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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봄 기다리는 성급한 마음에…'선비의 꽃' 매화 찾아나서다

2025-01-24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봄 기다리는 성급한 마음에…선비의 꽃 매화 찾아나서다
조희룡, '매화도', 종이에 채색, 113.2×41.8㎝, 고려대박물관 소장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봄 기다리는 성급한 마음에…선비의 꽃 매화 찾아나서다
김명국, '탐매도', 종이에 옅은 색, 54.8×37.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눈발에 옷깃을 여민다. 엄동(嚴冬)을 품은 천을산 매화나무를 보러 간다. 정상 부근 정자 옆에서 산을 지키는 두 그루의 홍매가 그들이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육사의 시 '광야'를 떠올린다. 추위를 깨고 나올 마알간 매화가 보고 싶다. 성급한 마음에, 눈 속의 매화를 찾아가는 옛 그림을 펼쳐본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매화도의 대가 조희룡
용이 승천하듯 역동적이고 화려한 묘사 돋보여
수묵에 담은 매화의 지조·절개 조지운 '묵매도'
달빛 아래 옹기종기 피어 있는 고고한 자태 일품
옛 그림 통해 선현들의 매화 사랑 느낄 수 있어


◆신잠과 김명국의 '탐매도'

탐매(探梅)에 나선 그림 중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의 '설중탐매도(雪中探梅圖)'가 있다. 가로로 긴 화면에 나귀를 탄 선비와 시동이 매화를 만나는 장면이 드라마틱하다.

이 그림을 그린 신잠은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증손자로,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정계 진출이 막혔고, 당쟁에 얽혀 17년간의 귀양살이를 했다.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살면서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으며, 그림을 그렸다.

시에 능하고 예서와 초서, 행서에 달인이었던 신잠은 난초, 대나무 그림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문인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묵죽에는 현감 신잠이 있는데(墨竹則有縣監申潛), 두성령(杜城令) 이암(李巖, 1507~1566)의 영모화(翎毛畵)와 비교할 만하다"고 썼다. 신잠의 '설중탐매도'는 봄이 오기 전 제일 먼저 피는 매화를 보러가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고사를 그린 것이다.

방한모를 쓴 선비가 나귀를 타고 파교를 건너는 중이다. 눈이 소복이 쌓인 산 속에 매화가 만발하다. 매화를 본 선비는 뒤 따르는 시동을 보며 흡족해 한다. 화면 오른쪽에는 바위를 뚫고 나온 매화나무에서 꽃이 활짝 피었다. 잔설을 인 두 그루의 나무가 웅장하다. 그 아래 시동이 선비를 향해 걸어간다. 눈 덮인 바위와 숲을 녹색으로 처리하여 신선한 기운을 품었다. 깊은 숲 사이로 두 줄기의 폭포가 우렁차다. 그 아래 다리를 설치하여 언덕을 연결해 두었다. 왼쪽 끝에 고풍스러운 매화가 활짝 피어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 선비에게 매화향은 한 해의 버팀목이 된다. 매화 향기에 심취한 선비가 타고 가던 나귀에서 내렸다. 가까이서 매화를 보기 위해서다. 시동이 술병을 대령하고 선비 옆에 섰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1600~1662 이후)의 '탐매도(探梅圖)'에 나오는 장면이다.

김명국은 도화서 화원으로 미술 비평가들이 꼽은 신필(神筆)의 화가이다.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通信使) 수행화원으로 다녀올 만큼 일본에서 그의 선승화가 높은 인기를 끌었다. 대표작인 '달마도'가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역수입된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다. 문인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는 김명국의 그림을 보고 "인물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붓과 먹은 한데 어울려서 100년 사이에 아마도 이런 그림을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며 극찬했다.

도석(道釋)인물화에 뛰어난 김명국은 '탐매도'에도 기량을 발휘했다. 대나무 지팡이를 든 선비의 과감한 옷 필선이 인물의 뼈대를 살렸다. 매화를 보는 선비의 옆모습에서 섬세한 표정이 읽힌다. 술병을 들고 있는 시동의 얼굴이 해맑다. 산의 능선과 바위에 농담을 살려 선으로 대범하게 처리했다. 간략하면서 청량하다. 고요한 설경 속에 매화 피는 소리만 가득하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하늘로 뻗은 백매가 고고하다. 옆으로 뻗은 다른 가지에서 핀 매화도 어여쁘다. 선비는 마음 속 깊이 매화향을 호흡한다.

