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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주말&여행] 전북 임실 구담마을, 섬진강변 산비탈에 10여가구 둥지…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

202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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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담마을 매화 꽃잎 속에 섬진강이 흐른다. 강 건너는 순창의 회룡마을, 멀리 희미한 것은 용궐산이다. 대 슬래브의 허연 가슴 때문에 용궐산이구나 알아본다.

장산마을을 지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살고 있다는 마을이다. 커다란 느티나무 너머로 시인의 거처가 한눈에 들어차고 방진으로 늘어선 산수유나무가 노란 산형꽃차례를 곡진하게 피워내고 있다. 마을 끝자락에서 길은 눈에 띄게 좁아진다. 명목은 자전거길이지만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군데군데 대기차선이 마련되어 있다. 이팝나무와 벚나무가 가로수로 이어지고 띄엄띄엄 자리한 벤치와 시를 새겨 놓은 바위가 연산홍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손 뻗으면 참방, 손끝이 시리게 닿을 것만 같은 강에는 눈(雪)빛의 바위들이 툭툭 떨어져 있다. 문득, 물굽이 따라 청둥오리 떼가 선회한다. 이 길을 옛날에는 지게길이라 했고 지금은 '시인의 길'이라 부른다. 천담마을을 지난다. 길가에 동자바위가 동그마니 서 있다. 그의 일그러진 입술에서 울음소리 흐른다. 강폭이 넓어졌다. 동자바위의 눈물 때문일지도 모른다.

20년전 매화나무 심어 '매실의 고장' 수식어
옛날엔 닥나무 많아 질 좋은 한지 생산 유명
1998년 이광모 감독 영화 촬영 현장비 세워
장산~천담~구담마을 이어지는 물길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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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담마을은 강변 산비탈에 둥지를 친 듯 앉아 있다. 지붕을 세어보니 약 12개 정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있으니 대략 10가구 정도일 것이다.

◆구담마을

천담마을의 끝자락에서 매화나무 가로수가 시작된다. 비가 후드득 내리기 시작했고, 우중 매화는 더없이 청초하다. 매화나무는 1.5㎞ 정도 이어지다 자취를 감춘다. 백미러 속으로 마지막 꽃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그래도 서운하지 않은 것은 활짝 열린 골짜기와 그 밑동을 적시는 강물과 눈빛의 바위들과 흔들리는 갈대들과 멀리 보이는 한 줌의 촌락들 때문이다. 길이 강과 조금씩 멀어지며 산을 오른다. 하나둘 집들이 나타난다. 길가에 무더기로 쌓인 비료 포대에 박○○, 김○○, 공○○, 허○○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다양한 성씨들이 모여 사는구나. 그리고 다시 매화가 우수수 이어지더니 버스정류장과 뾰족뾰족 잎만 오른 수선화와 '매실의 고장 구담마을'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길의 끝이다.

길 끝 구담마을은 강변 산비탈에 둥지를 친 듯 앉아 있다. 지붕을 세어보니 약 12개 정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있으니 대략 10가구 정도일 것이다. 1680년쯤 해주오씨가 정착해 형성되었다는 구담마을은 마을 앞 섬진강에 자라가 많다 하여 구담(龜潭)이라고도 하고, 또 저 섬진강에 아홉 개의 소(沼)가 있어 구담(九潭)이라고도 한다. 옛 이름은 '안담울'이다. 강 건너 보이는 지형이 마치 학이 알을 품은 형세와 같다고 생긴 이름이다. 지금도 안담울이라 즐겨 부르는 이들이 많다.

마을은 약 20년 전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수익창출을 위해 하나둘 매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후 '매실의 고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지금 마을의 매화나무는 조금씩 무리 지어 듬성듬성 환하다. 새알 같은 집들, 새알 같은 텃밭들, 새알 같은 꽃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마을회관 옆 쉼터 유리벽에 김용택 시인의 시가 적혀 있다. '당신을 만나/ 안고 안기는 것이/ 꽃이고 향기일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지금 그리고 가고 싶어요.' 하나뿐인 당신이 온 우주이듯 한 송이 꽃도 온 우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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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숲을 이룬 구담마을 당산. 숲 가운데에 한국영상자료원이 세운 이광모 감독의 1998년 영화 '아름다운 시절' 영화촬영 현장비가 있다.

