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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대구점 3층에 마련된 필사 노트 서적 코너 일부분. |
직장인 박모(25)씨는 지난해부터 독서를 취미로 삼았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다. 최근엔 책을 읽다 나만의 한 문장을 찾아 필사하고 있다. 박씨는 "읽기만 하고 끝내니 책을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독후감은 귀찮고 부담스러워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하기로 했다"며 "천천히 따라 쓰면서 메시지를 곱씹을 수 있고, 오래 기억할 수 있어서 좋다. 글씨 연습이 되는 건 덤"이라고 말했다.
'필사 열풍'이 불고 있다. 독서를 멋지게 여기는 텍스트힙(Text Hip) 트렌드가 읽는 것을 넘어 쓰는 것으로도 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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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헌법을 필사하는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사진은 교보문고 대구점 3층에 마련된 '헌법 필사' 매대. |
◆텍스트힙이 쏘아올린 '필사 열풍'
지난 2일 찾은 교보문고 대구점 3층. 한 기획 코너에 손님들이 몰려 있었다. 해당 코너는 '필사 노트'를 진열해둔 공간이었다. 필사 노트는 필사하기 좋은 구절을 하나씩 제시하고 따라 쓸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한 책이다. 왼쪽 페이지에 텍스트가 있다면 오른쪽 페이지엔 필사할 공간이 있는 식이다. 여기서 만난 40대 시민은 "요즘 필사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 저도 필사할 만한 책을 찾으러 서점에 방문했다. 그런데 필사 노트라는 간편한 책이 따로 있길래 이를 구매하려 한다"고 말했다.
교보문고 대구점 관계자는 "재고 문의도 따로 들어올 정도로 최근 필사 관련 책이 인기임을 체감하고 있다"며 "당장 구체적인 판매량은 알기 어렵지만 전보다 찾는 고객이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특히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는 지난해부터 베스트셀러 10위권에 꾸준히 들고 있다.
각박한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적 행위로 위안
문해력 저하에 대한 우려도 필사 유행에 한몫
거장 명구절 엄선한 '필사용' 책도 잇따라 출간
계엄 이후엔 헌법 읽고 베껴 쓰는 문화도 생겨
민주주의 의미 되새기는 젊은 세대 사이서 각광
일시적 열풍 아닌 내실있는 독서문화 발전 가능성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최근 독서가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텍스트힙'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필사도 주목받고 있다"며 "필사는 아날로그적인 행위인데, 각박한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행위를 통해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와 맞물려 더욱 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단편적인 디지털 정보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문해력 저하와 지적 수준의 저하에 대한 우려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필사를 통해 지적인 허전함을 채우려는 욕구도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필사집 출간도 늘고 있다. 지난달 20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필사책 출간 종수는 81권으로 전년(57권) 대비 42.1% 증가했다. 지난달 24일 출간된 '시로 채우는 내 마음 필사노트'(창비)는 신경림·김용택·정호승·도종환 등 지난 50여 년간 한국시단을 이끌어온 거장들의 명구절을 시인들이 직접 엄선해 구성한 책이다. 그리움, 사랑, 휴식, 위로 등 다양한 감정을 따라 100가지 시구를 따라 쓸 수 있다. 지난해 12월 문학동네에서 펴낸 '한강 스페셜 에디션'은 구성품에 필사집이 포함됐다.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흰' '검은 사슴'과 필사 노트까지 총 네 권으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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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사태 이후 헌법을 필사하는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사진은 헌법 필사 책에 헌법을 필사한 모습. <X @2lcmn 제공> |
최근엔 필사하는 구절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전에는 주로 시·산문 등 문학 서적의 구절을 썼다면 비상계엄 사태 이후엔 헌법을 필사하는 문화가 특히 확산하고 있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구속기소 되는 등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총 130개조로 이뤄진 헌법을 읽고 베껴 쓰며 국가권력과 주권, 민주주의 등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젊은 세대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영남대 이세영(22)씨도 계엄 사태 이후 하루 한 장씩 헌법을 필사하고 있다. 이씨는 "시민으로서 나라가 시끄러운 만큼 헌법을 보다 잘 알아야겠다고 느꼈다. 계엄의 위헌 여부를 두고 말이 많은데, 계엄이 위헌인 이유에 대해 스스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해 헌법을 필사하며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SNS에도 "우리가 밟고 있는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쓸 때) 한 자 한 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속 시끄러울 때 법을 필사하니 마음이 든든해진다" 등의 후기글과 함께 헌법 필사 인증샷들이 올라오고 있다. 정병기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비상계엄 사태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헌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며 "젊은 세대의 경우 구세대에 대한 저항 의식이 다른 세대보다 높기에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트렌드에 발맞춰 오프라인 서점엔 헌법 필사책인 '헌법 필사'(더휴먼) 판매대도 따로 마련됐다. 지난 2일 교보문고 대구점도 이 책을 한데 모은 코너를 선보이고 있었다. 책은 지난해 10월 출간됐지만 비상계엄 이후 판매량이 부쩍 늘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헌법 필사' 판매량은 비상계엄 사태 전주(지난해 11월27일~12월3일)에 비해 계엄 직후(지난해 12월4일~10일) 183% 증가했다. 문화콘텐츠 플랫폼 예스24에선 지난달 판매량이 전월 대비 무려 1천36% 껑충 뛰었다.
밴드 음악의 가사,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필사하는 책도 출간돼 호응을 얻고 있다. 4인조 밴드 '데이식스(DAY6)'의 노랫말 가사가 적혀 있고 오른쪽에 이를 필사할 수 있게 한 'DAY6 가사 필사집'(삼호ETM)은 예약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 1위, 종합 18위에 올랐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명문장을 엄선해 수록한 '셰익스피어 필사 노트'(문학동네)도 인기다.
◆서점가에서도 트렌드 이어가
필사 열풍 속 서점·출판업계에선 독자 참여 이벤트로 필사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예스24는 독서 커뮤니티 '사락'과 함께 '2025 사락독서챌린지'를 오는 16일까지 진행한다. 완독하고 싶은 책 1권을 선정해 읽고, 기억에 남는 문장을 필사해 10일 동안 올리면 1천원의 예스(YES)상품권을 증정한다. 챌린지 전 참여자 중 20명에겐 문학 디자인숍 '글입다'의 필사 독서용품 6종 세트(필사노트, 독중감, 미니 독서영수증, 연필세트, 종이책갈피, 북퍼퓸)를 선물한다. 지난 6일까지 이 챌린지에는 약 3천300명이 참여했으며 필사 포스트는 6천700여 건이 올라왔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옮겨 적고 열고 닫는 새해 새마음 필사'를 주제로 필사하기 좋은 도서를 큐레이션 하고 있으며 큐레이션된 책을 구매하면 노트를 주고 있다. 창비 출판사는 지난해 12월 필사클럽을 모집해 '자신을 속이지 않는 공부' '소년이 온다' '글 쓰는 딸들' 등의 책을 필사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또 '헤매는 중이지만 해내는 중입니다' '허송세월' 'DAY6 가사 필사집' 등의 도서들은 구매 시 필사를 위한 노트를 증정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필사 열풍 같은 현상이 내실 있는 독서 문화로 발전하고, 독서에 대한 관심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언론을 비롯한 각계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글·사진=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