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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35] 中 베이징 자금성, 980채 8707칸 방…세계 최대 규모 궁궐…'수도 천도' 황권의 지고무상·독존 구현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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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가 둘러싸고 있는 자금성 북쪽의 모습.

난징 황궁 본떠 베이징에 자금성 건립
남방서 온 장인 등 인부 100만명 동원
완공 6개월 만에 벼락으로 화재 발생
3개 대전 포함 상당수 전각 불타기도
명·청 왕조 황제 24명 500여년간 기거
중심건물 태화전서 즉위·출정식 거행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베이징을 찾는 관광객의 필수 방문지인 자금성.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시절인 1421년부터 1924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쫓겨날 때까지 500여 년 동안 명·청 왕조의 24명 황제가 살면서 중국 대륙을 통치하던 궁성이다. 현재 중국의 권부가 자리하고 있는 곳도 예전 자금성의 일부인 중난하이(中南海)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자금성(紫禁城)'은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영어로는 'Forbidden City'로 번역된다. 세계 건축 사상 최대 규모로 평가받는 자금성은 동서 760m·남북 960m의 직사각형 대지(72만㎡)에 건물 980채(8천707칸의 방)가 대칭적으로 들어서 있다. 남쪽 오문(午門)에서 북쪽 신무문(神武門)에 이르는 남북 중심선을 축으로, 동서 양쪽에 대칭되게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주변에는 높이 11m의 성벽과 너비 52m·깊이 6m의 해자(물길)로 둘러싸여 있다.

두 번을 방문해 남쪽 오문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주요 전각들을 지나가며 주마간산식으로 둘러보았는데, 규모에 놀랐으나 별 감동은 없었다. 별 감동 없이. 이 방대한 건축물인 자금성은 언제, 어떻게 건축되었을까.

◆명나라 영락제 때 지어 천도

자신의 조카이자 명나라 2대 황제인 건문제를 즉위 4년 만에 폐위시키는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키고 황제에 오른 영락제는 당시의 수도인 난징을 꺼렸다. 그래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 있는 지금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길 마음이었다.

영락제는 반대를 무릅쓰고 1406년(영락 4년) 베이징 천도를 결정하고, 이듬해부터 난징의 황궁을 모방해 베이징 궁궐 건축을 시작하도록 했다. 이후 오랫동안 건축자재 확보 등 준비를 한 후 3년6개월의 본격적인 건축 공사를 거쳐 1420년 말에 완공했다. 완공 전인 1409년 황제의 임시거처가 마련되자 영락제는 이때부터 황궁이 있는 난징보다는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영락제는 1421년 정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건축에 사용될 목재는 멀리 쓰촨성, 윈난성에서 녹나무 등을 벌목해 가져왔다. 인부 1천여 명을 산속에 투입하면 작업을 끝내고 살아 돌아온 이들은 500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벌목작업만 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대리석은 허난성의 쑹산 등지나 베이징 근방 지역에서 채취해 공급했다. 대리석을 채취하는데 인부 10만명, 병사 6천명이 투입됐다. 기단부와 조각에 사용될 흰 대리석(漢白玉石)은 자금성에서 50㎞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그중 가장 무거운 돌은 200t에 육박했다. 이런 돌은 마차로 운반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인부들이 석재를 이동시킬 도로 500m마다 우물을 파고, 겨울에 우물의 물을 퍼내 도로를 빙판으로 만들어 운반했다. 노새 1천마리가 대리석을 끌고 베이징까지 한 달 정도 걸려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자금성을 건축하기 위해 남방에서 온 장인 10만명 등 100만명이 동원됐다. 그리고 쑤저우 등지에서 생산한 벽돌 1억개, 각종 도자기 기와 2억개 등이 소요됐다.

1420년 12월 완성된 자금성에서 1421년 정월 성대한 낙성식이 치러졌다. 영락제는 황실 가족과 수많은 환관, 궁녀들을 거느리고 새로 지은 궁궐에 들어갔다. 그런데 완공 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벼락이 쳐서 자금성의 중심 건물인 3개의 대전(大殿)을 포함한 상당수 전각이 불타버렸다. 가뜩이나 천도에 말이 많은 상황에서 힘들여 지은 궁전이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벼락을 맞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급기야 다시 난징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영락제는 환도론을 주장한 신하 한 사람을 죽이고서야 겨우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몽골을 정벌하러 나갔다가 원정지에서 객사해 북경에 돌아왔을 때도 그의 관은 잿더미가 된 자금성에 안치되었다가 능묘에 매장되었다. 불탄 자금성은 19년 후인 1440년(정통 5년)에 중건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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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태화전. 자금성 최대 건물로 동서 길이 11칸(64m), 남북 길이 5칸(37 m), 높이 28m이다. 대리석 기초까지 합하면 높이가 35m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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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중앙에 있는 대리석 조각물인 운룡계석(雲龍階石). 태화전 뒤의 보화전 운룡계석이 가장 큰 운룡계석인데 길이 16.5m·폭 3.07m·두께 1.7m이고, 무게는 200t이나 된다. 흰 대리석에 용과 구름 등이 새겨져 있다.

