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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16> 가스미가세키 빌딩의 자개장

2025-01-03

삼성재팬, 허름한 사무실서 도쿄 중심가 초고층 빌딩에 입성하다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가스미가세키 빌딩의 자개장
1970년대의 가스미가세키 빌딩. 당시 도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산케이뉴스 제공>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가스미가세키 빌딩의 자개장
1973년 도의문학저작상 시상식에서의 이병철. <호암재단 제공>
삼성재팬이 설립된 것은 1958년이다. 일본 도쿄 롯폰기의 삼성재팬 사무실은 허름하다. 어느날 이병철이 도쿄에 최첨단 빌딩이 세워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가스미가세키 빌딩이다. 이병철은 삼성재팬 사장에게 그 빌딩에 입주할 수 있도록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보래이, 도쿄 시내 한복판 가스미가세키에 일본에서 최고로 멋진 빌딩이 세워진다 카는데 우리도 거기에 꼭 들어가야 된대이." 삼성재팬은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의 삼성'의 본격적인 정보수집이 시작됐다.

일본서 초고층 시대 연 상징적 건물
삼성, 정관계 인사 총동원 입주작전
명문가문 모임 '日귀족회관'도 계약

韓 자존심 일본인에 보여주겠다 결심
나전칠기 명장 수소문 자개장 제작
길이 5m·높이 2.3m 거대작품 설치
회장실 방문 기업인 예술성에 압도돼


◆미쓰이 그룹의 야심작 빌딩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가스미가세키 빌딩의 자개장
오늘날 가스미가세키 빌딩.
<위키백과 제공, Joe Jones 촬영>
가스미가세키 빌딩은 일본 미쓰이 그룹의 야심작이었다. 가스미가세키는 도쿄 중심가의 지명으로 관청타운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광화문 한복판이다. 거기에는 에도시대에 도쿠가와 막부의 가신들인 260명의 번주들이 모여 살았고, 대저택들이 많았다. 새로 짓게 되는 가스미가세키 빌딩은 총 36층으로 당시에는 가장 높은 빌딩이었고, 가장 화려한 빌딩이었다.

34층에는 '일본귀족회관'이 입주계약을 이미 마쳤다. 귀족회관의 회장은 고노에 가문의 16대 당주이고 회원은 에도시대의 당상가인 107개 가문의 장손들이다. 당상가는 천황 아래의 가장 높은 신하를 말함이고, 당상과 당하의 구분은 천황이 사는 교토 어소의 청량전 전상각 계단을 오를 수 있는 당상가와 오를 수 없는 당하가 귀족으로 나뉜다. 즉 당상가는 에도시대에는 일본정계를 쥐락펴락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고 그 정점에 고노에 가문이 있다.

◆치열한 입주경쟁

새로 짓는 빌딩은 그 상징성 때문에 분양을 요청하는 기업들이 너무 많아 삼성재팬의 입주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삼성 측에서는 건물주인 미쓰이 물산과 접촉했다. 미쓰이 물산과는 충주비료 건설 당시 긴밀한 협조가 있었으므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가스미가세키 빌딩은 지상 36층, 지하 3층으로 그 높이가 당시 일본에서는 가장 높은 147m이다. 엘리베이터만 29기, 주차 대수만 500대로 당시 모두 최대·최고의 기록이다.

◆일본 최초의 현대식 빌딩 '가스미가세키'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가스미가세키 빌딩의 자개장
에도시대의 가스미가세키. 가스미가세키는 도쿄 중심가의 지명으로 관청타운이다. <일본도검월드 제공>
건물은 1965년 3월18일 착공해서 1968년 4월12일 완성됐다. '초고층 빌딩'으로의 첫 도전. '희망의 시대'의 상징이고 기술·자재 모두 일본산으로 사용됐다.

당시 33개월이라고 하는 단기간 공사는 놀라운 스피드였다. 입주업체 124곳, 근무자 7천여명. 당시 36층에는 전망대도 있었고, 나중엔 입장료 수입도 짭짤했다. 도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기 때문이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입장객이 너무 많아 교통정리를 할 정도였다. 이 빌딩은 지금도 가치적 측면에서는 최고를 자랑한다. 일본에서 초고층 시대를 연 상징적 건물이기 때문이다.

가스미가세키 빌딩에 입주하기 위해 일본 기업들의 치열한 로비가 시작됐다. 일본인들은 명함을 받으면 근무하는 지역과 빌딩을 꼭 본다. 그것이 그 회사의 위상이고, 근무자의 위상이다. 최고의 빌딩에 근무하는 사람은 일류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 롯폰기힐스 타워가 건설됐을 때도 입주 희망자가 난리를 친 적도 있었다. 롯폰기힐스 타워는 모두 5동이 지어졌는데 전부 50층 이상이다. 그 빌딩에는 일본 최대의 포털사이트인 라이브도어가 입주해 있고, 그 빌딩 식당가에는 젊은 여성들이 북적인다. 롯폰기 타워에 근무하는 젊고 멋진 청년사원들을 유혹하기 위해서이다.

