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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산책] 루이즈 글릭의 '야생 붓꽃'

2022-11-25

"나는 부서졌기 때문에 말을 해요" 상처극복의 의지 피어난 詩
섭식장애로 고통받던 소녀…이른 나이에 詩 습작 시작
인간과 신의 문답 통해 존재의 의미 묻는 목소리 가득
인생이 주는 환희보다는 상실과 패배에 귀 기울이고
우리에게 상실을 딛고 나아가는 법 나지막이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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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교수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정은귀 교수는 한국외국어대에서 현대시, 문화시학, 문학번역을 가르치면서 우리시를 영어로 영시를 우리말로 옮겨 시를 알리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다.

주요 저서로 산문집 '딸기 따러 가자'와 '바람이 부는 시간'이 있고 번역시집으로 앤 섹스턴의 '밤엔 더 용감하지',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패터슨', 어맨다 고먼의 '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 나타샤 트레스웨이의 '네이티브 가드' 등 다수가 있다.

루이즈 글릭의 시집 '야생 붓꽃' '아베르노' '신실하고 고결한 밤'이 최근에 시공사에서 출간되었다.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 강은교의 '바리연가집' 등을 영어로 옮겼으며, 시가 사람을 살리는 말의 뿌리가 될 수 있음을 믿으며 세계의 시를 두루 읽고 전하고 있다.


2020년 여성 시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탄 루이즈 글릭(1943~)은 1943년 뉴욕에서 태어나 롱 아일랜드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때 섭식 장애로 고통받은 글릭은 그 치료에 집중하느라 대학 진학을 제대로 못 하고 컬럼비아대 등 몇몇 대학에서 비학위 과정으로 공부했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7년의 긴 시간을 심리치료에 힘쓴 글릭은 또래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낸 그 시간이 자신의 생애에서 무척 의미 있는 경험이었으며 축복된 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시 습작을 시작한 글릭은 1968년 '맏이'를 시작으로 꾸준히 시집을 펴냈다. 1992년에 출간된 '야생 붓꽃'으로 퓰리처상과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상을 받았고 볼링겐상, 미국 계관시인, 국가인문훈장 등 시인으로서는 굵직한 상을 많이 탔다. '야생 붓꽃'은 많은 시가 꽃 이름을 제목으로 하고 있으며, 기도시도 많다. 꽃을 수동적인 재현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능동적인 목소리를 준 것이 놀랍다.

야생 붓꽃, 연령초, 광대수염꽃, 눈풀꽃, 제비꽃, 개기장풀, 클로버, 들꽃, 데이지꽃 등 글릭이 시로 불러오는 꽃들은 크고 화려한 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식물들이다. 그늘에서 자라는 광대수염꽃이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잡초인 개기장풀, 한겨울 눈을 뚫고 피어나는 눈풀꽃 등을 통해 시인은 이 세계에서 고통받는 이름 없는 존재들을 우리 앞에 데리고 온다.

"진실로/ 나는 당신이 말하는 방식으로/ 지금 말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말을 해요,/ 산산이 부서졌으니까요." '꽃양귀비'의 목소리는 논리나 이성이 만든 세계의 질서를 허물고 느낌과 감성으로 이 세계를 새롭게 보여주고자 한다. 부서졌기 때문에 말을 한다는 꽃의 야무진 선언은 상처와 폐허를 극복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부서졌기에 입을 닫는 것이 아니라, 부서졌기에 말을 하는 것이다. '산사나무'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은/ 바라보는 법을 배우지"라는 말로 낮은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식물이 그 수동성을 토대로 가장 기민한 시선을 획득한다는 놀라운 신비를 말해준다. "살아남기 위해 당신의 찬사는/ 필요 없습니다// 내가 그 들판을 만들 것입니다"라는 '개기장풀'의 외침은 정원에서 늘 뽑혀 나가는 잡초가 그에 굴복하지 않고 이 세상을 새롭게 재편하겠다는 호기로운 선언이다.

글릭의 '야생 붓꽃'은 꽃과 풀, 정원을 가꾸는 인간 그리고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주고받는 문답으로 가득하다. 그 문답은 어느 누구의 목소리도 주와 종을 이루지 않고 존재마다 팽팽한 개성을 드러내는 태피스트리를 엮는다. 정원사인 인간은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엄마의 목소리면서 남편과의 일상을 치르는 아내의 목소리면서 하느님 앞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인간의 목소리다.

