한양 천리를 한걸음으로 내달았다. 조정에 모인 영남 선현의 문적은 천여 건이 넘었고 정조는 쌓인 문적을 보고 영남을 인재의 부고라 하는데 과연 그럴 만하다고 했다.

문중 인물은 조상 행적이 나라 서책에 실릴세라 쉬이 내려오지 못하고 한양 도성을 서성였다. 이를 안 정조는 영남 유생이 한양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이 걱정이라면서 빨리 초록을 만들어 이들이 속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라고 했다.

아울러 영남인물고 편찬을 위해 전 영의정 채제공을 총재관으로, 채홍원 정약전 한치응 목만중 홍명주 김희락 등 19명의 대규모 인원을 편수관으로 임명하여 고을별로 분담시켰고 조속히 완성하라고 명을 내렸다.

정조 특명으로 영남인물고 필사본 17권은 바로 완성됐다. 15권은 고을별로 인물을 수록했고 나머지 두 권은 별책으로 목록집이다. 별책은 수록 인물 860명의 총괄 목록표 1권과 영남문중에서 올라 온 문적 1천078건을 인물별로 성명, 생년, 주요 행적, 관직을 한 줄로 간략히 기재한 문적 총괄표 1권이다.

◆문풍이 인물 성쇠 일으키고

영남인물고는 경상도 71개 고을 중 57개 고을 인물 860명(3명 중복)을 고을별로 수록했다. 인물이 수록되지 않은 14개 고을은 경산 청송 흥해 연일 장기 청하 거제 진해 곤양 칠원 남해 기장 언양 웅천으로 대체로 해안이나 벽지 고을이다.

수록 인물 수는 문풍에 따라 고을별로 차가 컸다. 안동(141명) 상주(78명) 진주(42명) 영주(38명) 예안(37명) 성주(35명) 경주(33명) 예천(31명) 영천(30명) 대구(25명)이고 한 명만 수록된 고을도 8곳이다. 권역별로는 안동권(358명) 상주권(166명) 진주권(134명) 대구권(102명) 경주권(70명) 김해권(30명)으로 고을의 학문적 분위기가 영남 인물사의 성쇠와 부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영남 문적 1천78건 가운데 719명(중복포함)만 실렸고 359명은 편찬 과정에서 빠졌다. 대신에 문적에 없는 인물 148명(중복포함)이 실렸다. 이는 조정의 여러 곳에서 영남 문적을 모았거나 아니면 편찬 도중에 도착하여 촉박한 시일로 문적 총괄표에는 수록하지 못한 듯하다.

◆인물고와 만인소는 같은 축

영남인물고 수록 인물은 동시대 영남 선비집단을 이끈 인물로 대부분 영남만인소 참가 문중의 현조(顯祖)였다. 아울러 10년 전 무신창의 재조사 때 관찰사의 비협조로 큰 곤욕을 겪었기에 인물고 작업에는 고을 수령의 도움을 받지 않았고 노론계 인물은 배제됐다. 영남의 큰 인물이지만 아직 죄적에서 풀리지 아니한 합천의 내암 정인홍과 영양의 갈암 이현일은 실리지 못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서연관이자 세손 시절 큰 영향을 받았던 '서연일기'의 권정침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생졸(生卒)이라도 넣도록 했다. 안동 편수관은 닭실의 권정침 행적을 넣으면서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밝히는 의소(義疏)를 써 베개 가에 감추어 두었는데 마침내 올리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으니 눈을 감지 못 하겠다'는 그의 뜻을 인물고에 담았다.

◆정약용의 영남인물고 서(序)

영남인물고 편찬 시 곡산 부사였던 정약용은 둘째 형 정약전이 편수관으로 있었기에 영남인물고를 보고 다음과 같이 서문을 써 여유당전서에 남겼다.

'내가 곡산에서 돌아오자 둘째 형님은 초고본을 꺼내 보여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단하지 않은가. 불과 수백 년 사이에 한 지방의 어진 이가 이와 같이 많도다. 뛰어난 행실과 숭고한 도의를 믿게 하는 글들이 이처럼 빛나니, 너는 이러한 이유를 알겠는가. (중략) 영남은 향교와 서원을 집으로 삼고 스승과 벗을 친척으로 삼아, 무리 지어 놀고 무리 지어 익혀서, 보고 감화된 덕분에 재질이 참으로 좋으니, 어찌 이와 같이 성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가르침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내가 대답하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렇듯 다산은 영남인물고 편찬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다산의 영남 인연은 무신창의록 상소 때 위험을 무릅쓰고 소두 이진동과 동반 상경하여 정조가 영남 벽을 허무는 데 일조했고, 영남 유림 또한 다산 사후 백여 년 뒤 여유당전서를 발간할 때 자금을 지원해 다산 유고가 세상에 나오도록 했다.

◆정조 승하와 목판본 미간행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 인물고…400년간 영남을 빛낸 인물…정조 특명으로 경상도 57개 고을 860명 수록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영남인물고를 완성하고 석 달 뒤 총책을 맡았던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남인 세력은 구심점을 잃었고 이듬해 정조마저 승하하니 필사본 영남인물고는 목판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궁중 서고에 묻히게 된다.

영남문중을 들뜨게 했던 영남인물고가 나라 서책으로 만들어져 영남 전역에 배포됐다면 조상의 유택에 찬란한 빛이 가득했으련만 정순왕후 벽파 정권으로 인해 다시 한파가 불어 닥쳤다. 이후 백 년 동안 일본 궁내부 서고에 갇혀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지 다시 십여 년이 지났건만 완질본이 아직 국역으로 나오지 않아 많이 아쉽다.

굴곡진 역사의 강에서 되돌아보면 영남인물고는 오랫동안 나라로부터 외면당했던 영남인에게 정조 조정이 드리는 고귀한 헌사(獻辭)였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