◆아름다운 시절

마을의 남쪽 끝에 당산 숲이 강을 내다보고 있다. 느티나무와 서어나무가 숲을 이룬 당산 가운데에 소박한 제단이 있다. 슬쩍 봉긋한 것은 삼신할머니 무덤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이 세운 영화촬영 현장비가 있다. 이 마을에서 이광모 감독의 1998년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촬영했다. 6·25전쟁 때의 이야기다. 감독은 '비록 괴롭고 아픈 시절이었지만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말하고 싶은 것을 잘 말하기 위해 전국을 7개월간 돌아다닌 끝에 구담마을을 만났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 한 가족이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가는 모습이 4분 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고난과 절망의 시대에도 늘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고 사셨던 할아버님과 아버님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자막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 산길은 이곳이 아니지만 그들의 뒷모습은 저 강을 닮았다.

매화 꽃잎 속에 강물이 흐른다. 강 건너는 순창의 회룡마을이다. 멀리 희미한 것은 용궐산이다. 대 슬래브의 허연 가슴 때문에 용궐산이구나 알아본다. 지난해 이른 봄 용궐산 하늘길에 올랐을 적에 이곳 구담마을을 마음에 담아두었더랬다. 이 물굽이를 보려고. 사람들은 섬진강 오백리길에서 임실의 장산, 천담, 구담을 거쳐 용궐산 장구목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가장 아름다운 물굽이로 꼽는다. 그 아름다운 물굽이를 전부 보았으니 으쓱하다.

◆산책로 따라 강변으로

긴 연통에서 불내가 난다. 어디선가 카레 냄새가 난다. 어느 집 축대에 노란 수선화가 두어 송이 피었다. 어느 집 모퉁이에는 홍매 한 그루가 입을 꼭 다물고 서 있다. 마을 안을 이리저리 배회하다 강 쪽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따른다. '꽃이 핍니다/ 꽃이 집니다/ 꽃피고 지는 곳/ 강물입니다/ 강 같은 내 세월이었지요.'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 모양의 바위에 김용택 시인의 시 '강 같은 세월'이 새겨져 있다. 머리와 꼬리는 아직 겨울잠 자고 등만 내놓은 구렁이네 하곤 저 아래 미동 없는 강을 본다. 매화가 제법 화사한 작은 밭을 지난다. 작고 하얀 꽃잎이 검은 길 위에 점점이 내려앉았다. 한 줌 푸른 대숲 속으로 오솔길이 가파르게 내려간다. 저 아래 수묵화 같은 풍경 속에서 세 여인이 까르르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 앞서 끌고, 뒤서 밀며, 세 사람은 같은 속도로 오르막을 오른다. 그녀들을 모로 스치며 가운데서 환히 웃는 여인의 손 주름을 보았다.

'징검다리 가는 길' 앞에서 잠깐 고민을 한다. 돌계단을 따라 곧장 강변으로 내려설 수도 있고 조금 길게 휘돌아 갈 수도 있다. 먼 길을 간다. 강이 가까워지자 '구담마을 닥나무 삶던 솥'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덕치면은 옛날부터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물이 깨끗해 질 좋은 한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제는 사양길에 들었지만 구담마을 앞 강변에는 지금도 돌을 쌓아 만든 120년 된 닥나무 가마솥이 있고 삶은 닥나무를 두들기던 너벙바위가 많다고 한다. 쏜살같이 내려가 두리번두리번 '닥나무 삶던 솥'을 찾는다. 까맣고 푸르고 붉은 돌로 쌓아올린 '솥'을 찾아내지만 어떻게 삶는지 상상이 안 된다. 돌솥밥 정도만 겨우 생각해 내는 조무래기가 뭘 알겠나. 저기서 한그루 매화나무가 부른다. 꽃 너머로 평평한 바위가 보인다. 오호라, 너벙바위는 알겠다. 건너편 회룡마을에도 군데군데 꽃나무가 희다. 두 마을을 잇는 징검다리는 오늘 낮고 긴 낙수대다. 세 여인이 떠난다. 부릉 시동을 건 차에서 한 여인이 후다닥 내린다. 그녀는 어느 집 축대로 달려가 노란 수선화를 카메라에 담는다. 아름다운 시절이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광주방향으로 가다 순창IC에서 내린다. 순창IC교차로에서 12시 방향으로 나가 직진, 관서삼거리에서 좌회전, 순창고교교차로에서 우회전해 27번 국도를 타고 직진한다. 약 10㎞ 정도 가다 장암교차로에서 회문산, 장암리 방향으로 빠져나가 우회전, 50m터 앞에서 다시 장암리 방향으로 좌회전해 400m 앞 천일슈퍼에서 우회전해 계속 직진하면 장산마을, 천담마을 지나 길 끝에 구담마을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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