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가치 곤두박질…고환율에 국내외 곳곳서 시름
지난 5일 오후 2시쯤 대구 중구에 있는 한 환전소가 찾는 손님이 없어 한적한 모습이다. 장태훈 기자 hun2@yeongnam.com 그래픽=장윤아기자 baneulha@yeongnam.com |
미국 보스턴에서 유학 중인 김모(29)씨는 최근 환율이 급등하면서 한숨이 깊어졌다. 유학생활을 한 지 이제 2년. 늦은 나이임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 유학길을 택했다. 하지만 고환율 날벼락에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해 휴학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비상계엄 사태 후 탄핵 정국으로 원·달러 환율이 1천400원대로 치솟은 게 결정타였다. 조만간 한국에 있는 부모님으로부터 송금받아야 할 금액만 3만달러~4만달러. 조금이라도 환차손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송금을 미루며 환율이 안정화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김씨는 "그간 별 탈 없이 학업에만 집중했었는데, 최근 환율이 급등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며 "졸업까지 2년 남았는데 고환율 양상이 지속될까봐 걱정이다. 학비를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요즘 아르바이트할 곳을 찾고 있다"고 했다.
연일 원·달러 환율이 고공행진하면서 유학생과 학부모, 해외 이민자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당장 생활비, 학비 등을 더 충당해야 할 상황이 되면서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는 양상이다.
6일 기준 원·달러 환율은 1달러당 1천470.50원. 비상계엄 전이던 지난달 2일 1천395.10원에서 같은 달 25일 1천449.30원까지 올랐다. 탄핵 정국 등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환율은 계속 오름세다. 원화 가치는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다.
유학비 송금 미루는 학부모
경제적 부담 늘어 걱정 태산
방학 어학연수 취소도 속출
국내 외국인 노동자도 한숨
"고향에 최소 금액만 보내"
원두·코코아값 줄줄이 인상
카페 등 소상공인도 큰 타격
딸이 미국 동부에 한 사립대를 다닌다는 권모(여·56)씨는 유학 비용 마련에 요즘 골머리를 앓고 있다. 1년간 든 유학 비용만 1억원 정도. 고환율에 1천만원가량을 더 지출해야 할 형편이다. 권씨는 "매일 환율 정보만 확인하고 있다. 딸에게 돈을 부쳐야 하는데, 당장 '돈 아껴서 써라'는 말만 했다"며 "원래 아이도 나가 있어서 미국을 방문하려 했는데, 상황이 안 좋아서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했다.
미국 뉴욕에 거주 중인 박혜민(여·30)씨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평소 미국·한국을 오가며 작가, 영어 교사 등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엔 100만원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한국에서 송금받을 금액만 3천만원인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박씨는 "한국에서 받을 돈을 미국 계좌로 넣어야 하는데, 환율이 치솟으면서 손해가 크다 "며 "환율이 안정될 때까지 뉴욕에서 임시로 달러를 빌려 생활비를 내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한국에선 알고 있을지 답답하다"고 했다.
필리핀 세부도 원화 약세로 곳곳에 서 곡소리가 들린다. 이곳에 거주하는 이모(61)씨는 "매달 한국 계좌로 입금되는 돈이 있는데, 현재 전혀 환전을 못하고 있다"며 "100만원을 환전하면 예전과 비교해 거의 10만원씩 손해본다. 현지 한인들 대부분이 처지가 비슷하다"고 했다.
유학·어학연수 취소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필리핀의 한 어학원에서 근무하는 박모(32)씨는 "최근 한국 학생 중 겨울방학을 맞아 어학연수나 유학을 예약해놓고 취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환율이 너무 올라 해외행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고 설명했다.
SNS에도 고환율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미국 유학 준비 중인 한 누리꾼은 X(옛 트위터)에 "항공권이랑 입학 전 묵을 숙소를 모두 결제한 상황인데, 환율이 너무 높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유학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어떡하냐"고 하소연했다.
국내 외국인 노동자, 소상공인들의 한숨 소리도 커지고 있다. 대구에 거주 중인 방글라데시 국적 로이 투샤르칸트(40)씨는 "저와 주변 외국인 친구들도 원화 가치가 떨어져 고향에 돈을 나중에 한꺼번에 보내려고 한다"며 "현지 가족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데, 딱히 방법이 없으니 최근엔 최소 금액만 보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달서구 두류동에서 프랜차이즈 카페를 운영하는 정모(여·56)씨는 "테이크아웃 전문점은 커피가 저렴하다는 장점만 믿고 장사한다. 그런데 고환율 탓에 원두값, 코코아값이 올라 기존 가격엔 판매할 수 없는 상황이다"며 "안 그래도 계엄 사태 후에 매출이 줄고 있는데, 가격까지 올리면 손님이 끊길까 봐 걱정"이라고 한탄했다.
박영민기자 ympark@yeongnam.com
조윤화·장태훈·구경모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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