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뭉개온 연금개혁
정부도 국회도 나 몰라라
결정장애 겪는 관료, 정치인
당신이 결정하라고 속삭여
그렇다면 AI가 답하는 게
논설실장 |
국민연금 개혁이 노무현 정부 이후 20여 년간 '미루기 정책 타령'이 되고 있다. 이게 그렇게도 어려운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엄습한다. 국회에는 '국민연금개혁특위'란 게 설치돼 있다. 지난 7일 주호영 특위 위원장(대구 수성구갑)은 기자회견에서 "오는 29일 종료되는 21대 국회에서는 특위를 더 이상 가동할 수 없게 됐다. 22대 새 국회에서 다시 논의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여야가 현행 9%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데는 찬성했으나, 받는 연금인 소득대체율(쉽게 말해 평생 받은 평균임금 대비율)을 현행 42.5%(2028년까지 40% 인하 예정)에서 '43% 혹은 45%'로 올리는 안을 놓고 팽팽히 맞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불과 2% 차이였다. 앞서 국회 특위는 시민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합숙 워크숍까지 거친 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놓고 투표를 진행해 2개의 최종안을 도출한 바 있다.
주 위원장 발표 이틀 뒤 윤석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국민연금 개혁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역대 정부가 연금 개혁을 방치했지만 우리는 6천 페이지에 이르는 충분한 자료를 제출했다. 국회는 검토하고 선택만 하면 되도록 했다." 심오한 연구 끝에 선택지를 제시했는데, 국회가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들렸다.
더 거슬러 가보자. 지난해 10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 개혁안을 내놨다. 구체적 개혁 수치를 생략해 '맹탕 개혁안'이란 맹비난을 받았다. 국회와 함께 사회적 논의를 거친다고 했는데, 속마음은 정부는 결정하지 못하겠으니 국회가 알아서 하라는 하나 마나 한 개혁안에 다름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보험료율을 올리는 인기 없는 정책을 피하려고 '4지 선다형 안'을 펼친 것보다 더 못하다는 비아냥이 나왔다. 물론 문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을 뭉개고 없던 일로 했다.
필자는 지역 국민연금 자문위원이다. 몇 차례 회의에 참석하면서 연금의 역사나 기금 운영의 정보를 좀 더 접하게 됐다. 이 기회에 정리하면 첫째, 국민연금은 엄청 좋은 제도이다. 보험회사가 유혹하는 사연금과는 비교불가 우위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1천조원이 넘는 적립기금은 당분간 늘어나겠지만 2055년 전후로 소진이 예측된다. 셋째, 그래서 기금 소진 시기를 늦춰야 한다. 아니면 막대한 국가재정, 즉 세금이 필요하다. 넷째,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다는 한국의 인구감소는 연금에서도 미래세대 부담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를 배려할 장치가 필요하다. 다섯째, 그래서 지금부터 보험료와 받는 연금의 수정이 필요하다.
흔히 '정책결정'이란 용어를 많이 쓴다. 정책은 결정이 수반된다는 뜻이다. 결정 없는 정책은 무의미하다. 연금개혁은 복잡한 수학공식과 통계가 필요한 사안이지만, 크게 보면 이도 정책결정의 범주에 불과하다. 누군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공무원이 있고 정치인이 있다. 연금 개혁을 지켜보면서 이해 불가한 대목은 그 어떤 엘리트 공무원도 국회의원도 국민연금은 이렇게 가야 한다며 국민을 향해 절절히 호소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는 점이다. 모두가 '나는 마음이 약하다. 당신이 결정하라'고 속삭인다.
현대인은 '결정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정부 고위관료든, 국회의원이든 혹은 국민연금 관계자이든 "우리는 결정장애를 앓고 있다. 이해해 달라"며 되뇌인다면 차라리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겠다. 그러면 모든 수치와 산식을 주입한 다음 AI가 결정하라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라 녹봉은 AI에게 주기로 하고.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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