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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몸짓은 삶의 태도…마음을 전달하는 몸짓을 기획하고 연습하자"

2022-09-16

"나를 봐, 내가 이 지구에 살고 있다고…"

[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몸짓은 삶의 태도…마음을 전달하는 몸짓을 기획하고 연습하자
지난 6월 몸의 소리 축제 조직위원회 초청으로 이탈리아에 간 조씨. 이탈리아 현지의 남다른 패션 감각에 고무돼 직접 광장에서 감각적인 포즈를 취해보았다.
[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몸짓은 삶의 태도…마음을 전달하는 몸짓을 기획하고 연습하자
조씨가 코로나19 국면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해낸 처용으로 분장한 모습과 본래 모습.


공연차 찾은 이탈리아에서 본 '광장 패션쇼'
개성적 패션의 다양한 연령대 모델들
자신감 넘치는 자태부터 눈길 뺏겨

과거엔 지시·통제의 언어가 일상 채워
최근 '몸짓이 의사소통 도구'로 인정
마음으로 자신의 걷는 모습 그려보길


◆내가 별난 게 아니었다

지난 6월 공연차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몸의 소리라는 이름의 축제다. 5일 정도 시간이 남았다. 밀라노에 가고 싶었다. 패션의 도시, 남자들이 멋진 도시. 첫 번째 목표였던 페도라 명품점인 보살리노(Borsalino)를 찍고, 밀라노대성당 앞 두오모 광장에 이르렀다. 예견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다양한 연령과 캐릭터의 모델들이 골목골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원피스 하나를 입었을 뿐인데 그 원피스는 멀리서도 빛나 보였다. 반바지나 티셔츠 샌들, 가방, 선글라스 하나하나가 눈길을 잡아챘다. 끝없이 이어지는 광장 패션쇼! 이들은 단순히 관광이 목적이었을까? 무슨 패션 관련 플래시 몹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들은 옷을 포함 자신의 자태를 뽐내기 위해 작심하고 이곳에 모인 것 같았다.

"나를 봐. 내가 이 지구에 살고 있다고."

이런 제목의 교향곡을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있었다. 그러다가 동료들의 동선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안에서 웃음이 키 작은 분수처럼 폴폴 새어 나왔다. 나도 패션에 민감하고 그만큼 멋쟁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 남자다. 그런데 거기엔 나와 비슷한 남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노천카페에서 이탈리아 대중음료인 아페롤 스프리츠를 홀짝이다가 빼어나게 멋진 이탈리아 남자를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내가 이 장면을 보려고 여기 왔다니까!"

일행 역시 숨을 한 움큼씩 들이마셨다. 밝은 군청색 바지에 빨간 재킷, 미색 페도라를 쓰고 손가락 사이에는 기다란 시가를 끼운 채 전시 중인 페라리를 사랑스럽게 관찰하는 그 중년의 남자를 그저 멀리 바라보면서 이렇게 되뇌었다.

"거봐. 내가 별난 게 아니었다고!"


◆몸으로 마음을 전하는 능력

나는 나의 몸짓을 늘 바라본다. 나의 일상이 마임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이미스트는 단순히 나의 직업이 아니다. 마임은 내 삶의 태도다. 나는 그대를 향한 나의 시선과 입가의 미소 그리고 내 몸의 방향을 통해 당신에 대한 나의 생각을 눈치채도록 하고 싶다. 예의 바른 인사말을 주고받기 전에 말이다. 그것을 우리는 '태도'라고 부른다.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것을 모두 제하고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무엇으로 서로를 알아볼 것인가? 옷과 자태다. 정치인은 아직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신뢰를 얻고 싶어 한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까? 그것은 화려한 언변이 아니다. 태도다. 편집이 없이 생중계되는 현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미디어가 발달한 만큼 몸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다.

당신은 거리의 무대에서 생기가 넘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기품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반면 공허하거나 불안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아무도 보지 않는 거리를 걷는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자신의 걷는 모습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대인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셀프모니터링'(self monitoring)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당신을 바라본다. 그것은 '당신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은 쇼이기도 하다. 당신의 눈에 담긴 감정뿐 아니라 생김새나 화장, 생기의 유무, 껌벅거림, 눈동자의 움직임까지도 주목하게 만드는 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내 몸짓을 반영해 주는 모니터는 없다. 사진을 찍을 땐 웃으라고도 하고 이런저런 제스처를 해보라고도 하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대인관계에서 상대가 일일이 나의 몸짓을 읽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이를 먹을수록,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올라갈수록 내 몸짓엔 모니터가 사라진다. 모니터가 사라진 나이 든 사람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 불쑥불쑥 나타난다. 꼰대나 진상이라 불리기도 한다. 공공성을 해치는 몸짓이나 발언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은 종종 모임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다.

