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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우광훈의 장정일 傳] (17) 형, 이제 서울사람이 다 되었군요

2022-09-23

'이제 소설의 시대도 끝났구나'하는 생각이…

[소설가 우광훈의 장정일 傳] (17) 형, 이제 서울사람이 다 되었군요

2007년 11월23일. 갑작스러운 장정일 형의 귀향 소식에 곧장 형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하자, 형은 기다렸다는 듯 포장박스가 필요하다며 가까운 마트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이마트 만촌점'에 도착한 우린 먼저 관리실에 양해를 구한 다음 종이상자가 켜켜이 쌓여있는 3층 자율포장대로 향했다.

내가 옆에서 도와주려고 하자 형은 자신만이 적당한 크기의 종이상자를 고를 수 있다며 극구 마다했다. 내가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묻자, 형은 책과 음반 포장에 쓸 것이라고 했고, 이사할 때마다 이 두 가지는 늘 자신이 포장한다며 일정한 순서와 규칙이 있어 타인에게 맡기지 못한다고 했다. 형은 조만간 서울로 짐을 다 옮길 예정이며, 대구에 있는 집은 당분간 팔지 않고 세를 놓을 것이라고 했다. 포장대 옆에 서서 형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자니 문득, '이제 서울 사람이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詩의 시대에선 시인으로,
소설의 시대에선 소설가로,
인문학의 시대에선 인문학자로
잽싸게 장르를 이동하는 兄

서울로 짐을 다 옮길 상자를 거실로 나른 후
근황을 묻자 지난번 서울에서의 답변처럼
당분간 소설에 집중할 생각은 없다며,
예전보다 나은 소설은 못 쓸 것 같다고…


내 차에 실린 종이상자는 족히 쉰 장은 넘을 듯했다. 이 정도의 양으로도 부족했는지 형은 다시 2층으로 내려가 열 장을 더 가져왔다.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우린 '감포은정복어횟집'으로 가 저녁으로 복지리를 먹었다. 형은 그 탁하고 뜨거운 국물을 쉬지 않고 마시듯 비워 나갔다. 형은 식사를 하면서 다음 주 월요일 '한·러 문학인의 밤' 행사 참가차 고은, 최인석, 김선우, 서영채씨와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로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스크바의 기온에 대해 물었는데, 내가 "우리나라와 위도 차이가 많이 나니 꽤 추울 것 같은데요"라고 답하자, 형은 "그럼 내복을 두 개 정도 더 입어야겠네…"라며 진지한 얼굴로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추위를 굉장히 싫어하는 형은 초겨울부터 내복을 입곤 했다.)

오후 8시 가까이 되어서야 형의 아파트에 도착한 우린 주차장에서 형의 거실까지 열심히 종이상자를 날랐다. 그렇게 일을 끝낸 후, 거실 소파에 앉아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을 들으며 내년 1월 출간 예정인 나의 소설원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형의 근황에 대해 다시 물었다. 형은 지난번 서울에서의 답변처럼 당분간 소설에 집중할 생각은 없다며, 예전보다 더 나은 소설은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 소설의 시대도 끝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詩)의 시대에선 시인으로, 소설의 시대에선 소설가로, 인문학의 시대에선 인문학자로 잽싸게 장르를 이동하는 형의 모습이 왠지 영민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정도의 내공을 쌓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독서와 끊임없는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지만.

형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꽤 유명한 소설가도 대중성이 없으면 출판하기 힘든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그러자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형이 뿌리내리려 하는 이 인문학의 시대가 끝나버리면 과연 어떤 시대가 새롭게 펼쳐질까. 형은 그 시대에 또 어떤 삶의 방식과 언어의 형식으로 자신의 생계를 이어나갈까.

사족 하나.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그 얼굴의 형태가 괴물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다. 특히 '머리Ⅵ'와 '벨라스케스의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습작'에 담긴 비명과 절규의 이미지들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상대의 시선을 향한 것인지 정확히 판단하긴 어렵지만 관람하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공포의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없는 베이컨의 그림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진 촬영에 관한 한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거부감을 보였던 장정일 형의 모습이 매번 떠오르곤 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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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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