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마추픽추 여행계획
사정으로 실천은 못했지만
페루가 아니면 또 어떤가
운동하고 소주한잔 나누는
소중한 벗들이 있는게 행운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
모처럼 징기스칸의 마추픽추를 흥얼거렸다. 징기스칸하면 먼저 몽골이 떠오르겠지만, 독일의 6인조 혼성 그룹이다. 지금이야 K-POP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지만, 7080세대에는 팝송이 대세였다. 그룹명처럼 징기스칸(Dschinghis Khan)은 독특하게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 지명 등을 노래의 소재로 삼았다. 마추픽추(Machu Picchu) 역시 그들의 히트곡 중 하나이다.
이제는 낀 세대가 되어버린 7080도 한때는 신세대였다. 국내 대중가요로는 문화적 갈증이 충족되지 않아 통키타를 치며 팝송을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다. 7080인 필자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히트했던 노래가 징기스칸의 마추픽추(Machu Picchu)였다.
페루의 깊은 산속에 숨겨져 있는 신비한 도시를 노래한 것인데, "마추픽추, 마추픽추"하며 반복되는 후렴구가 중독성이 있어서 저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그렇게 흥얼거리던 친구들이 40대 중반이 넘은 어느 날, 50이 되면 함께 마추픽추 정상에 올라 이 노래를 부를 것을 결의하였다. 이미 몇 년 전 매달 10만원씩 모아서 몽골 여행을 다녀온 경험도 있었다.
항공료만 해도 클라스가 다른 남미이기에 여행경비로 이번에는 매달 25만원씩 3년을 모으기로 했다. "우리는 오십에 마추픽추에 간다"라는 제목으로 여행기도 한 권 출간할 계획이었다. 멤버 중 문예부 출신의 변호사와 교수, 아마추어 사진작가, 신문 만평을 그리는 화백 등이 있어 책을 낼 여건도 좋았다. 누군가에게는 술 한 잔 값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급여 중 상당한 부담이 되는 월 적립금을 고등학교 한 번 더 다니는 설렘으로 꼬박 3년간 모으며 기다렸다.
드디어 마지막 여행 출범을 계획하자고 모인 날, 친구 중 한 명이 몹시 미안해하면서 이혼소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친구가 이혼한다는데 혼자 놓아두고 마추픽추를 갈 수는 없지. 더욱이 그 이혼소송은 오롯이 변호사인 필자의 몫 아닌가. 그렇게 우리의 50세 기념 여행은 사라졌다.
지난 주말 그 친구들과 1박 2일로 환갑기념 국내 골프 여행을 다녀왔다. 라운딩 내내 마추픽추를 흥얼거렸다. 페루가 아니면 어떤가. 여행 사진 한 장 없으면 또 어떤가. 아직도 건강한 친구들과 푸르른 그린을 걷고, 저녁에 소주 한잔 기분 좋게 나누니 이런 행복이 따로 없었다.
반이 달라도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기다렸다가 같이 놀러 다녔다. 명절 때면 극장에서 성룡 영화를 보며 함께 배꼽을 잡았다. 다른 대학과 직장을 다녀도 짬짬이 어울렸다. 월남전에 참전하는 것도 아닌데 몇 시간씩 입영열차를 함께 타고 부대 앞까지 가서 배웅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정신없이 살면서도 와이프들의 질투어린 잔소리를 감수하며 만났다. 징기스칸 보드카를 마시고 몽골 초원에 누워 밤하늘 은하수를 보며 별과 인생을 노래했다. 고장 난 축음기마냥 매번 같은 이야기를 술안주로 수십 년째 반복하면서도 늘 새롭다는 듯 깔깔대며 웃는다.
오래된 친구는 바로 자신의 인생 기록 그 자체이다. 시대를 함께 하며 좋은 기운을 주고받으며 배려하고 위로하며 살 수 있는 소중한 벗들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자 행복이다. 2021년 12월20일자 '아침을 열며'에 기고한 "봄날은 간다"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필자는 간혹 주말에 근무하는 로펌의 맨 꼭대기인 39층에 올라 아무도 없을 때 노래를 부른다. 이번 주말에도 올라가서 "마추픽추"를 큰소리로 노래할 것이다. 오랜 세월 함께 해준 또 다른 가족인 친구들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추억을 듬뿍 담아.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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