[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몸짓은 삶의 태도…마음을 전달하는 몸짓을 기획하고 연습하자
이탈리아 현지에서 제주 무속신앙에 등장하는 저승사자 격인 '강림차사'로 분한 조씨.


◆내가 서는 곳이 무대

그러니 아싸가 아닌 '인싸'가 되려면 몸의 감각을 키워야 한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의 움직임을 익히는 것과도 같은 것이며, 그것을 '연기'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마임배우이자 영화배우였던 장 루이 바로는 '무대 위에서 걷는 법을 익히는 데 10년, 다시 일상의 걸음을 익히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말을 했다.

예전에는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보면 무대에 서는 일을 마치 고난도의 서커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는 말이었다. 누구나 주목을 받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 않은가? 관혼상제나 재판정에 서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도심의 한 거리에서 자신을 발견한 친구가 자신의 이름을 크게 부를 수도 있고, 빙판에 미끄러질 수도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대단한 연기력이 아니라 자신의 몸짓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관습이 아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을 담은 몸짓을 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은 오로지 나의 무대가 된다.

그러나 갑자기 주목받는 경우가 되면 당황하거나 긴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까닭은 판단의 기준이 밖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내 몸이 아닌 밖에 있는 경우를 우리말로는 '정신이 없다'거나 '혼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 나간 마음을 불러들이는 외마디가 '아이고'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또는 '마음을 먹는다'는 말을 쓴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서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몸의 감각을 키우는 해법을 상세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아니다. 다만 내가 주목받을 기회가 오면 그 순간을 누리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나의 탄성을 자아냈던 그 이탈리아 중년 남자를 떠올리자. 그는 애초 주목을 받을 생각으로 그렇게 차려입고 나왔다. 그는 자신을 뽐낼 훌륭한 무대를 찾아낸 것이다. 작은 시도를 해보자. 우연이 아닌 내가 의도하고 기획하여 주목받는 몸짓을 연습해 보자. 예전에는 기생오라비니 제비니 하는 비아냥이 있었다면 이제는 부러워하는 눈길을 받거나 용기 있다는 칭찬을 듣는 인싸가 될 가능성이 더 높은 시절이다.

◆몸의 의미가 달라졌다

생산이 부족한 시절이 있었다. 모두가 나누어 쓸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의 몸은 노동시장에 내몰렸고, 거기서 몸은 기계처럼 취급받았다. 치약은 럭키였고, 텔레비전은 금성이었다. 취향은 금기였다. 춤을 추고 싶으면 지하로 내려갔고, 노래는 술주정이나 고성방가로 기억된다. 의사소통은 밤에 술주전자를 끼고 했다. 지시와 통제의 언어가 일상을 채웠다.

몸이 의사소통과 표현의 도구로 인정받은 건 최근의 일이다. 2003년, 난 7차 교육과정에 '표현 놀이'가 포함된 걸 보고 감동했었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까지의 교육은 산업 전사를 키우는 교육이었다. 이후 2006년 문화예술 교육지원법의 제정은 지역문화운동을 하던 내게는 꿈 같은 일이었다. 생산의 도구로 인식되었던 몸이 창의의 도구로 그 의미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최근까지도 초등교육을 첨단산업의 인재를 키우는 과정으로 보는 시대착오적인 화두가 고개를 드는 것이 찜찜하기는 하지만 어제 영덕에서 마임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기차에서 끄적인 시 한 편(나팔 부는 연습)으로 스스로 위로하려 한다.



나라고 해서/ 무탈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네/ 나 같은 치들이 많아졌지/ 커밍아웃이지/ 그렇다고 그냥 무난한 건 아니야/ 도처에 아직 파내지 못한/ 지뢰가 남아있거든/ 지나간 시간의 잔당들은/ 여리고성 안에 숨어들었지/ 난 나팔 부는 연습을 하고 있다네/ 성벽을 한 방에 보내려는 거지/ 이제는 총칼로 싸우지 않거든/ 누림이 없으면/ 결국 지거든.

마이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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