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 올림픽 사격 선수단이 지난 8월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사격 25m 속사권총 은메달 조영재, 10m 공기권총 은메달리스트 김예지, 10m 공기권총 금메달리스트 오예진, 10m 공기소총 금메달리스트 반효진, 25m 권총 금메달리스트 양지인. 연합뉴스 |
올해 치러진 파리 올림픽을 보면서도 그랬다. 유도의 허미미가 석연찮은 심판의 판정 속에서 아깝게 은메달을 따고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고 있자, 내 의식은 갑자기 난데없이 1984년 LA 올림픽 유도 60kg 이하급 결승으로 '플래시백' 해버린 것이었다. 당시 은메달을 목에 건 후 시상대 위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눈물을 훔치던 한 잘생긴 청년은 바로 대구 계성고 출신의 유도 스타 김재엽 선수다. 그 분루의 상징과 같았던 장면은 다시 파리로 '디졸브'되며 동메달을 따고 해맑은 웃음을 짓던 유도 단체전 멤버들에게로 옮겨 간다. 전통적인 효자 종목이었던 유도는 현재 12년째 골드 소식이 없다. 그런데 선수들에게서 비통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동메달을 딴 것도 어디냐며 진심으로 방방 뛰며 기뻐하는 모습들.
그리고 이내 의식은 바로 김재엽이 드디어 승리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서울 올림픽 현장으로 나를 이끈다. 그때 포디움 위 그의 이미지는 마치 용포를 걸친 젊은 왕 같은 모습이었는데, 하필 그 날이 추석이라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랐다던 사연도 얼핏 기억이 난다. 그 위로 '컷인'된 이미지는 이번 파리에서 펜싱 금메달을 따낸 조각미남 오상욱 선수다. 김재엽 시절에는 그냥 국내 여고생들이 꺅꺅 비명을 질러대는 정도였는데, K-컬쳐가 SNS를 지배하는 오늘날에는 이 오상욱을 보며 전 세계의 여성들이 난리를 쳤다고 한다. 심지어 '잘생긴 사람은 왜 모두 한국 남자인가?'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흠.
'한국 남자'하니까 원조 '붕대투혼'으로 유명한 1988년의 한명우와 '악바리'로 유명한 1992년의 안한봉 등이 떠오른다. 상대와 레슬링하고 있는 당시의 그들을 보고 있자면 자기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신체가 뻣뻣해질 정도였다. 그들이 어깨 위에 짊어진 그 무거운 조국이 우리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금메달을 확정짓고 코치와 세레모니를 할 때도 상대와 싸우듯이 과격하게 뒹굴었다. 저러다 다친 머리를 또 다치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로다가. 좀 있다 시상대 위에서는 또 소년처럼 눈물을 훔치며 펑펑 운다. 생각건대 이건 전쟁터에서 생환한 병사들이 보이는 행동 패턴에 가깝다. 그들은 금메달을 따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에 대응되는 '몽타주'는 사격의 반효진, 오예진, 양지인이 보여준다. 파리 대회 당시 고작 16세, 19세, 21세에 불과했던 이 뽀시래기 세 사수들은 모두 장하게도 금메달을 따왔다. 내내 선두를 달리다가 슛오프까지 갔을 때 심정이 어땠냐고 묻자 양지인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가 이왕 파리까지 왔으니까 금메달을 따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라고 아이 같은 말투로 대답했는데, 그게 내게는 "이왕 놀이공원에 왔으니까 제일 큰 곰 인형을 따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와 같은 지극히 평화롭고 일상적인 대답으로 들렸다.
나이가 든 사람의 의식 속이 난잡한 타임머신인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와중에도 현재를 의식의 베이스캠프로 못 박고 매번 그곳으로 귀환하려는 노력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시간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과거에 매몰되는 순간, 나이 든 사람은 그 자체로 큰 민폐를 주게 되기 마련이다. 꽃 같은 자식들 알록달록 살아갈 세상에.
박지형 문화평론가
박지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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