◆가스미가세키 빌딩 입주로비

삼성재팬은 정관계 인사들을 총동원해서 입주로비를 벌였다. 아울러 건설 시공사 측인 미쓰이 물산에도 로비를 했다. 미쓰이 물산과 삼성은 충주비료 건설 때 옥신각신했지만, 결국 충주비료에 대한 기술제공을 했고, 이병철 회장은 정계의 관련 실세들과 골프, 식사접대 등 강력한 로비를 해서 수억달러의 차관을 얻어냈다. 특히 일본 외무성과 경제성, 상공부의 핵심 국장들을 설득하느라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가스미가세키 빌딩 입주 작전이 시작됐다. 삼성재팬의 간부들은 미쓰이 물산의 핵심 간부들을 상대로 로비전을 펼쳤고, 이병철은 정·관계 인사들을 상대로 로비전을 펼쳤다. 결국 건물입주 승인이 미쓰이그룹 쪽으로부터 허가됐다. 이병철의 인맥관리가 효과를 본 것이다. 이병철의 일생은 삼성 만들기, 대한민국 만들기가 목표였다. 그러려면 일본 재·관계 인사들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한국은 당시 자금과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있다면 그건 사람, 즉 인재뿐이었다.

이병철은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건물 최고 꼭대기 층에 일본 최고의 명문가문 모임인 귀족회관이 들어서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며칠간 생각 끝에 나전칠기라고 판단했다. 일본은 칠기의 국가였으나 나전, 즉 칠기에 조개·소라·전복 등의 껍질로 문양을 박은 것은 드물다. 칠기에 나전을 박는 기술이 매우 취약하다. 그것만큼은 한국을 따라잡지 못한다.

메구로가조엔이라는 도쿄의 유명한 호텔이 있다. 그 호텔의 로비에 길이 23.6m, 높이 1.4m의 옻칠 작품 '사계 산수화'가 있다.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도 한국인 전용복 선생이다. 일본에서는 그런 대형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없기 때문이다.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가스미가세키 빌딩의 자개장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나전칠기장을 넣어라

이병철은 비서실에 한국 최고의 나전칠기 명장을 찾아내 국내 최대의 나전칠기장을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결론은 통영에 거주하는 나전칠기 국보인 김봉룡 선생에게 의뢰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크게 만들라고 했다. 그 결과 길이 5m, 높이 2.3m의 거대한 자개장을 만들기로 했다.

삼성재팬에서 일평생을 보내고 훗날 삼성재팬 사장을 역임한 정준명 사장의 증언이다. "그렇게 큰 작품을 건물 안에 넣으려면 건물을 짓기 전에 미리 자개장을 넣어야 합니다. 그게 문제였어요. 당시 삼성재팬이 입주할 사무실은 31층으로 매우 높았습니다." 즉 31층 회장실에 그 거대한 자개장을 넣으려면 미쓰이 그룹 측에서 허가를 해주어야 했다.

미쓰이 물산과 협의했다. 미쓰이 물산 측에서는 자개장 하나를 넣기 위해 건설 중인 빌딩에 미리 창문을 넓히는 것은 공사에 지장이 너무 많다고 했다. 게다가 그렇게 큰 물건을 올릴 수 있는 곤돌라도 없다. 헬기를 동원하려면 너무 위험하고, 항구에서 쓰는 리프트를 가져오기에는 경비가 많이 든다. 결국 대형 곤돌라를 별도로 제작해야 했다.

이병철 회장은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의 자존심을 일본인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결국 미쓰이 측은 삼성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삼성과 미쓰이는 앞으로 계속 협력관계를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쓰이 물산에 삼성은 최대의 고객이었다. 이병철의 대단한 고집이었다. 남의 나라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 최대·최고·최초의 고층빌딩 용도변경까지 요구하면서 의지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삼성재팬은 도쿄 시내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일본 최고의 빌딩에 입주했다. 회장실에는 거대한 자개장이 병풍처럼 쳐져 있었다. 회장실을 방문한 일본 기업인, 미국 기업인들도 자개장을 보면서 그 예술성에 압도당했다. 삼성재팬 사원들도 명함에 '삼성재팬 본사 가스미가세키 빌딩 31층'이라고 글자를 박아 넣었다. 일본 내의 거래선들도 놀랐다. 삼성재팬이 일본의 기업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빌딩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빌딩에서 1972년 입사 이후 30년을 근무했던 정준명도 그 당시를 회고한다. "일본 거래선 사람을 만났을 때 명함을 주면 모두 놀랐어요. 사무실이 가스미가세키 빌딩 안에 있습니까"라며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본 것이었다.

정준명은 30년간 일본에서 받은 명함만 2만장이었다. 그게 삼성그룹의 재산이 됐다. 가스미가세키 빌딩 31층 삼성재팬은 이후 일취월장했다. 개척의 역사이고 성공방정식의 모델이었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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