◆황제 권위 구현한 궁궐

자금성은 황제 권한은 지고무상(至高无上)하다는 봉건사상을 구현하고 있다. 그래서 궁전의 높이, 위치, 색상, 문에 박는 못의 수량 등은 모두 엄격한 규정과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의 황궁 건축은 예전부터 확립된 원칙이 있었다.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곳은 궁전 건축의 전면에, 그리고 생활과 오락을 즐기는 공간은 뒷부분에 배치한다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이 기본이다. 그리고 좌측에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宗廟)가 있고, 우측에 토지신과 곡신(穀神)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둔다는 '좌조우사(左朝右社)'의 원칙, 주요 핵심 건축물을 남북으로 일직선을 긋고 그 선상에 차례대로 배치하고 동서로 대칭을 맞추어 건물을 짓는 '중축대칭(中軸對稱)'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자금성의 전삼전을 비롯해 후삼전, 중요한 궁문과 광장 등은 모두 중축선 위에 배치하고 있다. 궁전 내부의 부속 건물들은 대칭으로 양측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고대 사회 황권의 지고무상과 독존의 의미를 체현하는 것이다.

자금성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남쪽의 정양문(正陽門), 대명문(大明門), 승천문(承天門), 단문(端門), 오문(午門), 황극문(皇極門) 등 성문 여섯 곳을 거쳐야 한다. 승천문과 황극문은 청대에 천안문(天安門)과 태화문(太和門)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오문부터 실질적인 자금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태화문에 들어서면 일직선으로 삼대전인 전삼전(前三殿)과 후삼전(後三殿)이 자리 잡고 있다. 전삼전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다. 특히 태화전은 즉위식이나 출정식 등 국가적인 의식이나 행사를 치렀던 곳으로, 이 황궁의 중심을 이루는 건축물이다. 자금성 최대의 궁전인 태화전은 동서 길이가 11칸(64m), 남북 길이는 5칸(37m), 높이는 28m이다. 대리석 기초까지 합하면 높이가 35m나 된다.

후삼전은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을 말한다. 황제는 이곳에서 정무를 보거나 황후·궁녀들과 일상생활을 했다. 후삼전의 뒤쪽은 정원인 어화원(御花園)으로 통하고, 그 뒤에는 자금성의 북문이 있다.

건천궁은 황제가 일상적인 정무를 처리하는 궁전이다. 이곳 황제 어좌 위에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액자 뒤에 황태자의 이름을 써서 숨겨 두었다가 황제가 죽은 후에 개봉, 밀지(密旨)와 맞추는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을 옹정제부터 실시했다.

곤녕궁에는 황제가 신혼을 치르던 방과 침대가 있는데, 침대 커튼에는 황제가 자식 복이 많아 후계자들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동자 그림이 수놓아져 있다.

곤녕궁 뒤에 있는 황실 정원인 어화원은 면적(80m×140m)은 작지만, 수목과 정자, 연못 등의 배치가 정교롭고 기이하다. 괴석들을 쌓아 만든 10m 높이의 퇴수산(堆秀山)과 그 위에 지은 어경정(御景亭)이 가장 눈에 들어온다. 어경정은 제후 비빈들이 중추절이나 칠석 등 명절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던 곳이다. 이와 더불어 만춘정(萬春亭), 부벽정(浮碧亭), 천추전(千秋亭) 등 정자와 누각, 소나무(백송)와 측백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다.

◆건축 책임자는 괴상

난징의 황궁을 본떠 만든 자금성 건축의 책임자는 도목수 괴상(1399~1477)이다. 장쑤(江蘇)성 출신인 괴상은 황궁 건설 전문가인 부친에게 건축 기술을 배워 가업을 이었다.

1416년에 이르러 베이징 천도를 반대하던 신하들도 마침내 동의하면서 천도가 확정된다. 이후 본격적인 황궁 건설 작업이 진행되고 1420년에 완공되는데, 괴상이 베이징으로 들어간 것은 1417년이다. 그는 공부영선소승(工部營繕所丞)이라는 높은 직책을 맡아, 황궁의 핵심인 삼대전(태화전·보화전·중화전)과 양궁(건천궁·곤녕궁), 천안문 등 주요 건물의 건축을 주관했다. 뛰어난 건축 능력을 발휘한 그는 전설상의 장인인 공수자(公輸子)에 비견되기도 했다.

괴상은 천안문을 처음 설계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자금성을 건축하는데 동원된 후 첫 번째 임무가 황궁의 정문인 승천문(承天門·지금의 천안문)의 시공이었다. 당시 22세였던 괴상의 주도로 자금성 완공 때 함께 준공되었다. 문무백관들의 찬사를 받았다.

괴상이 설계를 책임지고 건설을 지휘한 승천문은 처음에는 삼층누각 형태의 목패방(木牌坊)이었다. 1457년 이 목패방은 불행하게도 벼락을 맞아 불에 타버렸다. 1465년 괴상은 67세의 고령으로 다시 나서서 승천문 중건의 책임을 맡는다. 중건된 승천문은 규모가 원래보다 컸고, 거대한 궁전식 건축물로 확대됐다. 현재 천안문의 규모와 양식은 당시와 별 차이가 없다. 삼대전이 큰불로 소실된 후 정통 연간(1436~1449)에 진행된 삼대전 중건 공사도 그가 이끌었다.

'헌종실록'은 괴상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정통 이래, 무릇 건축을 할 때면 괴상에게 맡겼다.' '그가 도면을 그리면 모두 황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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