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깨닫는 아버지 마음
조금은 서툴고 거칠었을 뿐
언제나 내 편이었다는 것을
어린 시절 달콤한 기억처럼
당신 피가 여전히 내 속에 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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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훈 소설가 |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 아버지는 부산 당감동에 위치한 금속가공공장에서 근무하셨다. 어머니가 대구에서 미장원을 운영하셨던 관계로 두 분은 주말부부셨는데, 난 매주 토요일 밤이면 동생과 함께 MBC토요명화를 보며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물론 어린 우린 일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어머니 옆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곤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한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방 안 어디엔가 놓여있을 검은 색 비닐봉지를 찾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그 당시 해태제과에서 만든 프랑스식 최고급과자 사브레가 들어 있었다. 대구로 올라오실 때마다 아버지는 항상 그 과자를 선물로 사 오셨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크라운산도나, 에이스, 초코파이로 바뀌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사브레가 아버지로, 아버지가 사브레로 보이기도 했다. 처음엔 딱딱하고 거칠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르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우리 아버지.
일요일 오전이면 아버지와 난 동네 골목길에서 축구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때로는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 들러 아버지의 모교인 대구상고(現 대구상원고)의 야구경기를 관람하곤 했다. 물론 어머니는 파마약 냄새 가득한 미장원 안에서 양양누나와 함께 악전고투해야 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직장에 사표를 내시고 무작정 대구로 올라오셨다. 새로운 직장을 찾는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고, 그렇게 집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다 보니 우리 사이엔 사브레의 거친 표면처럼 미묘한 트러블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에도 언쟁을 벌이는가 하면, 때론 언성을 높이며 서로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까지도 나에겐 무기력해 보였다. 난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힘들게 문학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을 때쯤, 뜻밖에도 한 여자를 만나 결국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왕 아버지가 된 이상 난 그들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사브레가 아니라 버터링쿠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켜켜이 쌓여가는 불신의 벽은 이제 극복하기에 불가능해 보였다. 나의 아이들도 결국 나(아버지)란 존재를 부정하며 떠나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난 잠 못 이뤘다. 어쩜, 그 시절의 나와 그리도 꼭 닮았는지…. 나의 부족함에 치를 떨며 달아나는 아이들을 향해, "난 너의 아버지다. 내가 너의 아버지란 말이다!"하고 간절히 불러보았지만 아이들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난 결국 리어왕의 슬픈 운명처럼 우주 한가운데를 외로이 떠돌아야만 했다.
난 이제 쉰여섯이다. 나의 아이들은 서울로, 일산으로 각자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버렸다. 혼자가 된 난 여전히 난방과 온수 문제로 아버지와 다투기도 하고, 진보와 보수의 경계 사이에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당신은 언제나 내 편이었다는 사실을. 아니,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조금은 서툴고 거칠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시절 잊히지 않는 사브레의 달콤한 기억처럼, 당신의 뜨거운 피가 여전히 내 속에 흐르고 있다. 그렇게 난 항상 당신의 아들이고, 당신은 언제나 나의 아버지다.
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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