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도시의 역사는 도시민의 자부심
원삼국시대 대구인(人)들이 축성했던 달성토성은 일제강점기 일본 신사가 들어서면서 훼손된 뒤 1970년 동물공원으로 변질됐다. 대구대공원 조성 사업이 표류하면서 동물원 이전 작업마저 하세월이다. 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 |
서울·평양과 함께 '조선 3대도시'
경상감영 정문은 엉뚱한 자리에
달성토성·고려 왕건 관련 유적 등
대구 바로 알리기 위해 복원 시급
# 한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대구에서 일어난 '2·28민주운동'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대구시민은 10명 중 7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최근 실시한 인식조사에서 나머지 3명 중 1명은 2·28민주운동 자체를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 조선시대 경상도의 수부(首府)로서 400년 이상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있던 대구는 한성(서울), 평양과 함께 조선 3대 도시였다. 지금은 부산과 인천의 인구가 대구보다 더 많지만, 당시 두 도시는 동래부(府)와 인천부만 존재했을 뿐이다. 대구는 한마디로 영남의 수도였다. 하지만 대구에는 경상감영임을 알 수 있는 유적이 경상감영공원 내 선화당(宣化堂), 징청각(澄淸閣)과 달성공원에 있는 관풍루(觀風樓) 정도뿐이다. 그마저도 경상감영의 정문인 관풍루는 원래 자리(옛 대구병무청)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다. 경상감영보다 규모나 역할 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았던 강원감영(원주), 충청감영(공주), 전라감영(전주)은 대규모 복원사업을 통해 재조명되며 역사성을 살려 대조적이다.
# 지난해 10월12일 대구 남구 캠프워커 반환부지 내 관제탑이 논란 끝에 철거됐다. 문화재 관계자와 역사학자들은 대구의 근현대사를 나타낼 수 있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라는 이유로 존치를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관제탑 아래 토양 오염 등이 우려된다는 주장에 따라 사라지게 됐다. 대구의 상징물이라기보단 미군의 상징물이고, 환경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이 더 강했다. 관제탑 철거와 동시에 개발될 부지 내에 관제탑 상징물이 설치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는 상징물일 뿐이다. 차라리 이전을 통한 보존이 아쉬웠다는 평가도 나왔다.
# 과거 육안으로 화재를 가장 먼저 확인했던 대구 동부소방서 '소방망루'도 철거 위기에 놓였다. 2024년 신서혁신도시로 이전이 예정돼 있다. 1977년 설치된 동부소방서 소방망루는 상징적인 시설로, 대구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대구의 명물'로 인식돼 있다. 동부소방서와 함께 소방망루로 명성이 높은 경기 안양소방서의 소방망루는 어린이들의 체험장 등 교육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계묘년 새해를 맞아 영남일보는 '역사 도시 대구 복원'을 주제로 한 신년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대구의 역사는 대구시민들의 자부심이다. 과거와 오늘이 대화하는 제대로 된 역사는 글과 말을 넘어 물리적 공간과 흔적도 병행해야 한다. 역사를 길러낼 책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다.
3·1운동 당시 5천여 명이나 수감돼 서울 서대문형무소보다 더 많은 독립유공자가 옥고를 치른 것으로 알려진 대구형무소의 위치를 아는 대구시민은 몇 되지 않는다. 지금의 삼덕교회가 들어선 일대가 대구형무소 터다. 교회 한쪽 조그만 공간에 마련된 연혁판과 배치도, 몇 장의 사진만이 과거 이곳이 대구형무소임을 알리고 있다.
대구 중구청은 이곳에 '대구형무소 이육사기념관'(가칭)을 건립하기 위해 2021년부터 노력한 끝에 삼덕교회 측과 합의점을 찾아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2층 일부를 대구형무소 이육사기념관으로 조성키로 했다. 하지만 2021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해를 넘겼고, 올해까지 관련 예산이 중구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3년째 빈 공간으로 방치되게 됐다.
'경상감영'도 마찬가지다. 영남의 행정·군사 수도였던 대구의 위상에 걸맞은 대대적인 역사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달성공원의 관풍루를 원래 자리로 옮기는 복원 작업조차 어렵게 됐다. 이미 다른 이질적 건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대구시가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경상감영 복원을 미루는 사이, 다른 지역의 감영은 대부분 대규모 복원사업을 마치거나 마무리 중이다. 유적 하나둘 옮기는 방식으로는 경상감영을 제대로 복원할 수 없다. 경주의 왕릉 복원과 같은 조(兆) 단위 복원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말만 있을 뿐 실현되지 않고 있는 달성토성 복원 작업은 대구역사 길러내기의 첫 과제다. 달구벌의 모태 달성토성 복원은 '대구 역사 복원'의 시작점이라 할 정도로 중요하고 중대한 사업이다. 원삼국시대 대구인(人)들이 축성했던 달성토성은 일제강점기 일본 신사가 들어서면서 훼손된 뒤 1970년 동물공원으로 변질됐다. 대구대공원 조성 사업이 표류하면서 동물원 이전 작업마저 하세월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대구에 대한 재조명도 반드시 필요하다. '대구가 없었다면 고려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건과 관련된 숱한 얘깃거리는 관광자원으로 충분한 소재다. 평산 신씨 종친회에서 세운 동구 지묘동의 신숭겸 사당 충렬사와 파군재삼거리의 신숭겸 장군 동상 등이 있지만 이들 시설에 대한 관리 등은 모두 대구시가 아닌 평산 신씨 종친회에서 맡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숭겸 장군 출생지로 알려진 전남 곡성군은 생가 복원을 비롯해 용산재 건립 등을 통한 '신숭겸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진척이 더딘 대구 중구의 한옥마을과 옛 골목길 또한 대구의 역사다. 가수 김광석 길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듯, 대구의 한옥마을과 골목길도 보다 과감한 투자와 대승적 차원의 주민 설득 등을 통해 지금부터라도 '대구 바로 알리기' 차원에서 재조명에 나서야 한다.
대구의 역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축조된 건물 또한 대구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가 있듯, 남아 있는 대구의 일제 잔재는 역사에 근거해 제대로 알려야 하고, 건축물과 시설물은 그 자체로의 역사성을 인정하며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건물이 1913년 준공된 대구역사(驛舍)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당시 돋보이는 형식의 아름다운 건물이었지만, 1978년 지하차도와 대구시민회관이 들어서면서 역사 면적이 반 토막 난 뒤 1999년 민자역사 공사에 들어가며 철거됐다. 현재 대구역사는 현대식 롯데백화점 건물로 바뀌어 있다.
1923년 붉은 벽돌조 3층 박공지붕에 기와를 얹어 지어진 대구복심(고등)법원 건물은 광복 후 대구고등법원으로 사용되면서, 법원이 있는 자리라고 해서 '법 앞에 평등하고 공평한 일 처리'에 대한 바람을 담아 동네 이름까지도 공평동이 됐다. 이후 1975년 전국 최대 규모의 대구시립도서관, 1986년 대구백화점 별관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1999년 결국 뜻없이 철거되고 만다. 50대 이상이라면 학창시절 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을 모르는 대구사람은 없다. 하지만 당시 이 건물이 대구복심법원 건물이었음을 아는 이 또한 거의 없다.
임성수기자 s018@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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