꽃의 절정처럼 사랑의 절정이 있고, 기우는 해와 함께 다가오는 저녁이, 인생의 황혼이 있다. 삶이 주는 환희와 절망과 슬픔을 여러 목소리의 합창을 통해 들려주는 시집 '야생 붓꽃'은 환희와 영광보다는 상실과 패배에 귀 기울이고, 상실 이후에 그를 딛고 나아가는 법을 우리에게 나지막이 들려준다. 한낮의 해가 곧 기울어 밤이 되듯 여름의 시간도 영원하지 않고 곧 가을이 또 겨울이 온다. 시의 독자는 루이즈 글릭이 선보이는 이 연약한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 세계의 신비를 맛본다.

"쉿. 사랑하는 이여, 되돌아오려고 내가 / 몇 번의 여름을 사는지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요 / 이 한 번의 여름에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갔어요./ 그 찬란한 빛을 풀어 주려고 나를 파묻는/ 당신 두 손을 나 느꼈어요." '야생 붓꽃'의 마지막 시 '흰 백합'에서 죽음으로 들어가는 채비를 하는 꽃의 말은 사랑의 상실을 앓는 인간의 말이기도 하다. 나고 죽는 일, 자연의 행로에 순응하는 것이 꽃의 일이라면 인간 또한 그와 비슷한 상실과 기다림, 인내를 거치는 것. 이토록 격조 있게 들려주는 시의 말 덕분에 나는 이 세계가 보여주는 수많은 환멸과 패배의 풍경들을 참고 견디는 힘을 얻는다.

'야생 붓꽃' 외에 스웨덴 한림원이 주목한 시집이 2006년에 출간된 '아베르노'다. 아베르노는 고대 로마인에게 지하세계로 가는 입구로 알려진 호수를 말하는데, 이 시집에서 글릭은 페르세포네 신화를 현대식으로 바꾸어 삶 속에 드리운 죽음과 죽음 너머의 삶을 응시한다. 전생과도 같은 기억들을 통과하여 나오는 언어가 시가 되는 셈이다. 시인 김소연은 시집 '아베르노'의 해설에서 훼손된 것들을 되돌리는 그 언어 속에서 완전한 애도가 이루어진다고, 글릭의 비통한 시 세계에서 황홀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 각자는, 먼저 깨어나는 사람,/ 먼저 움칫 움직여, 거기서, 첫 새벽에,/ 그 낯선 이를 보는 사람" 시 '프리즘'에서 시인은 잠에서 깨어나는 연인의 눈을 통하여 익숙한 것과의 결별, 새로운 발견의 시선을 들려준다.

2014년 글릭에게 전미도서상의 영광을 준 시집 '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글릭이 특별히 아끼는 시집이다. 시집을 번역하면서 영어 'faithful and virtuous night'를 나는 오랜 고심 끝에 '신실하고 고결한 밤'으로 옮겼는데, 우리 주변에서 잊히고 있는 믿음직한 덕목인 신실함을 어떻게든 회복하고 싶어서였다. 시인은 나이 든 예술가의 목소리를 통해 어린 날의 기억을 들려주면서 삶이라는 여행을 한 바퀴 돌아보게 한다.

나희덕 시인은 시집 해설에서 글릭의 시를 "간신히 존재하는 사람의 시"라고 부른다. 지상에 거주하면서도 반쯤은 죽은 자들과 함께 사는 생. 어쩌면 우리가 나이 드는 과정이 점점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그 시간 속에서 어느덧 죽은 자들의 기억을 다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조금씩 증발하는 삶의 활기와 추억과 귀한 덕목들을 나지막하게 오래 말하는 것, 그래서 인생이라는 여행을 크게 돌아보게 하는 것, 잊고 있던 먼 기억을 통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맥없이 지워버린 가치들을 다시 살리는 것, 글릭의 시가 우리에게 전하는 마법이다.

이 겨울, 우리에게 죽음도 많고 슬픔도 많다. 글릭의 시를 읽으면서 이 세계에서 고통받는 작은 존재들,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말하는 입도 없이 그늘 속에서 살아온 존재들, 그러나 그 자체로 환한 빛을 발하는 수많은 이름 없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 작은 것들이 만드는 여린 빛을 서정적으로 회복한 글릭의 시는 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아직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수많은 상실을 기억의 방식으로 다시 앉히는 작업을 글릭의 시를 통해 해보면 어떨까. 그 치유와 애도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신실함의 가치를 회복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나는 또 시에 기대어 적조한 회색 계절의 빛에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여러분들을 그 길에 초대한다.

공동기획:KNU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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