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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먼 길을 온 것 같습니다. 제 삶에서, 그리고 제 시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이 자리가 어쩌면 나 자신도 모르는 내 기억 속 "빼앗긴 들"로의 초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상화 선생과는 국문학도 시절 졸업 논문 주제로 만난 어설픈 인연이 있습니다. 지금은 까맣게 잊어버린 절절하지도 치열하지도 않던 당시의 제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분이 시로써 통과해 간 「몽환병」 뒤편에서 저는 아직도 "잠도 아니오 죽음도 아닌 침울" 속에서 "흐릿한 꿈만 안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책상머리 시인입니다. 사적인 외출이 일 년에 몇 번 안 됩니다. 원고 청탁 전화를 받으면 가끔 "칩거 중이세요?" "지방에 사세요?" 이런 말도 듣습니다. 하지만 저는 40년 넘게 서울살이를 하고 있는 붙박이입니다. 쓰는 거, 읽는 거, 그리고 종일 고양이들 바라보는 거 말고는 별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작고 조용하게 사는 걸 좋아합니다. 그렇게 작아지다 보면 더 작은 세계가 자꾸 보입니다. 그래서 작은 세계를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작은 것은 무엇일까? 그걸 지키려면 무얼 해야 하나? 그런 생각들의 미로를 떠돌다 보면 결국엔 '소통'이라는 평범한 단어 속으로 귀가하게 됩니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어느 날 SNS라는 걸 시작했습니다. 문단 내 성폭력이라는 문제 제기를 외면할 수 없던 무렵이었습니다. 타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면서, 그것이 나의 마음과 섞이면서 작은 것들이 만들어 가는 어떤 움직임에 대하여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거대함과 완강함에 맞서는 작은 것들의 어떤 기류에 대하여 천천히 응시했습니다. 작은 힘, 작은 목소리, 작은 꿈과 작은 삶들의 세계… 그것이 저의 시집 『미기후』입니다.
올겨울엔 유난히도 눈이 자주 옵니다. 그런 날엔 집 앞과 골목의 눈을 치우는 것이 10여 년을 지켜 온 저의 일과 중 하나입니다. 밥 먹으러 오는 길고양이들의 통행을 걱정해서 그런 거지만 눈을 치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넓어져 사람들의 길을 트게 됩니다. 어떤 날은 사람들이 출근해 있는 오후에 혼자 치우고, 또 어떤 날은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한밤중이나 새벽에 혼자 치웁니다. 그렇게 골목은 새하얗게 텅 빈 채로 나의 첫발을 내딛기를 기다립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얼어붙을 눈덩이를 빗자루로 쓸어 내는 일이 글을 쓰는 행위 같기도 하고 글을 지우는 마음 같기도 합니다. 그것이 또한 연약한 생명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은 길을 터 주는 시와도 닮지 않았을까요.
고독하지만 행복한 노동입니다. 더욱이 따뜻하고 빛나는 상으로 시린 손을 감싸 주시니 영광입니다. 마음을 모아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상화 선생의 무거운 이름을 가슴 깊이 각인하겠습니다. 코로나19와 10·29참사로 인해 빼앗긴 게 너무 많은 이 땅 위에도 머지않아 봄은 올 것입니다. 끝까지 말을 잃지 않고 사람을 놓지 않고 고요히 가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를"(「시인에게」) 보고, 쓰고, 새기겠습니다.
☞이민하 시인은
1967년 전주에서 태어나 2000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미기후'가 있다. 제13회 현대시작품상, 제20회 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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