◆조지운과 조희룡의 '묵매도'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봄 기다리는 성급한 마음에…선비의 꽃 매화 찾아나서다
조지운, '묵매도', 비단에 수묵, 51.2×35.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은은한 달빛이 방 안을 비춘다. 선비는 방문을 열어 달빛 아래 빛나는 매화를 본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그 가락을 간직하고(桐千年老恒藏曲)/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고 했다. 문장가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시구다. 이에 화답하듯 매창(梅窓) 조지운(趙之耘, 1637~1691)은 달을 벗 삼아 '묵매도(墨梅圖)'를 그린다.

조선 시대는 사화와 당쟁이 심했다. 조지운 역시 정치색에 휘말려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그림에만 매진했다. 그는 진경시대를 예고한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의 아들이다.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워 묵매와, 새나 동물을 그린 영모화에 뛰어났다. 호가 '매창(梅窓)' '매은(梅隱)' '매곡(梅谷)'일 만큼 매화에 진심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뻗거나 하늘로 치솟은 매화, 옆에서 아래로 내리거나 옆으로 뻗은 매화 등 다양한 체형의 '묵매도'를 그렸다. 그의 수많은 '묵매도' 중 이 작품은 달빛 아래 옹기종기 핀 매화가 일품이다. 달과 단짝을 이룬 매화가 고결한 기운을 풍긴다. 갈필로 그린 매화나무 둥치로 화면의 중심을 잡았다. 세월의 두께에 거칠어진 둥치 사이로 크고 작은 가지가 뻗어 올랐다. 둥근 달에 가닿을 듯 높게 치솟은 가지 끝에 매화 봉우리가 맺혔다. 옆으로 난 가지에는 활짝 핀 매화가 달빛에 반짝인다.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겠다는 화가의 다짐이 결연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녹았다. 찬바람을 뚫고 매화 감상에 나선 선비가 있다. 인생 자체가 매화인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다. 그는 집 주위에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매화에게 안부를 물었다. 매화 향기로 마음을 씻고, 매화 그림 병풍이 둘러쳐진 서재에서 글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봄 기다리는 성급한 마음에…선비의 꽃 매화 찾아나서다
김남희 작가
여항문인들의 대부 조희룡은 벽오시사(碧梧詩社)를 결성하여 그림을 그리고 시회(詩會)를 열었다. 예술을 논하고 작품 활동에 앞장서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중국의 남종 문인화를 조선의 시각으로 이상이 아닌 현실적인 감각을 불어넣은 우리의 문인화를 추구했다. 스승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추사체의 필법을 전수받아 글씨와 그림을 자유자재로 휘두른 걸출한 화가이다. 특히 꿈틀거리는 용필의 터치와 먹 기운은 현대미술을 방불케 할 만큼 독보적이어서, 근대 회화 태동의 씨앗이 됐다.

거칠고 야일한 '매화도'는 먹빛과 조형미가 춤추듯 발랄하다. 조희룡은 매화가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고목의 둥치가 위로 뻗거나 다른 가지가 아래로 휘어져 용솟음치듯 화면이 격정적이다. 옅은 먹색으로 거칠게 휘몰아치는 나무 둥치에 검은 먹선을 용의 비늘처럼 거침없이 내려찍었다. 흰색의 꽃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 사이 분홍빛 매화가 곱다. 비바람에 깎이고 할퀸 자국에 매화나무의 인생이 시리도록 아프다. 그 아픔을 딛고 핀 꽃은 처절하게 웃고 있다. 꽃들의 잔치에 나도 매화가 된다.

◆묵언수행 중인 매화나무의 꽃망울

천을산 정상 부근에 다다랐다. 붉은 기운이 도는 매화나무 곁에 섰다. 가만히 보니, 가지 끝에 뾰족한 꽃망울이 숨어있다. 세찬 추위에 나무는 어떻게 꽃망울을 품었을까. 패딩점퍼를 입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온기를 축적했을까. 매화나무가 수행자 같다. 계절의 변화에도 흔들림 없이 묵언 고행 중인 수행자. 한 그루의 살아있는 '경전(經典)'이다. 그래서 선조들이 탐매에 나선 것일까. 등신불 같은 경전을 체감하고자 추위를 뚫고 걸음을 옮겼던 것이 아닐까. 지금 세상은 내전으로 뜨겁지만 천을산에는 경전의 자획(字劃) 같은 매화 꽃망울이 움트고 있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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